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적으로 자신의 주장만을 하는, 즉 잘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어렸적 성장기에 애정을 거의 받지 못했거나 혹은 너무 받았거나. 아니면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강한 트라우마가 있거나.
이들 중에 절반 정도는 목소리가 크다.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이해하라고 강요하거나 혹은 이해 받길 원하지만, 정작 자신은 상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더 실로 이해하기 위해 몇가지 질문을 하면 오히려 화를 내곤한다. 이것은 아무리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한다고 한들 그들에겐 진심의 무게 따위 전혀 중요하지 않은듯 보인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조급하게 만드는 것일까.
왜 그런지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단정내리고 싶지 않다. 인간의 다양함은 실로 광범위 하지만 그 근본에 있는 것은 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고 난 느끼고 생각한다. 그런식으로 어설프게나마 따져간다면 결국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곤 한다.
단지 성장기때 받은 애정의 함량과 트라우마와 환경에 의해서 이러한 것들이 결정되어 버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슬픈 일이다. 그리고 삶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것에 강요를 받고 결국 굴종하게 되어버리는 것이 보통 우리네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정상일 것이다.
정상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그것이 옮다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것, 혹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게 하는것 그리고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과 권력에 의해 결정 되어진다. 또한 누구라도 그것에서 부터 자유로울순 없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사람들과 정상인 사람들이 부딪기며 살아가다 보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정상인은 배척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조선땅에선 더더욱 그러한 듯 싶다.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자신과 다름을 견디지 못하고 참질 못하고 듣질 못하고 자신과의 다름을 불쾌해 한다. 그리고 자신의 나와바리에 들어오고 동의하면 불쾌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수 많은 나와바리가 존재하고 그것들은 언제나 그렇듯 또 충돌하고 피를 부르기 나름이다. 굳이 종교 이야기를 꺼낼것 까지도 없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기실 세삼스러울 것도 없을 정도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쓰고 싶은 비유가 있다.
눈도 귀도 콧구멍도 둘이다
입은 하나다.
어쩌면 성장기때 그리고 하루 하루 삶을 살아가면서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입과 뇌가 퇴화되어버린건 아닐까 라는 생각 마져도 든다. 그런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들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덴 전혀 라고 해도 좋을만큼 지장따위 없으니 말이다.
오늘 나의 인내심을 시험받았다.
결과는 그리 좋지 못한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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