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가 끝난 후, 말 할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런류의 글인것 같습니다. 문득 예기치 못한 바람이 갑자기 불어 나름의 정리라면 정리, 소회라면 소회를 써봤습니다. 길고 지루한 이야기 일수도 있습니다.
암실에서 이십여 년 동안 프린트한 뒤 디지털 프린트로 옮겨왔지만, 기술적 관점에서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암실에서는 확대기의 광원 특성, 노광 시간과 필터, 닷징과 버닝, 현상 조건과 인화지의 성질을 조절하고 때론 셀레늄 토닝 등을 하며 네거티브에 담긴 이미지를 물질로 옮겼다. 디지털 프린트에서는 파일의 톤과 색조, 잉크와 종이, 출력 장치와 관찰 환경을 다룬다.
도구와 공정은 달라졌지만 결국 묻는 것은 같다.
이 원고는 종이 위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모니터에서 보이는 원고를 종이에 그대로 전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니터는 스스로 빛을 내지만 프린트는 주변의 빛을 흡수한 뒤 남은 것을 반사한다. 파일에는 물성이 없지만 종이에는 표면과 두께, 광택과 흡수성, 빛의 산란이 있다. 같은 검정도 종이와 잉크, 조명과 관람 거리에 따라 전혀 다른 검정이 된다. 그리고 때론 이것은 전혀 다른 감정이 된다.
따라서 프린트는 전사 혹은 단순한 번역이라기보다, 원고가 다른 물리적 조건 안에서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관계를 설계하는 일에 가깝다.
디지털 프린트로 옮겨온 이후에도 물리적 표현의 한계와 그 경계를 탐색하고 넓혀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더 깊은 검정, 더 넓은 색역, 더 높은 해상도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원고가 요구하는 시각적 상태를 실제 종이 위에서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를 재현할 수 있는지를 계속 확인해 왔다.
이 글은 그 과정 중 하나에 관한 기록이다.
그중에서, 2026년 개인전 《캘리포니아에는 눈이 온다. 라스베가스에는 ,》를 준비하며 세운 미학적 목표와, 그것을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프린트로 구현을 위해 검토하고 만들어간 기술적 접근에 관한 기록이다.
컬러 프린트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색역의 한계와 색채순응, 잉크의 중첩, 종이 고유의 백색 캐릭터, 관찰광의 차이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도 개인적인 체감으로는 흑백 프린트가 컬러 프린트보다 세네 배 정도 더 어렵게 느껴진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측정한 난이도의 비율은 아니지만, 이십여 년 동안 암실과 디지털에서 흑백 프린트를 다뤄오며 느낀 허용오차의 차이에 가깝다.
컬러 프린트는 다루어야 할 변수가 많다.
반면 흑백 프린트는 결과를 구성하는 요소가 적어 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요소에 허용되는 오차의 범위가 좁다.
컬러 이미지에서는 대상과 대상 사이의 차이를 밝기뿐 아니라 색상과 채도가 함께 만든다. 밝기가 비슷한 두 영역도 색이 다르면 서로 구분될 수 있다. 따뜻한 피부와 차가운 배경, 붉은 표면과 푸른 표면은 비슷한 명도를 가지더라도 색채 대비를 통해 분리된다. 여기에 주변 색에 따라 동일한 색도 다르게 지각되는 동시대조(Simultaneous Contrast) 같은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컬러 이미지의 지각은 개별 색값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흑백으로 옮기는 순간 이러한 색채 단서는 대부분 사라진다.
색상과 채도가 담당하던 분리와 깊이, 온도와 거리감 등을 제한된 밝기와 검정, 표면과 질감의 관계 안에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 컬러에서는 서로 다른 색이, 같은 회색으로 합쳐질 수도 있고, 원래는 색상 차이로 구분되던 두 표면이 거의 동일한 밝기로 겹칠 수도 있다.
흑백 변환은 색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다. 색이 담당하던 관계를 새로운 톤의 배치로 재구성하는, 허용오차가 좁은 추상화 과정이다. 컬러 이미지에서는 명도뿐 아니라 색상과 채도, 그리고 주변 색과의 동시대조(Simultaneous Contrast) 같은 지각적 관계가 대상의 분리를 함께 돕는다. 그러나 흑백에서는 이러한 색채 정보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고, 대상의 분리와 깊이, 질감과 거리의 더 많은 부분을 명도 대비와 공간적 구조가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작은 밝기 관계의 변화가 이미지 전체의 구조에 미치는 영향도 상대적으로 커질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중성의 문제도 있다.
CIELAB에서 이론적인 중성 회색은 a*=0, b*=0으로 표현된다. a는 녹색과 적색 사이의 방향을, b는 청색과 황색 사이의 방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실제 흑백 프린트는 완전한 무색 물질이 아니다. 검정과 회색 잉크, 종이 고유의 백색 캐릭터, 형광증백제의 함량과 관찰광에 따른 영향, 표면 코팅과 조명의 분광 특성이 결합해 최종 색조를 만든다.
중성축의 작은 변화가 전체 톤에서 같은 방향으로 나타나면 프린트는 차갑거나 따뜻하게 느껴진다. 밝은 영역과 어두운 영역의 중성축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 톤에 따라 색조가 갈라지는 크로스오버처럼 보일 수 있다.
컬러 이미지에서는 이러한 미세한 색차가 주변의 여러 색에 섞일 수 있다. 하지만 중성을 전제로 바라보는 흑백 프린트에서는 작은 a, b 변화도 이미지 전체의 색조로 인식되기 쉽다.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토닝이나 명암대별로 의도된 스플릿 토닝이라면 그 변화 자체가 하나의 표현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톤 구간마다 a, b의 방향과 크기가 불규칙하게 흔들리면, 일반적으로 그것은 의도된 색조라기보다 시각적 노이즈로 인식되기 쉽다.
색이 사라진다고 미학적 구성요소가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적은 요소로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때문에 각각의 요소에 허용되는 오차의 범위가 좁은 변수 하나하나가 작품 전체를 떠받치게 된다.
이번 전시의 프린트에서 필요했던 것은 극단적으로 강한 대비나 화려한 디테일이 아니었다.
이미지 속 검정은 충분히 깊고 무겁게 남아야 했다. 그러나 그 어둠이 하나의 막힌 면이 되어서는 안 됐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하나의 조용한 검정으로 느껴지더라도,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물면 그 안에 있던 표면과 거리, 희미한 구조가 천천히 나타나야 했다.
검정은 존재해야 했지만 이미지를 압도해서는 안 된다.
어두운 부분은 열려 있어야 했지만 가벼워져서는 안 된다.
미세한 질감은 남아 있어야 했지만, 그것이 작품보다 먼저 눈에 들어와서도 안 된다.
말로 표현하면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프린트에서는 이 조건들이 맹렬하게 충돌한다.
검정을 더 진하게 만들면 가장 어두운 부분의 미세한 차이가 뭉개질 수 있다. 반대로 섀도우를 잘 보이게 하려고 밝히면 이미지가 가지고 있던 무게와 침묵이 사라질 수 있다.
선명도를 높이면 작은 질감은 살아나지만, 경계가 과장되거나 프린트 전체가 인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
단순히 검정을 더 어둡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어둠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를 남길 것인가. 그리고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검정의 밀도와 이미지의 물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흑백 프린트의 품질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수치는 Dmax다.
Dmax(프린트가 구현한 가장 높은 광학농도)는 종이가 빛을 얼마나 적게 되돌려 보내는지를 로그값으로 표현한다. 수치가 높을수록 더 적은 빛을 반사하고, 일반적으로 더 깊은 검정으로 보인다.
