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풍경.

십년 넘게 지낸 작업실을 뒤로 하고 새로운 작업실로 옮겨 온지 반년이 되었다.

새로운 작업실을 계약한 이후, 제일 먼저 한 것은 물건을 버리는 것이였다. 절반은 버린다고 마음속에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그렇게 버리고 버리고 버려도 결국 1/3 밖에 버릴 수 없었다. 하나씩 하나씩 많은 것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나는 많은 것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나 스스로는 대단히 독하게 마음 먹었다고 생각 했었는데도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별 의미라던가 소중한 기억의 깊이가 얇은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 있다.

반대로 제법 가치가 있던것들인데도 누군가에게 그냥 준다던가 버린다던가 하는 것들도 많았다. 특히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버렸던것들은 책들이 아니였나 한다. 사실 난 책을 구입해서 보는 편이 아니다. 보통 도서관에서 읽거나 빌려 읽거나 혹은 서점에서 읽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콘텐츠 소비에 있어서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랑비 처럼 조금씩 쌓여가는 책들 중엔 제법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들도 있었지만 희안하게도 그런건 버려진다. 어쩌면 소위 서재에 대한 로망이 전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와 동시에 많은 분들의 호의와 도움을 빌어 바닥을 새로 깔고 벽을 중성 회색으로 다시 칠하고 전기 배선과 물의 입출수 배관을 하고 벽을 뚫어 문을 만들고 벽을 새로 새워 암실 공간을 만들었다. 문장으로 쓰니까 참 심플하고 아담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 각각의 과정들 속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고생이 함께 있었다. 벽을 전부 칠하고 바닥을 손수 한장씩 한장씩 다 깔아내고 마지막 한장을 마무리 할때의 기쁨도 나쁘지 않았다.

암실과 대형 프린터 때문에 이사를 두번하는 식으로 되었다. 물론 비용도 두배가 들었다. 공사의 순서와도 관련이 있었기에 도무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암실만 없었다면 훨씬 더 편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게 한두번이 아니였다. 십여년전 처음 작업실을 만들때 나의 모습을 회상해본다면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생각이였을 것이다. 당시엔 암실이 있는 내 작업실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나 생애 소원의 절반을 이룬것만 같은 소금끼 가득한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하고 희안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현재 디지털 프린트의 수준이 암실의 프린트를 재현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는 것을 매일 느끼고 있기 때문일테고, 오히려 대형 작업에 있어선 유리한 점이 훨씬 더 많다는 것 역시 매일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암실 작업은 나에게 있어서 고향 같은 곳이고 처음으로 네발로 기어갔던 곳이며 그곳에서 나는 걸음마를 배웠고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눈동자를 얻을 수 있었고 냄새를 맞을 수 있게 되었으며 들을 수 있게 해준 곳이다. 단순히 효용 가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암실만 없었다면 훨씬 더 편했을텐데, 라는 감각이 나에겐 매우 기묘하게 와 닿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논리적으로 설명 할 수 없는건 아니다. 그러나 논리로는 부족하다. 제법 시간이 흘러 작업실의 최소한의 모양이 잡히게 되고 완성된 암실에 들어서는데 대단한 위화감을 느꼈다. 예전 작업실과 배치는 거의 동일하다. 매우 사소한 부분만 다를 뿐. 그럼에도 몸에 커다란 뱀이 휘감는듯한 불쾌한 위화감은 나를 암실에서 다시 나오게 했다. 분명 내가 설계하고 만든 암실이였음에도 너무나 다르게 와닿는 기분은 이루 불쾌하기 그지 없었다. 모든 것들이 불편하고 어색하다. 손끝 하나 차이로 혀안에서 헛도는 미끌한 느낌과 비슷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암실에 들어가기가 싫어졌고 압도적으로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필름은 하염없이 쌓여가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만큼 필름이 쌓여있었다. 어림잡아 현상해야 할 필름이 100롤은 넘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기에, 납덩이를 종아리에 달고 걷는 느낌으로 끌려가듯 들어가서 한차례 현상을 마치고 나니 너무나도 지쳐있었고 불쾌감은 더욱 커져갔다. 하지만 앞으로 현상해야 할 필름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은것 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첫번째 현상 이후로 두어달은 암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상해야 할 필름의 압박으로 떠밀려가듯 현상을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쯤 되면 피하기 보다는 원인 파악을 해야 할텐데 곰곰히 생각해봐도 원인을 쉽게 알기가 어려웠다. 또 몇주일이 지나고 세번째 현상을 끝내면서 원인을 알게 되었는데, 십여년 넘게 있었던 예전 암실의 작업 습관이 적당히 있는데로 작업을 한것이 아닌, 그 환경 내에서 고도로 최적화된 습관이 뼈속 깊숙히 박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굳이 수치로 따지자면 불과 몇 Cm 의 차이고 한 걸음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의 차이로 미끌거리는 느낌이 들도록 하였던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참으로 적응의 동물이요 간사한 동물이요 섬세하고 민감한 동물이라는 것을 재차 느끼게 되었다. 원인을 알게 된 이상 남은 것은 나의 새로운 암실을 다시 내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환경을 나에 몸에 맞추는 것도 있을것이요 나를 환경에 맞추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미 암실의 설계는 기존과 다른게 거의 없으므로 불과 수 Cm의 차이 보정을 몸으로 해나가면 될 일이다. 이후엔 불쾌한 느낌이 들더라고 그것이 우울감을 만들어내진 않았다. 이러한 것을 두고 기뻐 할 정도 까진 아니지만 나의 것을 다시 찾아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는지 현상을 마치고 나면 5 Cm 정도의 보람감이 들기도 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여기도 오랫동안 지내다 보면 뭔가가 또 태어 나겠지. 그래. 암실은 무엇인가 태어나는 공간이기에.

