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8

어느날, 익숙치 않은 거리를 계속 걷다가 무엇인가를 보았다.
십년 넘게 사용한 AF 50mm 렌즈를 마운트 한체 망연히 보고 있었다.
그것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무색, 무취의 광경이였다.

순간 그 렌즈를 빼버리고 Nikkor 45mm f2.8/P 렌즈를 마운트 했다. 스스로 느끼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의 일이다. 익숙하니까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도 쉽게 인식 되지 않는다.

포커스를 신속히 가져다 놓은 후, 반숨을 쉬고 조리개를 f5,6로 조였다.
어떤 무상함에 쓸려가버리듯 그렇게 몸이 기능하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던 그 광경을 파인더로 한창을 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조차 느끼기 힘들었고 단지 무상함을 맞댄체 그 속에서 나를 가만히 녹여내는 것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이윽고 갑자기 잊었던 것이 번쩍 생각이라도 난듯,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일종의 반항심이였을까. 조리개를 한단 더 조였고 정보 표시창엔 f8이라고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무척이나 날카롭게 나올 것이라는 것을 난 알 수 있었다. 셔터 따위 누르지 않아도 알 수 있는거다. 호흡을 멈추고 눈이 아릿해짐을 느낄때 누르는 감촉도 느낄 수 없을만큼이나 부드럽게 셔터를 눌렀다.

한숨을 쉬고, 문득 렌즈를 봤다. 검은색의 작은 그 렌즈는 웃지도 울지도 비웃지도 슬퍼하지도 않았고 단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였다. 담배 한대 물고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의 격렬함이 아직 몸에 남아있었다. 다시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내쉬기를 몇번이고 반복하자 겨우 그 진동 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옛날과 한가지 달라진건 어쩌면 칼을 휘두르는게 좀더 세련되어진것 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 뿐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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