Dmax는 분명 중요한 지표다.
그러나 가장 짙은 검정 하나만으로는 그 검정에 도달하는 과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서로 가까운 어두운 톤이 실제로 구분되는지, 검은 직물이나 검은 바다, 축축한 땅의 구조가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없다.
검정이 깊다는 것과 어둠이 풍부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일상에서는 흔히 대비가 강한 것과 톤이 풍부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콘트라스트가 강하다”는 말로 구분 없이 쓰는 경우를 종종 마주한다. 그러나 Dmax가 높더라도 검정 바로 위의 여러 단계가 하나로 뭉친다면, 프린트에는 깊은 검정은 있을지 몰라도 어둠 사이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방법론에서는 흑백 프린트의 성질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폈다.
첫 번째는 톤 선형성이다. 톤 선형성은 원고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지정한 밝기 단계가 종이 위에서도 일정하고 순차적 변화로 나타나는지를 뜻한다.
두 번째는 국부 대비다. 서로 가까운 두 입력 톤이 실제 프린트에서 어느 정도의 밝기 차이를 만드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공간 아큐탄스다. 공간 아큐탄스(미세한 경계와 질감이 얼마나 분명하게 유지되는가)는 흙, 벽, 직물, 피부 표면 등의 작은 구조가 잉크의 번짐과 종이 내부의 빛 산란을 거친 뒤에도 얼마나 남는지를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는 종이 내부의 빛 산란이 인쇄된 톤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기 위해 Yule–Nielsen 모델도 함께 사용했다.
Yule–Nielsen 모델(율-넬슨 모델:종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빛의 산란 때문에 입력된 톤의 면적 관계와 실제 측정되는 반사율 또는 농도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현상을 경험적인 지수로 보정해 설명하는 인쇄 및 색채과학에서 사용하는 수학 모델 중 하나)은 프린트의 광학적 산란의 복합적인 영향을 비교하는 데 유용했다.
쉽게 말하면 잉크가 물리적으로 퍼진 정도만이 아니라, 종이 안으로 들어간 빛이 주변으로 산란한 뒤 다시 나오면서 인쇄된 톤이 시각적으로 달라지는 현상을 수치로 살펴보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번 실험에서는 율-넬슨 모델과의 오차가 가장 작은 결과가 실제 PCS L*의 톤 분리나 반복 시각평가에서 가장 좋은 결과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것은 중요한 증거였다.
종이 내부의 광학적 산란을 잘 설명하는 것과 작품에 필요한 어둠의 간격을 잘 재현하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즉 톤 선형성, 국부 대비와 공간 아큐탄스 역시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같은 문제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이 결과는 톤 선형성, 국부 대비와 공간 아큐탄스를 하나의 지표로 대신할 수 없다는 증거가 되었다.
따라서 율-넬슨 모델은 용지와 출력의 광학적 성질을 이해하기 위한 진단 지표로 사용하되, 최종 프린트의 우열을 결정하는 목적함수로 사용하지 않았다.
섀도우 전체를 밝히면 어두운 톤 사이의 수치적 차이는 커질 수 있다. 하지만 미묘한 경계나 검은 천의 직조감, 젖은 땅의 습기감이 반드시 더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출력 선명도를 높이면 경계는 강조될 수 있지만 톤의 연결이 더 자연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처리는 경계 주변에 밝거나 어두운 테두리를 만들고, 원래 없던 질감과 노이즈를 강조할 수도 있다.
무엇을 개선하려는 것인지 구분하지 않으면,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훼손했는지조차 알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각각의 문제를 서로 다른 평가축으로 분리하는 일이 중요했다.
검정에서 종이의 흰색까지 사용할 수 있는 밝기 범위는 무한하지 않다.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사용 가능한 명도 범위 = 종이 백색의 L* − 가장 짙은 검정의 L*
L*(사람이 느끼는 밝기를 0에서 100 사이의 값으로 표현한 지표)의 전체 범위는 종이와 잉크 특성, 미디어 설정, 잉크 최대 토출량 설정(단순히 더 깊은 검정을 만들려고 잉크를 한정 없이 부어버리면 오히려 더 뿌옇게 된다), 헤드 렌더링 해상도, 스크리닝 알고리즘, 출력 조건에 의해 제한된다.
따라서 가장 어두운 구간에 더 많은 밝기 간격을 배분하면 다른 구간에서는 그만큼의 간격을 줄여야 한다. 가장 깊은 검정과 모든 구간의 완벽한 선형성, 최대의 섀도우 분리와 단단한 중간톤 대비를 하나의 톤 커브로 동시에 끝없이 높이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두운 부분을 무조건 많이 보여주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최대화할 것인지가 아니라, 작품 원고가 필요로 하는 성질을 먼저 정하고 제한된 밝기 범위를 어디에, 어떻게 배분할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번 전시의 경우 검정은 넓고 묵직하게 남아야 했다. 동시에 가장 어두운 부분에 존재하는 낮은 대비의 표면과 구조가 완전히 닫혀서는 안 된다.
관람자가 처음에는 하나의 어두운 덩어리로 받아들이고, 조금 더 오래 바라보았을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거리와 표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했다.
기술은 이 시각적 순서를 방해하지 않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재차 중요하게 확인한 사실 중 하나는, 하나의 측정 조건이 모든 역할을 담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프린트의 톤 변환을 설계할 때에는 M3 측정을 사용했다.
M3(편광을 이용해 종이 표면에서 직접 반사되는 빛을 줄이는 측정 조건)는 정반사 성분과 표면 텍스처의 광택 차이에서 생기는 측정 변동을 줄여, 잉크층이 만드는 톤의 관계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필 수 있게 한다.
광택 계열에서는 같은 패치를 반복 측정하더라도 표면 반사의 미세한 차이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변동이 톤 모델에 그대로 들어가면 실제 잉크의 농도 차이보다 측정 당시의 표면 상태가 과도하게 반영될 수 있다.
반면 최종 출력물이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를 확인할 때에는 M0 측정을 사용했다.
M0(편광 없이 프린트의 일반적인 반사 특성을 측정하는 조건)는 기존 출력 평가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최종 프린트의 외관을 확인하는 기준으로 사용했다.
쉽게 말하면 프린트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데 유리한 데이터와, 완성된 프린트의 모습을 판단하는 데 적합한 데이터를 분리한 것이다.
ICC 색관리의 내부 구조로 표현하면 B2A(PCS의 값을 실제 출력 장치의 값으로 변환하는 출력 방향)와 A2B(출력 장치의 값을 PCS로 기술하는 측정·외관 방향)가 반드시 같은 측정 조건만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PCS(Profile Connection Space)는 서로 다른 장치 사이에서 색과 밝기를 전달하기 위해 ICC 색관리 시스템이 사용하는 공통 기준 공간이다.
출력 방향에서는 표면 변동이 억제된 안정적인 톤 관계를 사용하고, 외관과 소프트프루프에서는 사람이 실제로 보게 될 프린트의 종이 백색과 반사 특성을 사용한다.
이것은 특정한 측정 조건이 언제나 다른 조건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데이터가 어느 역할에 적합한지를 구분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두 역할을 하나의 데이터에 모두 맡기면 실제 출력의 톤은 좋아졌지만 소프트프루프가 맞지 않거나, 화면과 프린트의 외관은 비슷해졌지만 출력 변환의 반복성이 불안정해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번 방법은 출력 변환과 최종 외관의 기술을 분리함으로써 표면 특성 때문에 발생하던 측정 변동을 줄이면서도, 실제 관찰 상태에서의 검정과 톤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대표적인 광택 계열 용지와 제조사 정품 잉크, 전용 흑백 출력 조건을 기준으로 최종 방법을 반복 검증했다.