이 암실을 다시 나의 것으로 되돌려 받는데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여러모로 편해졌고 다시금 나의 암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반년의 시간동안 난 설사를 계속 했다. 수술 이후의 휴유증을 상정해보기도 했으나 이사하기 전엔 빈도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설득력이 없다. 헌데 나의 암실들 되돌려 받은 이후엔 설사가 몰라보게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빈도수가 무척 작아졌다. 우연이겠지.

작업실 내부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갔다. 처음엔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놓여 있어도 불편하고 어딘가 허허로운 기분이 들었다면, 지금은 적당히 정리되어 있고 적당히 어질러진 느낌의 밸런스가 잘 잡혀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 이전 작업실에 비해 프린트 의뢰 손님도 확실히 늘었다. 우연이겠지.

손에 쥔건 딸랑 카메라 하나가 전부였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없는 돈을 쥐어짜서 만든 작업실로 시작해서 그 사이에 정말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 수많은 행복, 슬픔, 외로움, 고통이 그대로 녹아나고 있었고 그리고 그 공간은 나에게 있어서 맞춤복 처럼 딱 들어맞았다. 그 공간이 바로 나인 것 처럼.

이전 작업실의 계약을 마치고 기존 시설물을 철거하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어딘가 가슴이 찡할것이라 예상하였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사람을 불러 철거를 시작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나오던지 바닥을 가득히 메우기가 삽시간이였다. 역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나온 잔해물과 정리하면서 버렸던 물건들이 1톤 트럭을 가득히 채우고도 트럭 운전석 보다 더 위로 솟아나있는 광경을 찍었다. 사십 계단을 다시 올라가고 거기서 다시 작업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고 텅빈 공간에 다시 돌아오니 암실때문에 막혀 있던 창문에서 밝은 햇볕이 암실이 있던 자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것이 한순간 걷잡을 수 없는 폭발적인 감정을 만들어냈다.

다시 사진을 조용히 찍었다.

Prev thumb
Next Polyphony. 26

Comments are closed.

© Wonzu Au / No use without prior permission other than non-commercial use. / 비상업적 용도 이외의 사전 허가없이 사용을 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