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강의를 마치고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중에 모친에게 전화가 왔다. 일생 동안 나의 혈육인 부친과 모친이 나에게 걸었던 전화 중에는 그리 기쁜일이 있었던 기억이 없다. 기억이라는 것은 오묘해서 내 멋대로 그렇게 정의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때론 좋은 기억이 있었을법 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더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핸드폰을 가진 이후, 혈육의 이름이 찍혀 있는 전화를 언제나 받을 수 있게 된 이후로 정말 좋았던 기억 따위 없었다. 혹은 당장 나쁘진 않았으나 언제나 나쁜 일에 대한 예고가 되었다.

그 이름 석자가 핸드폰에 비춰질때마다 언제부턴가 한숨이 나오면서 받을지 말지를 생각하지만 혹여나 어떤 사고 같은게 난건 아닐까, 혹시나 내가 이 전화를 받지 않음으로 인해 뭔가 일이 더 잘못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매번 전화를 강제로 받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제 부터인가 한숨과 동시에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감정을 죽인체 조용하고 담담하게, 심지어 극도의 짜증이 날때 마저도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잔인한 말을 하게 되곤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였다. 세상은 여전하고 역사는 반복되며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한땐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 극복 할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그렇지 않았고 내가 무엇을 시도하고 어떤 노력을 십여년 이상 했다 한들 티끌 하나 바뀌는 일 따위 없었다. 몸이 노쇠해지고 기운이 빠지고 외견이 쭈그러들고 얼굴이 찌그러지고 팔과 다리가 쇠젓가락 마냥 가늘어지고 삶의 고통에 찌들대로 찌들은 육신에서 풍겨오는 노인의 악취가 언뜻 나기 시작했다 한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부친은 얼마전 또 사고를 쳤다. 심지어 그 사고의 패턴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폭언과 폭력을 당하고 거기에 더해서 피해망상 초기 증세가 더해진 모친은 그 사고와 동시에 산더미 같은 절망감에 또 다른 절망에 씌워졌다. 그리고 가스렌지에 불을 지핀 뺀지로 자신의 이빨을 뽑고, 삶의 행복이나 의미, 목표 같은 문장 따위 사치인지 오래다. 저 양반 내가 설겆이 하고 가야 하는데, 라고 자신이 살아서 죽기전 해야할 마지막 남은 일은 사신이 되는 일 이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힘을 잃었다.

육친의 전화를 끊고 난 이후엔 예외 없이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리고 동시에 신문지의 잉크를 졸여놓은 듯한 냄새가 마음에서 올라오기 시작해서 소뇌와 대뇌를 거쳐 코끝으로 진짜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어폰을 다시 귀에 박아두곤 입을 닫은체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들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문을 열고 꺼진 불을 켜고 가방과 카메라를 내려놓고 쌀을 씻고 빨래를 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해서 버리고, 녹색 벽을 잠시간 보고, 담배를 피우고 의자에 앉았더니 기묘하게 몸이 춥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걸어두었던 세탁기에서 빨래가 다 되었다는 삐-ㅂ 뽀 삐-ㅂ 뽀 소리가 건조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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