가장 짙은 검정은 L*=1.543, Dmax는 2.767이었다.
Dmax 2.767을 광학농도의 정의로 단순 환산하면 입사광의 약 0.17%에 해당하는 반사율이다.
그러나 이번 검증의 목적은 가장 낮은 반사율 하나를 얻는 데 있지 않았다.
그 검정을 유지한 채, 검정 바로 위에 놓인 여러 어두운 단계가 실제로 서로 구분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원고에서 요구한 전체 톤과 실제 출력 사이의 L* MAE는 0.211이었다.
MAE(평균절대오차)는 각 단계에서 요구한 밝기와 실제로 측정된 밝기의 차이를 절댓값으로 바꾼 뒤 평균한 수치다. 양의 오차와 음의 오차가 서로 상쇄되지 않기 때문에, 출력이 목표 톤을 얼마나 정확하게 따라갔는지를 비교하는 데 유용하다.
가장 민감한 L=0~20의 깊은 섀도우 구간에서도 MAE는 0.366이었으며, 전체 검증에서 나타난 최대 절대 오차는 0.999 L 이내에 머물렀다.
PCS L=0~10으로 지정한 가장 어두운 검증 구간은 실제 프린트에서 9.163 L의 범위로 재현되었다.
이 결과는 가장 어두운 10 L의 요구 범위가 검정 부근에서 지나치게 압축되지 않고, 실제 출력에서도 대부분의 폭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그 구간에서 가장 분리하기 어려웠던 두 인접 단계의 차이도 0.953 L였다.
ΔL(두 톤 사이의 밝기 차이)가 모든 구간에서 정확히 같았다는 뜻은 아니다. 가장 불리한 지점에서도 인접한 두 어둠이 거의 1 L에 가까운 간격을 유지했다는 의미다.
검정에서 흰색으로 진행하는 동안 다음 단계가 이전 단계보다 어두워지는 단조성 위반은 0회였으며 또한 세 차례 반복 측정에서 가장 큰 표준편차는 0.064 L*였다.
표준편차는 반복 측정값이 평균 주변에서 얼마나 흩어졌는지를 나타낸다. 이 값이 작다는 것은 좋은 결과가 한 번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동일한 조건에서 반복해도 측정 결과가 매우 좁은 범위에 안정적으로 모였다는 뜻이다.
이전의 M0 RAW 기준과 비교하면 전체 L* MAE는 69.6%, L=0–20 섀도우 MAE는 75.9% 감소한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가장 약했던 깊은 섀도우의 인접 단계 분리는 95.9% 증가한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 과정에서도 Dmax와 검정 L는 손상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결과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오차가 작아졌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검정을 밝게 들어 올려 어두운 정보를 드러낸 것이 아니라, 가장 짙은 검정의 끝점을 유지한 상태에서 그 위에 놓인 여러 어둠의 간격을 더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배분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검정을 더 어둡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어둠 사이의 거리를 다시 설계한 것이다.
측정값이 좋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방법을 최종 기준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수치가 설명하는 것은 프린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용지와 건조 조건에서 출력을 반복하고, 출력물의 위치와 순서를 바꾸어 비교했다. 어떤 방식으로 출력했는지 알 수 없도록 블라인드 테스트 환경에서 검정의 무게, 가장 깊은 섀도우의 분리, 저대비 표면의 입체감, 중간톤으로 이어지는 연결성, 경계의 과장과 표면 광택의 차이를 나누어 살폈다.
특히 검은 직물, 젖은 흙, 어두운 피부와 매끄러운 저대비 표면처럼 수치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사용했다.
섀도우가 더 많이 보이는지 하나만을 평가하지 않았다. 검정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는지, 어두운 구간을 연 대가로 중간톤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워지지는 않았는지, 질감이 살아난 대신 경계가 과장되지는 않았는지를 함께 확인했다.
새로운 방식이 더 좋아 보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출력 시점에서도 같은 경향의 차이가 반복되어야 했다. 개선되지 않은 항목과 악화된 항목이 있다면 그것 역시 함께 기록했다. 새로운 기술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존 기준을 교체하지 않는다.
판단의 기준은 새로움이 아니라, 더 나은 결과를 반복해서 만들 수 있는가이다.
이번 검토를 통해 현재의 톤 재현 방식은 내 기준에서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전체 톤과 깊은 섀도우의 오차가 충분히 작아진 만큼, 남아 있는 디테일의 문제를 계속 톤 커브 안에서만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재차 도달했다.
지금까지는 검정의 밀도, 섀도우 분리와 미세한 질감의 선명도가 하나의 문제처럼 얽혀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결과를 기준점으로 삼으면서 평균적인 톤의 재현과 실제 이미지 경계의 전달을 개념적으로, 그리고 절차적으로 서로 분리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용지와 출력 크기, 관람 거리에 따른 공간 전달 특성을 별도의 축으로 두고, 공간주파수별 출력 전용 샤프닝을 적용해 검증했다.
종이 위에 인쇄된 미세한 경계는 잉크의 확산, 코팅층의 구조, 종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빛의 산란에 영향을 받는다. 같은 파일을 출력하더라도 고광택, 바리타 계열, 코튼 렉 계열, 매트 코팅지와 흡수성이 높은 비코팅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계와 질감을 재현한다.
이를 살피는 대표적인 개념이 MTF다.
MTF(변조전달함수)는 원본의 미세한 명암 변화가 출력물에서도 얼마나 유지되는지를 공간적 크기별로 나타내는 지표다. 단순히 해상도가 몇 dpi인지를 말하는 수치가 아니라, 작은 무늬와 경계의 대비가 프린트 과정에서 얼마나 약해지는지를 살피는 방법이다.
중성 패치에서 두 단계가 잘 구분된다고 해서 실제 이미지 속 젖은 땅이나 어두운 직물의 결이 반드시 잘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패치는 평균적인 밝기의 차이를 측정하지만, 실제 디테일은 서로 맞닿은 경계와 공간주파수에서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간주파수는 이미지 안의 구조가 얼마나 크고 성긴지, 또는 얼마나 작고 촘촘한지를 나타낸다. 넓고 완만하게 변하는 톤과 촘촘한 머리카락의 결은 같은 밝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다르게 전달된다.
톤 커브를 열어 섀도우 전체를 밝히면 평균적인 패치 차이는 커질 수 있다. 그러나 미세한 경계 자체가 종이 위에서 흐려졌다면 질감은 살아나지 않는다.
반대로 샤프닝으로 경계만 강하게 만들면 헤일로와 노이즈가 생기거나, 검정의 고요한 덩어리가 잘게 부서질 수 있다.
앞서 평균적인 톤의 재현과 실제 이미지 경계의 전달을 개념적으로, 그리고 절차적으로 서로 분리할 수 있었기에, 프린트 전용 샤프닝 역시 원고와 용지에 따른 적응형 방식을 재검토 할 수 있게 되었다.
용지의 전달 특성과 최종 출력 크기, 관람 거리를 함께 고려했다. 가까이에서 보는 소형 프린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는 대형 프린트는 같은 선명도 처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접근의 목적은 검정을 가볍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공간주파수별 프린트 전용 샤프닝을 필요한 범위 안에서 되도록 최소한으로 적용하여 그 안의 경계와 질감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검정의 무게를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공간주파수 대역의 경계와 질감을 별도로 보완할 수 있었다.
