희망이라는 덫. 희망의 조금 다른 말은 가능성. 다른 말로 자신의 바람이라는 덫.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 가능성을 잃은 미래만 남는다면 현재가 있을 의미가 없다.
그와 동시에 현재가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다.
결국 희망 그 자체는 현재엔 있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희망의 유사어인 바람이라는 단어 속에는 변화라는 단어가 함께 포함 되어 있다.
현재의 자신이 환경압력이나 동조압력에 의해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다른 결과를 바라지만 같은 결과를 반복한다. 예를 들어 가족 관련의 일들은 대체로 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같은 결과를 십수 년 넘게 반복한다. 간혹 확률의 우연으로 다른 것이 튀어나오더라도 이는 결국 평균 회기로 수렴한다.
변화가 동사로서 작동한다면 다른 미래를 생각해 봄 짓 하지만 꽤나 많은 경우엔 동사로서의 기능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의 바람일 따름이다.
희망의 조금 다른 말은 가능성임과 동시에 바람이기에 이것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사건이 확정되지 않아 확률로 존재하는 지평을 미래라고 한다면 그 순간 미래는 리스크가 된다. 애초 변화 그 자체가 리스크다.
현재 상태에 의해 확정된 예정 조화를 따를 것인가, 리스크를 감당하고 동사로서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는 자신의 연령, 유전자, 살아온 과정 중에 겪은 일들, 현재 상태에 만족도, 행복감, 성취감, 경제적 상황 등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중에서도 고통의 한가운데의 있는 이가 견뎌내지 못할 경우, 즉 존재 자체에 유무가 관련될 경우 선택 혹은 변화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하루하루를 절실하게 살아간다.
또는 삶의 관성이 거대해지며 동시에 오래되어가는 과정 중 몇 가지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내면화 하면서, 현재 상태에 만족하는 이가 동사로서의 변화를 희망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미래는 현재를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관측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없어서는 애초 현재, 미래 같은 단어는 들어올 수조차 없다.
희망을 잃은 미래만 남는다면 현재가 있을 의미가 없다.
미래라고 해도 어차피 현재와 이어져 있다.
현재를 잃으면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능성을 잃은 미래만 남는다면
현재가 있을 의미가 없다.
덫의 완성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네 삶이라는 것은 덫을 피하기도 하고, 때론 덫인걸 알면서도 정면으로 들어가 물리기도 한다. 피하던 물리던 그에 대한 청구서는 시간차를 두는 한이 있더라도 꼬박 꼬박 온다. 그런 행위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거의 대부분이 찢겨 나가고 뭉개지고 갈려나가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간혹 사라지지 못한 채 콩알만 한 것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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