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보인 사진.
존 시스템에 기반하여 필름 실효 감도와 하이라이트의 경계를 맞춰 캘리브레이션 된 데이터를 기본으로 내가 사용할 필름 현상 방법과 약품의 종류, 온도 그리고 암실에서 사용할 확대기의 특성을 미리 고려한 카메라의 노출을 정하고 촬영한 이후,
암실에서 베셀러 집광식 확대기에 일포드 웜톤 화이버 베이스를 사용하여 인화지에 빛으로 새겨넣은 후, 중탕된 덱톨에 희석비를 높게한 셀레늄 토닝을 거쳐 D-Max를 올리고 웜톤 화이버 베이스의 색감을 보다 깊고 풍부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너무 딱딱한 느낌을 가져서는 안된다. 부드러움 속에 단단한 덩어리 감이 양립 할 수 있는 균형감각을 유지 해야 한다.
이후 충분히 시간을 들여 오리엔탈 인화지 수세기에 픽서가 완전히 제거 될때까지 수세 시킨다.
오랜 경험상 문제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만에 하나 혹시 모르기 때문에 잔류 픽서를 확인 하기 위해 하이포 인디케이터 약품으로 같이 수세 했던 테스트 프린트에 픽서 잔류 여부를 검출한다. 이후 자연건조 방식으로 최대한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건조시킨다.
마지막으로 드라이 마운트 프레스로 표면과 광택감을 마무리 했었던 마스터 프린트 인데, 이후 보관은 중성 아카이브 박스에 중성 간지를 넣어 보관하였다.
지금도 장비만 있으면 바로 암실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 깊이 들어와있는데도, 막상 이 사진을 보고 있으니 잠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디지털로 오면서 많은 것들이 좋아졌다. 단언컨데 암실에서 작업 했을때 보다 지금이 여러가지 의미로 더 좋다. 프린트 또한 오랜 시간의 투자와 연구 끝에 마침내 납득 할 수 있는 프린트를 만들 수 있게 된 것도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심지어 나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프린트 하는 것으로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 최소한 본인 스스로가 납득이 안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와 무관하게 가끔 지독스러울 정도로 암실에서 프린트 하고 싶을때가 있다. 햇볕이 들지 않는 조용한 오후 2시 30분쯤 암실에 들어가서 다음날 태양이 반짝 거리는 오전 11시까지 프린트를 하는 동안, 오직 붉고 어두운 암등 아래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프린트를 거듭해나갈때 온 몸과 마음을 관통해나가는 감각 만큼은 지금까지도 대체 할 수 있는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종류의 것은 대체물이 없는지도 혹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그저 뭔가를 매우 정교하게 깎아내고 깎아내고 또 깎아내는 단순하고 정교한 작업의 반복일 뿐일지도 모를 암실에서의 프린트는,
때론 고통스러운 작품의 내용 때문에 때론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선 눈을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프린트를 만들 수 있다.그 과정에서 어쩌면 난 많은 위안을 받았던건지도 모르겠다.
과정을 따지자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암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와 어둡고 붉은 암등에서 빛나던 한 줄기 빛이 인화지 위에 새겨지는 마법의 시간 만큼은 여전히 암심에서 보냈던 숫한 날들 달들 년들을 환기하게 한다.
앞으로 내 손에 계속 카메라가 들려있을지 아니면 다른 뭔가를 들고 있을지 아니면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무사히 완료되어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형태로 정제되어 전시가 가능 할 수 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딱 그것 하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