묵직한 검정과 높은 섀도우 아큐탄스를 하나의 톤 커브 안에서 경쟁시키지 않고, 서로 다른 단계에서 따로 다룬 것이다. 단순화 해서 말하자면 검정의 농도와 톤의 연결은 출력 변환에서 설계하고, 미세한 경계와 질감은 용지와 크기, 관람 조건에 맞춘 별도의 공간적 처리로 보완했다.
《캘리포니아에는 눈이 온다. 라스베가스에는 ,》의 프린트는 기술적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술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기술이 필요했다.
검정은 존재해야 했지만 화면을 압도해서는 안 됐다. 어두운 표면의 정보는 남아 있어야 했지만 설명적으로 드러나서는 안 됐다.
프린트는 이미지에 없는 것을 새로 추가하는 대신, 이미지 안에 이미 존재하던 침묵과 거리, 낮은 대비의 차이가 종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 목표를 따라 측정 타겟을 만들고 출력 조건을 바꾸며 반복 측정과 시각평가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하나의 전시에 사용할 프린트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실험이 이어지면서 특정 이미지와 특정 출력에만 적용되는 요령을 넘어, 이후의 작업에서도 검증하고 반복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확장되었다.
어떤 물리적 출력 조건을 기준으로 고정할 것인가.
어떤 측정값을 출력 변환에 사용하고, 어떤 측정값으로 최종 외관을 평가할 것인가.
새로운 방식이 등장했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기존 방식을 유지하거나 교체할 것인가.
출력 당시의 장비와 용지, 잉크와 측정 데이터를 어떻게 기록해야 수년 뒤에도 같은 결과를 다시 만들 수 있는가.
좋은 결과를 한 번 만드는 것과, 같은 결과를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작품 프린트에서는 두 번째 문제까지 해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출력 조건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하나의 장치 상태로 관리한다.
용지와 잉크, 출력 해상도와 드라이버 설정, 건조 시간, 계측 조건, 온습도와 관찰 환경을 함께 기록한다. 측정값뿐 아니라 당시 사용한 원시 분광 데이터와 반복 출력의 편차, 시각평가의 조건도 보관한다.
현재의 방식은 완성된 정답이라기보다 이후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기준점으로 남긴다.
복잡한 방법이 반드시 더 좋은 방법은 아니다. 앞으로 새로운 프로파일, 이론, 출력 방식이 등장하더라도 단순히 더 최신이라는 이유로 교체하지 않는다. 기존보다 톤 오차가 작아야 하고, 검정의 농도와 섀도우 분리를 유지해야 하며, 실제 이미지의 경계와 질감이 개선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시점에 다시 제작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하고, 몇 년 뒤에도 동일한 과정과 판단 기준을 복원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에 실제로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를 반복할 수 있을 때만 새로운 방법이 된다.
공방에서 작업 의뢰받았을 때 모든 이미지를 하나의 이상적인 흑백으로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은 검정이 넓고 무겁게 남아야 한다. 어떤 작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암부의 간격이 중요하다. 또 어떤 작품은 완전한 중성보다 아주 미세한 차가움이나 따뜻함이 이미지의 시간과 장소를 결정한다.
이것은 어조가 되고, 어조는 내용이 된다.
따라서 “섀도우 디테일을 살린다”는 말도 작품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숨어 있던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검정의 밀도는 그대로 둔 채 어둠 속 표면과 사물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단순히 프린트를 밝게 만들거나 대비를 낮추는 방식으로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프린트를 의뢰하는 작가가 L*, Dmax, MTF와 같은 기술적 개념을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다.
“검정이 떠 보인다.”
“어두운 부분이 답답하다.”
“디테일은 보이지만 사진이 가벼워졌다.”
“화면에서는 보였던 표면이 종이에서는 사라진다.”
이러한 말은 계측 용어가 아니지만 프린트의 문제를 정확하게 가리킬 수 있다.
작가가 감각의 언어로 말한 문제를 톤의 배분, 검정의 끝점, 중성축, 표면 반사, 공간 아큐탄스와 관찰 조건 같은 기술적 문제로 번역하고, 그 결과를 다시 작품의 언어로 되돌리는 것이 프린트 공방의 역할이다. 먼저 확인하려는 것은 사용하는 장비나 프로파일의 이름이 아니라, 완성된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보여야 하는가이다.
검정은 어떤 무게로 남아야 하는가.
어두운 부분은 어디까지 보여야 하는가.
중성이 작품에 필요한가, 아니면 미세한 색조가 이미지의 시간과 장소를 만드는 어조 역할을 하는가.
작품은 어느 크기로 출력되고, 어느 거리와 조명에서 관람되는가.
이러한 미학적 요구를 각각의 기술적 조건으로 나눈 뒤 출력과 측정, 시각평가를 반복한다.
기술은 작품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방향을 설명하고 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뒤따른다. 모든 프린트 의뢰에 논문이나 수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익숙한 출력 방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면, 현상을 추측으로 덮지 않고 측정과 비교가 가능한 지점까지 내려가 원인을 확인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의 복잡성이 아니라, 그 복잡성이 실제 작품에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내는가이다.
《캘리포니아에는 눈이 온다. 라스베가스에는 ,》 작업의 프린트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미지 속 어둠을 없애지 않으면서, 그 안에 시선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남기는 것.
흑의 무게를 유지하면서도 그 내부의 표면과 거리, 희미한 구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술적 목표였다.
이번에 정리한 방법론은 하나의 전시를 위해 시작된 기술적 해법을, 이후의 다른 작업에서도 검증하고 반복할 수 있는 공정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좋은 프린트는 파일 안의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종이에 옮긴 결과만은 아니다.
작품이 요구하는 시각적 맥락이 적절한 물성을 얻고, 그 맥락이 다음 프린트에서도 다시 성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작품을 기술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작품의 뒤를 따르도록 하는 것.
기술의 한계가 작품의 한계로 되지 않도록 궁리 하는 것.
기술이 작품의 표현을 확장하되, 작품보다 먼저 표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
기술의 목적은 작품이라는 당연함을, 현실에서도 당연한 결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프린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캘리포니아에는 눈이 온다.
라스베가스에는 , 》
전시를 마쳤습니다.
작품을 만들고, 걸고, 함께하고, 다시 거두어오는 시간까지 지나왔습니다.
전시장에 찾아와주신 분들, 작품 앞에 잠시 멈춰주신 분들, 조용히 보아주신 분들, 말을 건네주신 분들, 그리고 작품을 마음에 두고 지켜봐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작품 앞에 머물러주신 다양한 시간들, 때로는 말로 다 옮기기 어려운 오랜 머묾의 순간들까지 포함해 이번 전시의 일부로 조용히 기억 될것 같습니다.
전시 공간을 함께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음 작업으로 다시 볼 수 있길 바랍니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잠결에 꿉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인기척이 들렸다. 여기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아마 도둑이거나 그런 거겠지. 눈을 떠야 하는데 눈꺼풀이 천근이다. 너무나 피로했다. 그래도 머릿속으로는 도둑이 강도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니, 적당히 방어할 만한 무기로 쓸만한게 주변에 뭐가 있지? 라는 생각을 했다.
