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귀가 잘 안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크게 집중하지 않고도 18.5kHz 부근까진 어렵지 않게 들렸고 청취 환경이 좋을 때는 19kHz 근방까지도 무리 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먹먹한 느낌과는 다르고 그렇다고 높은 주파수대의 소리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닌, 16~17kHz 근방 부터 정말이지 이상하고 기묘하게 잘 들리지 않는 대역이 생겼다. 아… 그렇군.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건가. 한편으로는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앰프나 스피커가 금빛 페로몬을 풍긴다 한들, 비자발적으로 오디오를 바위 보는 듯한 삶이 되어버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리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빈티지 앰프나 스피커에서 나오는 몽글거리는 소리로 만족한다던가 아니면 엄청난 댐핑 팩터에서 나오는 돌덩어리 같은 단단한 저역이 직접 가격하여 내장이 움틀 거리는 식의 음악을 듣는다던가 하는 정도일테지.
2.3초와 4.7초의 무한한 침묵 속에 펼쳐진 끝 모를 암흑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도사리고 있는 고요함의 자리에서 가만히 눈을 감은 체 암흑을 깊이 응시하는 그런 경험은 이제 나에겐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래… 이젠 이런 것에 어리광 부릴 시기는 지나버린 건지도 모른다. 삼십 년 넘게 신세진 푸가의 기법 제1콘트라푼투스도 평균율 클라비어도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무반주 첼로도 정말 몇 안 되는 유일한 안식처였기에, 그 안에서 침잠된 찰흙 덩어리를 보는 응석을 부렸지만 조금은 건조하게 들어도 큰일 날 일 같은 건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갈려 나간 끝에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진다. 경계 없는 우주 조차도 엔트로피의 증가로 종국엔 열평형 상태가 될 것이다. 단지 그뿐이다.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지만 그럼에도 얼마간 마음이 울렁거렸다. 1년 전 이사한 낮의 작업실은 외부의 자동차 궤적 소리가 항상 귀를 시끄럽게 하기에 어차피 제대로 음악을 듣지 못했다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적당히 마음을 땜질했다.
어느 새벽, 물을 가르는 궤적 소리조차 없이 온 세계가 물 속에 잠긴 듯한 고요함에 음악을 듣고 있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의자에 일어나 이동하던 중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17kHz 대역 근처에서 분명하게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오래도록 몇백 번이고 들었던 음악이다 보니 너무 조용한 탓에 뇌가 착각 해서 환청을 들었거나 뭔가 그런 종류의 것일 테지. 단순한 기분 탓일 터다. 물을 마시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역시 예전과 같은 느낌으로 소리가 섞여 잘 들리지 않는 익숙한 상태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났다. 언제부턴가 음악을 잘 듣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낮에 들리는 대로변의 자동차 소리는 내 신경을 마구 긁고 있었다. 세상 모든 자동차가 전기나 수소차로 바뀌면 좀 조용해질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바퀴 구르는 소리는 날 것이며 애초 인간이 모여 있는데 조용할 리 없다. 귀는 맛이 갔는데 소음은 어째서 더 크게 들리는가. 휴일 새벽 시간만이 유일하게 마음을 뉘일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점점 음악은 듣지 않게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몇 달이 지났다. 우연히 앰프에 전원 끄는 것을 깜빡했었는지 앰프에 들어온 전원 LED가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침 새벽이었다. 간만에 음악을 틀어보자 싶어 셔플로 적당히 아무거나 틀었다. 담배가 다 떨어져 편의점에 가려고 몸을 움직이던 중 역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스피커 트위터에 귀의 높이를 맞췄더니 소리가 들린다. 반대쪽 스피커에도 똑같이 했더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앰프가 맛이 갔나? LR 케이블을 반대로 물려봤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스피커 쪽이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스피커 네트워크는 어지간해선 망가지진 않지만 모를 일이다. 일단 여기서 멈추고 엷고 긴 한숨을 쉬었다. 담배를 사러 편의점엘 갔다. 작업실 아래 인도에 있는 새벽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너덧 대 정도 피웠다. 파란색으로 가득 찬 곳을 벗어나 물을 마시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스피커는 그대로다. 음악도 듣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좀체로 회복될 기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나를 홀려버리게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꾸준히 긴 시간을 끈질기게 공들여 마침에 홀려 저버린 사람처럼 스피커를 뜯었다. 유닛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좌우 유닛을 스왑 하던 과정 중에 압착 스플라이서의 고정 부위가 부러진 것을 발견했다. 어쩐지 너무 쉽게 빠진다 싶었다. 접촉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테니 소리가 나지 않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스피커 유닛을 테스트 했는데 처음엔 소리가 나는 듯 했으나 나의 착각이었다.
