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예비군 2박 3일을 다녀왔다. 하필 말년차에 동원지정인원으로 되어서 툴툴거리며 짜증을 냈지만, 한편으론 차라리 마지막 년차에 걸려서 다행이다 싶다. 보통 한번 지정된 후엔 잘 안바뀌기 때문인데 지금까지 안걸렸던 것을 상대적으로 고마워 하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체 군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더부룩한 수염다발과 긴 머리칼을 날리며 새벽 바람을 맞으며 사십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철을 타보니 사람이 그다지 없다. 내가 찻간에 들어서는 순간 일제히 (정말 일제히) 나를 봤다. 군복은 군복인데 머리길고 수염난 군인이니 일반적인 예비군이라고 하더라도 특이하게 보였는가 싶다. 아무런 동요없이 자리에 앉아 CDP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꾸벅 꾸벅 졸았다. 중간에 몇가지 성가신 일들이 있었지만 실력좋은 택시 아저씨 덕에 잘 도착 할 수 있었다.
훈련이 시작되었다.
중간 중간에 비는 시간을 타면서 들고간 책 두권중 하나를 읽었다.
사이즈는 내 손바닥만한 정도보다 약간 큰 크기의 문고본이라고 하기엔 비교적 큰 크기지만 다행스럽게도 군복바지의 건빵주머니엔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는 크기다. 이럴땐 군복도 쓸만할때가 있다.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시간이 빌때마다 짬짬히 읽어나갔다.
오랫만에 읽는 위대한 게츠비는 예-전에 읽었을때와는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정말 이런 소설이었던가?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가? 이렇게 무미스러운 끈적거림과 전혀 디테일하게 보이지 않는 번뜩이는 디테일들, 읽다보면 천천히 숨이 가파오는 답답함. 결국 전체 스토리를 따져보면 아무것도 아닐, 비교적 소설치곤 내용이 전혀 파격적이지 못한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그 쓴맛이라는 건 마치 한쪽도 맞추지 못한 큐빅퍼즐을 입속에 쳐박아놓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모조리 싹 읽어치우고 기분도 전환하고 머리도 식힐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리포트 (원제 : Design, Writing, Research)을 읽어치워 나갔다. 지금은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고들 하는 후기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 입문용 디자인(을 위장한 철학서에 가까운) 책이다. 쭈욱 읽어치우면서 마음과 몸이 안정이 되는듯한 기분이다. 이 책은 크리스마스 선물 비슷하게 받은 책이었는데 쓱싹 계속 읽어치우다가, 순간 속이 울컥하여 책을 집어던졌다.
2박 3일동안 내가 기억나는 일은 그게 전부다.
지리하게 긴 휴가 – 혹은 동원훈련 을 마치고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참을 수 없이 듣고 싶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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