공기 흐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에서 꿉스럭거리는 거리는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린다. 딱히 가져갈 만한 건 없는데.. 카메라 정도일까… 적당히 가져갈 만한 건 가져가고 조용히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래도 가진 게 이것밖에 없는 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어쩌면 이것도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천근같이 붙어있는 눈꺼풀을 1mm 정도 겨우 떴는데 어두운 한 밤에 1mm의 눈으로는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옆으로 누운 몸으로 보인 나의 왼손과 오른손이 포개져 보였다. 이제 눈을 더 크게 뜨고 조용히 일어나 손에 든 적당한 파이프 같은 걸로 도둑의 뒤통수를 후려치던, 경고를 하던, 쫓아내던 어느 상황으로 흐를질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일어나야 했다.
끝내 눈은 떠지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 나는 그냥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 이것 또한 인과율과 우연한 확률이 겹친 결과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나쁠 일이 있겠나.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내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옆으로 누운 내 등 뒤로 그것이 다가와 옆에 누웠다.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땡겨서 자기 몸 위에 덮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순간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생부였다. 생부는 내 등 뒤에 누워 잠을 자려고 했다. 한밤중에 목이라도 말랐던 것일까. 그 멀리서 들리는 꿉스럭거리는 소리는 뭐였는지 짐작되지 않는다. 몇 분을 그렇게 누워있었을까, 난 누운 몸을 옆으로 돌려 생부를 정면으로 보고, 포옹했다.
눈물 같은 건 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그런 건 전혀 아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멀리서 다시 꿉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꿈을 꿨다.
난 꿈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 잠에서 깨어보니 베개가 젖어있었고, 얼굴도 눈물에 많이 젖어 있었다.
난 이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잠결에 꿉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인기척이 들렸다. 여기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아마 도둑이거나 그런 거겠지. 눈을 떠야 하는데 눈꺼풀이 천근이다. 너무나 피로했다. 그래도 머릿속으로는 도둑이 강도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니, 적당히 방어할 만한 무기로 쓸만한게 주변에 뭐가 있지? 라는 생각을 했다.
공기 흐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에서 꿉스럭거리는 거리는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린다. 딱히 가져갈 만한 건 없는데.. 카메라 정도일까… 적당히 가져갈 만한 건 가져가고 조용히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래도 가진 게 이것밖에 없는 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어쩌면 이것도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천근같이 붙어있는 눈꺼풀을 1mm 정도 겨우 떴는데 어두운 한 밤에 1mm의 눈으로는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옆으로 누운 몸으로 보인 나의 왼손과 오른손이 포개져 보였다. 이제 눈을 더 크게 뜨고 조용히 일어나 손에 든 적당한 파이프 같은 걸로 도둑의 뒤통수를 후려치던, 경고를 하던, 쫓아내던 어느 상황으로 흐를질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일어나야 했다.
끝내 눈은 떠지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 나는 그냥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 이것 또한 인과율과 우연한 확률이 겹친 결과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나쁠 일이 있겠나.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내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옆으로 누운 내 등 뒤로 그것이 다가와 옆에 누웠다.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땡겨서 자기 몸 위에 덮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순간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생부였다. 생부는 내 등 뒤에 누워 잠을 자려고 했다. 한밤중에 목이라도 말랐던 것일까. 그 멀리서 들리는 꿉스럭거리는 소리는 뭐였는지 짐작되지 않는다. 몇 분을 그렇게 누워있었을까, 난 누운 몸을 옆으로 돌려 생부를 정면으로 보고, 포옹했다.
눈물 같은 건 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그런 건 전혀 아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멀리서 다시 꿉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꿈을 꿨다.
난 꿈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꿈에서 깨어, 그리고 잠에서 깨어보니 베개가 젖어있었고, 얼굴도 눈물에 젖어 있었다. 침대에서 한번 일어 서서, 그리고 다시 앉아서 젖어있는 베개를 길게 봤다.
난 이 배갯잎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 진공의 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작업을 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그 방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작업을 먼저 하고, 그 작업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책임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다만 방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도, 이번 전시를 통해 벽에 작은 구멍을 낼 수는 있었다.
설령 그것이 오해였다 하더라도, 혹은 결과적으로 단지 미래로 미끄러져 갈 뿐이었다 하더라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진공의 방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그건 그때 생각해도 괜찮을 일이다.
적어도 오늘은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이었다.

스페이스 S 갤러리
보수동 책방골목 입구
부산 중구 대청로 71, 7층
2026. 06. 12. – 06. 26
수-일 14:00-18:00
월, 화 휴관
별도의 오프닝 행사는 없습니다.
전시 기간 동안 천천히 열어두겠습니다.
편하신 시간에 들러주세요.
—
이전 전시가 평소의 방식에서 조금 벗어난 자리였다면,
이번 전시는 제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와 만든 작업입니다.
조금 더 숨을 두고, 때로는 눈을 감으며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쌓인 시간들을 전시장에 옮겨두었습니다.
작품 문의도 물론, 조용히 환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했다.
30-32인치급
패널 균일도 보상 기능
하드웨어 캘리브레이션
100cd~160cd 범위의 안정적 밝기
장기적으로 믿고 쓸 수 있는 안정성
그 이상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밝기가 1,000cd 라던가, 명암비가 1,000,000:1 이라던가, 픽셀 응답 속도가 4ms 이하 라던가, 해상도가 5K, 6K 라던가, 주사율이 240Hz 라던가, 최신의 Mini LED 라던가, 텐덤 OLED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전부, 나에겐 필요 없는 것들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EIZO 였지만 CS 제품 라인업에는 30~32인치급 제품이 없다. 남은건 CG 계열이지만 현실적으로 접근이 쉽지 않은 가격대라 선택지로 놓기에는 부담이 컸다.
몇 가지 대안을 훑어보다가 ProArt 계열이 눈에 들어왔다.
ASUS의 전문가용 모니터 라인업이었다.
32인치 4K
ProArt 라인업
넓은 색역 지원
내장 전동식 캘리브레이터
하드웨어 캘리브레이션
균일도 보상기능
그리고 EIZO보다 접근성이 좋은 가격
스펙만 놓고 보면 내가 찾던 조건에 꽤 가까워 보여 매력적으로 보였다.
물론 스펙만 보고 결정하진 않기에 리뷰와 측정값을 찾아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눈여겨보던 모델의 깊이 있는 리뷰를 찾기 어려웠다. 내친김에 다른 제조사의 제품들도 이리저리 찾아봤지만 요즘 리뷰 흐름이 유튜브 중심으로 옮겨간지 오래라 심도 있는 리뷰를 찾기 어려워진것 같다.
그래도 내장 전동식 캘리브레이터, 평균 델타 1 이하 공장 교정, 균일도 보상기능까지 들어갔다면 아무리 그래도 기본은 하지 않을까. 그 정도 기대는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물건을 받고 나서, 그 기대는 빠르게 흔들렸다.
처음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균일도 보상 기능이었다.
균일도 보상을 켜면 화면이 더 좋아져야 한다. 적어도 나빠지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모니터는 균일도 보상을 켜자 오히려 화면이 더 이상해졌다. 얼룩이 심해지고, 네 면 가장자리 쪽으로 전체 면적의 상당 부분에서 편차가 육안으로 바로 보였다. 계측기 측정조차 필요 없었다.
지금까지 균일도 보상 기능이 들어간 모니터를 여럿 봐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이건 ‘엄밀하게 보면 조금 아쉽다’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뭔가 설정 같은 걸 빠트렸나?
