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미터

꽃과 담배를 들고 길에 나섰다. 오늘은 어머니의 기일이다.

지금껏 제대로 이 날을 챙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할 수 있게 되었느냐고 한다면 꼭 그렇진 않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것에 대한 매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닿기 위해 긴 시간과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완성에 가까웠으나, 결과적으로 그 매듭은 사라졌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 했다. 세상 흔한 말인 만큼 그 마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소위 깨달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들이 세상엔 꽤 많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세상이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세상이야 어찌 되었든 적어도 나의 경우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 명하는 형식미에 따라, 적어도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방식은 불가능했다. 힘들고 아프기에 때론 몸을 마음을, 시간을 떼어낸 체 도망치거나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다시 제자리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영원한 형벌처럼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아니면 노을이 진 어느날 골목과 골목 사이로 밥 짓는 냄새가 올라올 때 엄마가 밥 먹으라며 부르는 목소리에 가지고 놀던 공이며 장난감이며 친구들을 내려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상처가 상기시키는 반복적인 알람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며 아물지 못한 채, 마치 환상통처럼 원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사라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엔 마치 있는 것처럼 실감 나게 욱신거리는 기묘한 감각은 나의 의지 따위와는 무관하게,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때론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고통이 들어올 땐 잠시 눈을 돌린다고 하더라도 나의 의지나 희망이나 바람과는 무관히 계속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렇기에 결국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있을까.

작년 가을에 이와 관련한 전시를 하고 책을 만들었다. 그 이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고 그에 따른 나의 정신적 상황과 처신으로 인한 약간의 문제가 생기기도 했는데 그것이 해결되기 보다는 적당히 뭉개진 형태로 틀어막은 것처럼 되었다. 누굴 탓하랴. 그렇게 해를 넘어 기어코 어머니의 기일은 점점 다가왔다.

마음을잡지 못한 체 구정 일주일 전 어머니의 남동생, 나에겐 외삼촌에게 찾아봬도 되겠냐고 연락했다. 외삼촌에 대한 죄의식을 외면하기에 어려웠지만 외삼촌은 거대한 검붉은색의 조용한 바위 같은 사람이다. 적어도 싫다고 할 사람은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다. 구정 하루 전에 보기로 하고, 하루에 버스가 3번 운행하는 곳에 도착했다. 차로 두어 시간 거리지만 여기에 다시 오는 데는 십 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세월이 흘러 외삼촌도 검붉은 커다람의 사이와 사이엔 조금씩 깨져나가고 갈라진 틈새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 사이로 조용히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조금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 자식이 죽은 줄도 모르는 치매 상태인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인지능력 상실 상태의 외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외할머니의 꼬깃꼬깃 접힌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문득 맥락 없는 작고 따뜻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외삼촌은 나에게 밥을 먹이고 싶어 했다. 그것이 어떤 마음에서인지 모르지 않았다. 밥을 먹고 아무짝에 쓸모없는 이야기들과 외삼촌의 그간 신변에 관한 일들, 외할머니의 일들, 시골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그리고 누나의 관한 이야기들, 외삼촌이 나에게 했던 말 중 경찰과 법원에 드나들던 당시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말했던 이유에 관한 말들, 누나가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을 줄은 몰랐었다는 말들, 그리고 이런 아픔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어서 누나도 기뻐하셨을 거라는 말들.

나는 외갓집에서 잠시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 주변을 돌아보니 딱히 바뀐 건 없었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었다. 하지만 외삼촌이 나를 조금 용서해 주셨다는 것은, 나를 조금은 받아들여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갓집에 가는 결심을 하는 것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나의 용기에 비하면 외삼촌의 용서의 크기는 감히 헤아리기 힘들었다. 곧 기일이 온다는 말을 했다. 어디에 뿌렸냐고 하시기에 차근차근 알려드렸다. 뿌린 장소를 주의를 기울여 귀에 담아두셨다. 그리고 나는 기일에 꽃과 담배를 챙겨 갈까 합니다. 라고 했다.

버스 막차 시간이 되어 인사를 나누고 작업실에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인가 지나고 꽃과 담배를 주섬주섬 챙겨 배회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한 밤의 길 위에 나섰다.
나와 바다와의 2차원 직교 좌표계의 차이는 8미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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