국제 시장에 나가 부품 파는 곳 다섯 곳을 거쳐 겨우 압착 스플라이서를 샀다. 기껏해야 예비용까지 해서 3~4개면 되지만 그렇게 소량으로 파는 곳은 없다. 죽을 때까지 써도 전혀 줄어들 것 같지 않은 갯수의 스플라이서를 샀다. 갑자기 무척 피곤해졌다. 다시 하루가 지난 뒤 케이블 피복을 벗기고 압착 스플라이서를 달아주고 스피커 유닛에 결합했다. 스왑을 한 유닛에서 제대로 소리가 난다. 다행스럽게도 네트웍이 망가졌다던가 케이블의 문제는 아니었다. 유닛을 다시 고정하고 스피커를 조립했다.
새로운 유닛을 주문했다. 형식번호가 같은 유닛이 중국에서 팔고 있어서 아주 잠깐 생각했지만, 제조사에 연락해서 정품 유닛을 주문했다. 며칠 후 도착한 유닛을 스피커에 다시 달아주고 테스트를 했더니 볼륨을 조금 올리니까 19.3kHz까진 들린다. 스피커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나의 귀도 다시 살아났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망가지거나 부서진 부분을 뜯어내고 교체하거나 고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내가 왜 스피커를 갑자기 고치고 싶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금전적, 시간적 이익 그리고 효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때론 망가진 것을 그저 무턱대고 고치려고 애쓰는지 알게 되었다. 망가진 물건을 고치는 영상들을 간혹 왜 그리 멍하게 보고 있었는지도 알게 된 것이다.
Pair 짝, Re 다시. RePair 다시 짝을 맞추는 일. 다시 짝을 맞춘다는 말이 가능하려면 같이 있었던 짝과 단락 되거나 망가졌다는 것이 전제된다. 다시 연결하는 것, 서로가 통하도록 하는 것.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
첫 테스트 음악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DNA 를 틀었다. 일반적으론 숨이 꾹꾹 막히는 적막함을 일으킨다 한다면 확실히 인지 할 수 있게 혹은 친절하게, 노골적으로 잔향 배경음과 노이즈를 제거할 법 하지만 음질, 음색 그리고 구성미에 있어 세상 까다로운 이 예술가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15.3 kHz~16.1kHz 대역에 굳이 노이즈를 넣었다. 이것은 마치 무척 얇아서 투명한 것처럼 잘 보이지 않지만 빛에 비춰보면 거친 선이 보이는 주사바늘을 피부에 찌르는 것도 아닌, 마치 바늘 끝이 레코드 판을 읽어 가는 처럼, 가늘고 선명하게 피부를 쓸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를 톤 변화 없이 일정하게 넣었다. 그리고 16.3 KHz에서 22kHz 영역엔 환경음을 사막의 습기 하나 없는 매우 고운 모래를 다시 한번 갈아서 투명한 면사포를 씌워두듯 얹어두었다. 메인 멜로디와 함께 이렇게 고역 노이즈를 아주 작은 크기의 소리로 굳이 일부러 넣어두어 마음과 목구멍이 소리 없이 구우우욱- 하고 옥죄이며 허파에 남은 산소가 점점 부족해지는 느낌이 드는 소리,가 다시 들리게 되었다.
이것은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나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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