공장 초기화도 해보고, 설정도 바꿔보고, 여러 가지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러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혹시 균일도 보정을 끈 상태가, 사실은 켜진 상태로 잘못 설정된 게 아닐까. 혹은 패널별로 개별 측정한 보정값을 넣은 것이 아니라, 어떤 공통 보정값을 일괄로 때려 넣은 것 아닌가.
물론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싶었다. 공장에서 델타 1 미만의 개별 캘리브레이션과 감마 보정을 거쳐 나온다는 제품이 그렇게까지 말이 안 되는 일이 있겠어?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다음 문제들을 겪고 나자, 그 ‘설마’라는 말도 힘을 잃었다.
바로 하드웨어 캘리브레이션이었다. 제조사에서 제공하는 전용 프로그램인 ProArt Calibration을 사용했다. 캘리브레이션 자체는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측정이 끝나고, 결과값을 모니터 내부 LUT에 저장하고 프로파일도 생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일련의 절차를 끝낸 뒤 색이 이상해졌다.
원인을 한참 찾던 와중, 서브 모니터의 색이 좀 미묘하게 달라져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macOS의 모니터 프로파일 설정을 확인했다. 컴퓨터에 연결된 ‘모든 모니터’의 프로파일이 sRGB로 바뀌어 있었다.
결국 ProArt Calibration이 만든 프로파일을 직접 ColorSync 폴더에 옮기고, 수동으로 해당 모니터에 연결해야 했다. 서브 모니터의 프로파일도 원래 들어가야 할 것으로 설정을 바꿔주었다.
하드웨어 캘리브레이션 모니터에서 전용 소프트웨어는 그냥 부가 기능이 아니다. 그 장비를 믿고 쓰기 위한 중요 통로다. 그런데 그 통로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Custom 슬롯 관리도 이상했다.
하드웨어 캘리브레이션을 지원하는 대부분의 모니터가 그러하듯, 이 모니터 또한 내부의 Custom 슬롯에 캘리브레이션 LUT를 저장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1번 슬롯에 HDR 캘리브레이션을 저장했다가, 나중에 같은 1번 슬롯에 Display P3로 다시 캘리브레이션하면, 1번 슬롯에는 Display P3 LUT가 있어야 한다.
실제로 Display P3로 캘리브레이션했고, 작동도 확인했다.
그다음 2번 슬롯에는 Adobe RGB를 넣었다.
그런데 순서가 마음에 들지 않아 1번 슬롯에 다시 Adobe RGB를 넣으려고 OSD에서 선택했더니, 갑자기 예전에 넣었던 HDR 모드가 호출됐다.
분명히 Display P3로 다시 저장했던 슬롯에서, 그 이전에 했던 HDR 캘리브레이션이 다시 튀어나온 것이다. 삭제된 파일 복구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이쯤 되면 사용자는 묻게 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모드는 정말 내가 저장한 그 모드인가. 이 슬롯에는 지금 어떤 LUT가 들어 있는가. 방금 저장한 값은 실제로 저장된 것인가. 아니면 UI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이런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치명적이다.
또 다른 부분으로 내장 전동식 캘리브레이터와 외장 캘리브레이터의 매개변수를 동기화하는 기능도 개념적으로는 좋았으나, 실제로는 과정 중에 멈춰버려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혹시 macOS 문제인가 싶어 Windows에서도 시도했다. Windows 10과 Windows 11 클린 설치 환경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연결 방식도 USB-C DP Alt Mode에서 DP 포트와 업스트림 USB 조합으로 바꿔봤다. 그래도 ProArt Calibration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
DisplayWidget Center도 마찬가지였다. 제조사의 안내 페이지를 보면 꽤 편리해 보였다. 일상에서는 오히려 이 프로그램을 더 자주 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반긴 메세지는 DDC/CI 문제가 있다는 알림이 떴다. 권한 설정을 살펴봤지만 문제는 없어 보였다.
같은 환경에서 다른 모니터는 DDC/CI로 밝기 조절도 되고, 1D LUT 하드웨어 캘리브레이션도 잘 되었다. 물론 ProArt 모니터 OSD에 DDC/CI는 켜져 있었다.
그나마 macOS에서는 실행이라도 됐는데 Windows에서는 아예 실행조차 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단순 버그라기보다, 장비를 둘러싼 운용 체계 전체에 대한 의심으로 번진다.
균일도 보상 기능 이상, 캘리브레이션 소프트웨어도 불안, 슬롯 관리도 믿기 어렵고 DDC/CI 통신도, 제조사 유틸리티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도 처음에는 침착하려고 했다.
이 정도로 엉망인 것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펌웨어 업데이트로 해결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데 같은 제조사의 다른 모니터들은 홈페이지에서 펌웨어를 찾을 수 있었지만, 이 제품은 펌웨어 업데이트를 찾을 수 없었다.
발매된 지 대략 1년 가까이 된 제품인데, 이런 문제를 방치한 채 펌웨어 업데이트 없이 놔두었다는 현상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혹시 홈페이지 관리자가 실수로 누락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제조사는 국가별 드라이버나 펌웨어 페이지가 다르게 운영되는 경우도 실제로 종종 있으니까. 그래서 다른 모니터의 펌웨어 페이지 구조를 기준으로 관련 태그를 바꿔 불러보기도 했으나 역시 없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제품 시리얼 넘버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다. 제품 등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에서 시리얼 넘버가 깨져 나왔고, 제품 등록이 불가능했다.
이건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모니터는 패널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펌웨어, 소프트웨어, 보증, 등록, 캘리브레이션 이력, 프로파일 관리까지 하나의 운용 체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본적인 식별 정보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이쯤 되자 마음은 거의 정해졌다. 사실 어지간하면 이 모니터를 쓰려고 했다. 사용자가 지뢰 루트를 피하고, 그 사이 펌웨어 업데이트가 나오면, 말도 안 되는 문제들은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균일도 보정을 켰을 때 오히려 얼룩이 생기는 문제도, 그냥 그 기능을 끄고 쓰면 꽤나 나쁘지 않았다. 패널 자체의 기본기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문제가 겹겹이 쌓인 와중에 이 정도 까지 되어버리니 더 이상 믿기 어려웠다.
결국 반품 접수 후, 수거일도 잡혔다.
그런데 중간에 상황이 한 번 더 꼬였다.
이틀 동안 위의 모든 문제를 겪고 포기한 뒤, 반품 접수 다음날 다시 Windows 컴퓨터에서 문제의 그 프로그램들이 작동했다.
어제까지 안 되던 것이 오늘 갑자기 된다. 원인은 모른다. 실패 조건도 모른다. 성공 조건도 모른다. 이건 안심이 아니라 더 큰 불안이었다.
원인을 모르는 간헐적 정상화는 전문 작업 장비에서 안정성이 아니다. 어제 안 됐던 원인도 모르고, 오늘 된 원인도 모른다. 다음에 다시 안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 작동한다고 해서 장비가 정상이라는 뜻이 될 수 없다. 그 와중에 굳건히 일관성을 유지한 것도 있었다. 시리얼 넘버는 여전히 정상 표시되지 않았고, 내장 전동식 캘리브레이터와 외장 캘리브레이터 사이의 매개변수 전달도 안 되었다.
짜증이 배어나왔다.
