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으며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 교황 프란치스코
\’신을 믿지 않거나 믿음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신이 용서할 수 있느냐\’ 라는 무신론자 유제니오 스칼피라의 질문을 받고.
“희망에 휘둘리는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가기가 쉬워요. 절망적인 순간에 너한테 필요한 건 희망이 아니라 의지란다.”
“올곧은 의지는 너를 진실된 길로 이끌어줄 것이다! 헤헤.. 마지막 말은 이게 맞죠?”
“그런데… 넌 그런 말을 입에 담고도 부끄럽지 않니?”
“…네??”
횡경막과 위장과 명치 사이, 아마도 있을 법한 어떤 신체기관이 아프게 느껴질때가 있다. 짖찢겨내는 고통은 아니요 단지 무엇인가를 은근히, 하지만 분명하고 확실하게 쥐어짜내는 그 감각. 그렇게 압력이 조금씩 강해질수록 나의 안구는 부풀어 오르며 비릿한 압력이 눈을 터질것 같이 만든다.
일년에 몇십번씩이나 이런 일이 있다. 그때 마다 하는 것은 다르다. 그나마 책을 읽을 수 있는 정도라면 무척 감사한 일이요 음악을 듣고 가라앉힐 수 있다면 그나마 감사한 일이다. 이럴땐 뒤에 남은 일 따위 상관없이 무작정 어딘가로 숨어 사라지고 싶은 충동이 일때가 있다. 그리고 난 이미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것은 정말 내가 숨어 사라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깊이 찾아 발견 해주었으면 하는 모순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잠자코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한낮의 정신 없었던 바쁜 일들과, 남은 일들과, 해야 할 일들과, 그리고 이루어졌으면 하는 일들이 검은 원형의 엷은 고리처럼 내 머리 위에 떠있는 듯 하다. 이대로 모든 것을 그만 둔다고 한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이 없을터인데, 가르다란 부지깽이로 땅을 옮아매듯 내리치듯 무엇이 그리 미련이 있는 것일까. 비린 냄새가 나는 나의 안구를 이리저리 굴려 창문 넘어 멀리 있는 단 하나의 가로등과 마주쳤을때, 아마도 있을 법한 어떤 신체기관에서 툭 하고 보낸 날카로운 통증이 나에게 말한다.
천사의 알을 보면서 생각이 났다. 오시이 마모루는 천사의 알 이후의 모든 작업은 사실상 천사의 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항상,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무척이나 앞서갔고, 참으로 오래된 낡은 이야기 이며 아마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구름이 두껍게 잔뜩끼어 있는 밝은 낮에 갑자기 비와 천둥이 친다. 쏴아아 하는 소리가 마음을 진정케 한다. 빗 소리는 쌔졌다가 약해졌다가 길게 뻗었다가 동그랗게 웅크렸다. 어딘가 거리를 알수 없는 자동차의 젖은 발통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먼 산에서 들려오는 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빗소리가 무척이나 사실적이라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사실적인게 아니라 정말 사실이고 실제로 빗물은 명징히 길바닥에서 부서지고 있다.
그것이 나는 무척이나 이상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그렇다고 되고 싶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되고자 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것이지.
나는 돈이 좋다. 왜냐하면 돈은 모든 것의 대신이 되니까. 물건도 살 수 있고, 목숨도 살 수 있고, 사람도 살 수 있고, 마음도 살 수 있고, 행복도 살 수 있고, 꿈도 살 수 있지.
정말이지 소중하고 게다가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기에 좋아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나는 말이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게 싫다. 그게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던가 그것만이 살아가는 이유라던가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태어난 목적이라던가, 그런 희소가치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 Koimonogatari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 10)
– 김수영
안병훈(安炳勳)전
이마를 조아려 말씀 드리옵나니 접때 보낸 편지 이미 들어가서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엎드려 생각하노니 모시고 병환중인 몸 한결 효험을 보는지요, 구구히 지극히 우러러 생각합니다.
상중의 몸 미련한 모습 예와 같을 따름이외다. 며칠 전 이석곡선생이 밀양에 온 때문에 잠시 문안하고, 곧 내려온즉 이씨 또한 대구로 향해 그동안 아직도 그곳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보내드리는 소록은 전자에 보낸 소포서류의 초안을 정서할 때, 다시 고칠 곳이 있어 여기 조각 기록으로써 다시 부치나, 그러나 어느 줄 문구 아래 적어 넣을지 모릅니다.
부디 보살된 후 고쳐 기록함이 어떠하리오, 만약 모르면 다시 통기하기 간절히 바랍니다.
잘 조리하여 어른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음이 어떠하오리까. 아득하여 차례도없이 아뢰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