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죽음으로 부터 4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이라고 표현 하기에도 모자란 그의 면면을 보고 있자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잘못 없는 그리고 죄 없는 인간따위 이 세상에 존재할까. 선과 악 그 자체에 대한 정의는 잠시 미뤄두더라도 대부분의 우리들은 선과 악 그 어느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경우 선에 보다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좋다고 생각 하는 것이 보편적 생각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다소 극단적인 방향의 삶을 살아가는 이도 있다. 그래서 시대에 따른 상식 그리고 법이 있다. 자유롭게 살되 사람이 살아갈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기회에 대한 이해 관계의 상충 속에서, 최소한 이 정도의 테두리는 서로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사회적 약속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그 사람은, 반세기 이상을 살아왔음에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인식은 켜녕 인지 조차 없는 \’악\’ 이라는 부분에 대해 나는 무척 오래된 생각을 정리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악은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인지조차 못하기에 진심으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혹여 옆에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모기가 머리 주변에서 윙윙 거리는 소리 취급한다. 그저 그때만 회피하려 하며 모든 문제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다. 그나마 잘못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심을 쏟은 사죄, 사과 혹은 용서를 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그런 포즈를 취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리할 정도로 상황이 궁지에 몰려있을때 뿐이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에,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모르며, 때문에 주변을 그리고 그 영역에 연결된 사람을 썩게 만들고 귀신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겐 일말의 망설임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 망설임이 있다는 것이 의무교육을 통한 기초 구성원의 안정망을 위한 사회 시스템에서 문화적 세뇌에 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그것이 세뇌였다고 할지라도 필요성과 효용을 생각하면 그것이 틀렸다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세뇌라는 단어가 거칠게 느껴진다면, 시민사회에서 더불어 살기 위한 최소한의 양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때문에 나의 망설임이 싫다거나 하진 않았다. 적어도 감정과 이성을 내 나름 할 수 있는 만큼 분리해서 생각 할 수 있다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면회 요청이 왔기에 나는 다행스럽게 여겨진 망설임을 품에 안고, 어쩌면 약간의 희망 아닌 희망을 가지고 유치장에 갔다. 그리고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그 어느 한점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망설임이 사라졌다.
구치소에 이감되고 나서 두 번이나 면회 요청이 왔지만 가질 않았다. 하지만 세번째 요청이 왔을때 결국 면회를 가기로 했다. 다행스럽게 여겼던 나의 망설임이라던가 기대 혹은 희망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내가 느꼈던 것이 정말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운 느낌이였다.
두번째 면회를 마치고 나서 나오는 길에 담배를 많이 피웠다.
이젠 화가 나지도 않고 마음이 아프지도 않으며 슬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을, 그저 무감했을터인데 나는 패병이 걸리진 않을까 싶을 만큼 담배를 피워재꼈다.
나는 진심으로 사십여년 동안 당신이 저지른 죄값을 받았으면 한다.
드디어 첫 재판 날짜가 한달 뒤로 잡혔다.
법에 관해서 나는 아는게 없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 사람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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