물건에 문제가 있으면 반품하면 된다. 절차상으로는 그게 전부다. 하지만 그럼에도 질척거릴 정도로 짜증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작업 기준으로 삼을 장비를 찾고 있었고 판단과 결정을 하기 위한 환경에 대해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오롯이 집중한 시간을 사고 싶었다. 그런데 이 모니터는 계속 나에게 장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 경험 이후 자연스럽게 NEC PA가 떠올랐다. 하지만 NEC PA 라인업은 더 이상 없다. Dell은 애매하고, LG는 내 기준에서는 장기 기준기라기보다 임시 장비에 가깝다. BenQ SW의 32인치 라인업은 너무 오래되었고, BenQ의 하드웨어 캘리브레이션 소프트웨어가 아직까지도 macOS에서 Intel 바이너리만 지원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EIZO와 NEC를 둘 다 사용했던 경험으로, 둘 다 단순히 패널이 좋은 모니터가 아니라 색을 판단하고 결정하기 위한 시스템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 비슷한 스펙이면 EIZO보다 NEC의 가격이 더 접근성이 좋은 가격인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제품의 품질과 기능 신뢰성은 매우 좋았다.
NEC의 SpectraView 캘리브레이션 구조, MultiProfiler, 내부 LUT, 색공간 에뮬레이션, 유니포미티 보정 강도 조절, 전원 켜고 3분 만에 목표 휘도까지 자동보정하는 기능 등 나열하면 길지만, 핵심은 기능의 수가 아니었다.
그 기능들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작업자가 장비를 믿고 쓸 수 있게 하고, 캘리브레이션과 색공간 에뮬레이션의 논리와 작동이 명확히 분리되어 워크플로우에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소프트웨어가 장비의 부속물이 아니라 장비 철학의 일부로 작동한다.
NEC PA는 좋은 모니터라기보다, 작업을 거듭하며 수많은 판단을 받쳐주는 하나의 체계였다. 그런 NEC Display가 Sharp로 넘어간 뒤, 모니터계의 근본인 MultiSync 브랜드의 최상위 컬러 크리티컬 라인업인 PA 시리즈가 사실상 사라졌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NEC PA가 겨냥했던 시장은 전체 모니터 시장에서는 매우 작은 전문 니치 시장이었다. 고객 수는 작고, 개별 판매가는 높고, 요구 품질은 매우 높고, 지원 비용도 높았을 것이다.
소프트웨어 유지보수, 패널 선별, 공장 보정, 보증, 장기 지원까지 생각하면 운영 부담도 컸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런 제품을 사는 사람은 2~3년마다 바꾸지 않는다. 7년, 10년씩 쓴다. 좋은 제품을 만들수록 오래 쓰이고, 오래 쓰일수록 반복 매출이 줄어든다.
그게 시장의 역설이다.
제품은 훌륭했지만, 시장 구조가 그 훌륭함을 유지할 만큼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EIZO가 살아남은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고 느꼈다.
EIZO는 일반 모니터 회사라기보다, 의료, 관제, 산업, 보안, 크리에이티브 분야를 겨냥하는 고신뢰 디스플레이 회사에 가깝다. RadiForce, CuratOR, DuraVision, ColorEdge가 모두 같은 논리 안에 있다.
‘우리는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장소의 화면을 만든다.’
NEC PA도 품질은 훌륭했지만, Sharp/NEC Display 통합 후 회사 전체의 중심이 컬러 크리티컬 데스크톱 모니터에 남아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EIZO는 ColorEdge가 회사 정체성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었고 이것은 고신뢰도로 브랜드를 더욱 강화했다.
NEC PA는 훌륭한 제품군이었지만 회사 전략 안에서 보호받지 못했고, EIZO ColorEdge는 EIZO라는 회사의 정체성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성능, 품질, 신뢰성, 가격, 철학적 접근이 경쟁사보다 좋아도 제품은 사라진다. 이런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다.
품질이 더 좋은 제품이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철학이 더 깊은 제품이 반드시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가격 대비 가치가 더 좋아도 사라질 수 있다.
좋은 제품이 반드시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는 이런 일이 반복된다.
진짜 필요한 사람은 적다.
그 사람들은 오래 쓴다.
오래 쓰면 교체 수요가 느리다.
기능이 깊을수록 설명이 어렵다.
설명이 어려우면 마케팅에서 불리하다.
지원 비용은 높다.
시장은 깊이보다 회전율을 선호한다.
경영진은 기술적 완성도보다 반복 매출, 자본 효율을 본다.
이런 구조에서 NEC PA 같은 제품은 불리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좋은 제품의 가치는 때론 써본 사람만 알게 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스펙표에는 넓은 색역, Delta E, HDR, USB-C, 공장 캘리브레이션, 하드웨어 캘리브레이션 같은 문구가 적힌다. 하지만 그 문구들이 실제 작업에서 신뢰 가능한 체계로 묶이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전문 장비가 주는 신뢰는 스펙표에 드러나기 힘든 부분이다. 이런 신뢰성은 사용 중에 드러난다. 그래서 작업자가 장비를 의심하는 피곤한 일 없이,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진짜 차이다.
이런 건 직접 써보기 전엔 잘 안 보인다. 시장도 잘 측정하지 못한다.
요즘엔 리뷰도 영상 형식으로 넘어가면서 잘 다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얕은 스펙 경쟁이, 깊은 제품 철학을 밀어낸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이 살짝 냉소적으로 된다. 새 제품을 봐도 설레기보다 먼저 의심하게 된다. 리뷰를 봐도 ‘그래서 제대로 측정은 했고?’ 부터 묻게 된다. 제조사 설명을 봐도 ‘이 문구가 실제로 뭘 의미하지?’ 하고 파고들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조사 설명 자체가 의도적으로 애매한 경우도 있다.
‘제대로 만든 물건’ 감소에 대한 감각.
이번 ProArt 경험에서 실망한 지점도 사실 이 부분이었다.
ProArt는 스펙상으로는 전문가용 모니터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운용에서는 그 언어를 끝까지 책임지는 느낌이 너무나 약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결합은 느슨했고,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 추적은 어려웠다.
NEC PA는 시스템을 만든 느낌이었다.
ProArt는 스펙 좋은 모니터에 전문가용 기능을 끼얹은 느낌이었다.
둘 다 ‘Pro’라는 말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의미는 달랐다.
NEC의 Pro는 반복성, 예측 가능성, 장기 운용성에 가까웠다.
ProArt의 Pro는 스펙, 기능 목록, 브랜드 포지션에 가까워 보인다.
이 차이는 아주 사소한 곳에서도 드러난다.
모니터 베젤과 로고에서 이런 부분을 볼 수 있다.
컬러 크리티컬 모니터의 전면부는 그냥 외관이 아니다. 판단 환경의 일부다.
모니터 앞에 앉았을 때 보는 것은 화면 이미지뿐이 아니다. 화면을 둘러싼 베젤, 하단 로고, 버튼 표식, 표면 반사, 화면과 베젤 사이의 경계, 전원 LED, 주변 시야까지 모두 함께 들어온다.
좋은 장비는 이 모든 요소가 조용해야 한다.
중립적이어야 하며, 로고가 튀지 않아야 한다. 하단부가 시선을 끌지 않아야 하며, 제품이 아니라 작업할 이미지가 주인공이어야 한다. NEC PA는 이 점에서 명확하다.
NEC 로고는 왼쪽 상단 구석, MultiSync 제품명은 오른쪽 상단에 배치하고 작고, 얌전한 무광 그레이로 차분하게 안착해 있었다. 사용자의 시선을 훔치지 않고 거의 사라지는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MultiSync라는 유구한 이름을 가지고도 NEC는 그것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건 겸손이라기보다 정확한 이해였다.
이 장비의 주인공은 브랜드가 아니며, 사용하는 사람이 보는 화면 안의 이미지다.
반면 ProArt의 이 모델은 전면 하단 중앙에 큼지막한 회사 로고가 광택 입체 금색 양각으로 로고가 박혀 있다. 사실 처음 봤을 때 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이 조합은 컬러 크리티컬 장비에서는 도움 될 일은 전혀 없다.
프린트 작업에서는 흰 여백, 회색 톤, 암부, 미묘한 색온도, 중립성 판단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바로 아래에 금색 광택 로고가 있으면, 그것 자체가 불필요한 색 자극이 된다.
따라서 컬러 크리티컬 모니터의 전면부는 광고판이 아니라 판단 환경의 일부다. 물론 ProArt의 금색 로고 하나만 보고 제품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중에 겪은 일들과 겹쳐놓고 보면, 그 로고는 이상하게 정직했다.
전면 중앙의 금색 로고, 유니포미티 보정의 이상한 동작, 불안정한 캘리브레이션 소프트웨어, 원인 모를 간헐적 정상화, 시리얼 미표시. 전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장비는 진짜 판단 및 결정 도구로 끝까지 정렬된 물건이 아닐 수 있다.
물론 제조사가 의도적으로 속였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선 오히려 더 피곤한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정말 이것을 ProArt라고 믿고 팔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가 모니터에 요구하는 Pro의 의미와, 그들이 제품화한 Pro의 의미가 달랐다.
내게 Pro는 조용함과 반복성이며 예측 가능성이다. 또한 시각적 중립성과 장기 안정성이며, 최종적으로는 해당 카테고리의 모니터를 주로 사용할 작업자에 대한 이해다.
ProArt에서 내가 본 Pro는 스펙, 기능, 브랜드, 디자인, 마케팅 언어, 크리에이터 시장 포지션에 가까웠다. 둘 다 Pro라는 말을 쓰더라도,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번 경험은 단순히 이러한 장비와 만났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NEC PA 같은 장비가 왜 좋았었는지, EIZO가 왜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가 정리 되었다. 여기에 더해 리뷰 시장이 실제 운용 신뢰성을 얼마나 깊게 다루지 못하는지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장비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만들었다.
내가 원한 것은 단순했다.
화면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 반복 가능한 기준 환경.
작업자가 자신의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조용한 장비.
그런 장비는 드물다.
그리고 점점 더 드물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과거가 전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예전에도 엉성한 물건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물건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절의 감각은 분명히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NEC PA가 그리운 것은 단순한 추억 미화가 아니다. 사소한 것들까지 작업자를 방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었으며 장기 운용성까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런 장비가 사라졌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더 비싸거나, 덜 믿음직하거나, 임시방편에 가까운 선택지들이다.
그래서 짜증이 났고 조금은 허허로웠다.
제대로 된 물건은 자신이 무엇을 팔고 있는지 안다.
컬러 크리티컬 모니터가 파는 것은 패널도, 스펙도, 브랜드도 아니다.
작업자가 화면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리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내 앞에 놓여진 대상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함이다.
결국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NEC라는 브랜드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팔고 있는지 아는 제품이다.
스펙표의 문구가 아니라, 사용자가 무엇을 하는지 이해한 물건. 자기 존재 과시보다 사용자의 작업 뒤로 조용히 물러날 줄 아는 장비. 문제가 생겼을 때 미로에 빠뜨리지 않는 시스템.
좋은 전문 장비는 사용자의 시야에서 사라질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남겨야 할 유일한 것은, 신뢰다.
달이 이뻤다.
달에 드리운 뿌연 안개가 지상의 것이 아니라 우주의 것 같았다.
선연하고 창백하고 너무나 밝았다.
사람 홀리는 달이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야하다는 느낌도 들고 동시에 처연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입에서 조용히 욕이 나왔다.
씨발 이러니까 사람이 홀리지.
그리고 말 없이 몇 촌가를 계속 고개를 꺾어 봤다.
무척, 슬펐다.
이렇게 조용한 가운데 어깨의 카메라가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조용히 억누르고 그냥 조금 더 봤다.
꼭, 그러고 싶었다.
길에서 돌아오는 동안에도 계속 그 달이 떠나지 않는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꾹 눌러 담았다. 단 한 방울도 허투루 다루고 싶지 않았다.
달이 이뻤다.
도착해서 담배를 한 대 피우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비명을 지르던 카메라는 침묵과 함께 썩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멀겋게 보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안타깝고 안타까워 도무지 이 마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버거웠다. 단순한 돌 덩어리 하나 찍지 못했다고 큰일 날 일 같은 건 있지 않다. 있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나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학교 다닐 때 동아리를 하나 만들었는데, 지금도 이어지는진 모르겠지만 당시 제일 하고 싶은 말을 캐치프레이즈로 만들었다. 단순하다.
‘사진에게 자유를’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든다.
사진에게 자유를, 이전에 나는 언제 사진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우문이다.
세상이 어지럽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심각하고 치명적이며 지속 가능성의 근본 자체를 위협하는 수많은 문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우리를 보고 있다. 그 속에 수많은 사람이, 이유를 알아도 이유를 몰라도 시체의 산이 쌓아 올려지고 있거나, 미래의 시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정서적으로 인지 교류할 수 있는 범위와 거리와 깊이는 매우 한정적이다. 그래서, 어쩌면 덕분에 우리는 별일 없이 살아간다. 오늘 하루에 있었던 시덥잖은 일들과, 그 시덥잖음 속에 깊이 상처를 받기도 하는, 때로는 시덥잖음에 깊은 위로를 받으며 하루를 살아내어 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개인의 깊은 고통도 타인에게 온전히 왜곡 없이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 자기 자신의 고통을 아는 것 조차 힘들다.
나는 힘없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 영상을 건조하게 보다가, 왜 전조 없이 콧물과 눈물이 났는가? 특정 포인트에서는 비린내가 느껴질 정도로 직설적인 순진함을 가장한, 철저히 정밀하게 조율된 장면도 있다. 게다가 광적인 기술적 집착으로 완성된 장면들은, 단순 서사도 고도로 정제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에 대한 모범에 가깝다. 나는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뻔하디 뻔한 것에 마음이 흔들릴 일인가. 몇 분간 생각했다. 사실 생각이라기보다는,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 옆으로 돌린 고개를 천천히 다시 돌리는 에너지를 소모했다.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기미가 보이는 순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애쓴 것도 왜인지 알고 있었다.
건조한 냉소로 가장한 체념을 재차 생생하게 인지한다는 것은 꽤나 아픈 일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되었건, 지금과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 바람, 욕심, 상상, 예측, 예상, 환상, 믿음, 착각, 집착, 맹목 등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 반대로 저런 것들 중에 어느 비슷한 것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비록 그 생존의 모습은 달라도 적어도 살아는 있다고 볼 수 있다. 살아 있음을 견딜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미래로 한 움큼씩 걸어가진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미끄러져서라도 가고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한. 설령 그것이 매우 순진한 낙관론이라 할지라도 무언가를 태어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냉소가 아닌 낙관이었다.
혹은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
오래전 컬러로 촬영했던 필름을 정리할 일이 생겼다.
라이트 테이블에 불을 올리고, 필름 스트립 전체를 빠르게 훑는다.
때론 정리의 목적과는 관계없는 것을 루빼로 찬찬히 보기도 한다.
며칠 동안 이것을 반복하던 중, 문득 컬러로 촬영했던 필름을 정리하게 했던 이유가 바스러지듯 힘을 잃어간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사진이라는 형식미는 잔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