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몰랐는데 문득 스쳐지나다 보았다.
분명 그때도 그 표정을 보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3년이 지난 후에 다시 본 그 표정은
다른 표정으로 나를 찔러왔다.
나는 사진은 언제나 살아있고 변화한다고, 늘 이야기 하지만
이렇게 덜컥 범해지는 느낌이 들땐 하염없이 우울해지고 만다.
그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었을 때 어떤 말을 하고 싶었었던 걸까.
나는 그때 왜 이것을 보지 못했었던 것인가.
어쩌면 외면하려 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시간의 세례를 받은 사진은
대체로 잔인하다.
TED는 대략 3~4년 전 부터 간간히 즐겨보는 편이다. 아주 사사로운 것에서 시작한 발견이 직관과 객관의 정제를 통하여 어떠한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나의 지쳐있던 심신의 환기를 시켜줄때가 있어서 보곤 한다.
하지만 TED 강연이라는게 보고 있다보면 마련된 시간안에 최대한 이야기를 이끌어내야 하는것이고 내용의 대부분은 무척 진지한 것들이다 보니, 살짝 깊은 내용이다 싶은 경우엔 에너지 소비가 크고, 또한 전체적으로 강연의 템포가 빠르기 때문에 한번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한숨에 받아들인 후 다시 정리하여 나 나름의 정제를 하여 받아들이기 힘들때가 있곤 하다.
다시 말해 강연하는 사람도, 강연을 듣는 사람도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있기 마련인 분위기가 TED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TED 영상은 무척 흥미롭다. 혹여나 TED 같은 자리에서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라고 말할 사람이 분명 있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의외로 미국 사람들 중에도 그런 반응을 보인 스레드가 있어서 흥미로웠다) TED 강연의 연속되고 일관된 템포를 생각 해본다면, 자칫 쉽게 지칠수도 있음을 고려 할때 이런 이벤트는 오히려 TED 스럽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특히 프레젠테이션을 해본 적이 있거나 강의를 해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준비를 완벽히 했다 하더라도 혹여나 저런 상황이 발생하진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것이 보통이고, 매우 중요한 건의 경우 혹여나 발생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해 아에 백업용으로 컴퓨터 한대를 더 준비 하는 경우도 일반적일 정도니 말이다.
위의 경우 진짜 TED의 중요 강연으로서 내용은 아니고 다음 강연으로 넘어가기 전 막간을 이용한 이벤트가 아닐까 싶은데, 이러한 것을 같이 나누고 리프레쉬 하는 식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은듯 해서 보기가 좋았다.
그리고 이 동영상 내용중엔 Mac OS X 이후의 맥을 썼던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커널 패닉\’ 화면이 잠시 나오는데 이때 TED 관중들의 웃음소리가 일순 커지는 것을 캐치 하고 슬그머니 웃었던 당신이라면, 제법 오랫동안 Mac OS X을 사용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P.S 그래도 아주 예전에 비하면 비치 발리볼은 거의 보기 힘들어 졌지. 커널 패닉도.
십년 넘게 지낸 작업실을 뒤로 하고 새로운 작업실로 옮겨 온지 반년이 되었다.
새로운 작업실을 계약한 이후, 제일 먼저 한 것은 물건을 버리는 것이였다. 절반은 버린다고 마음속에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그렇게 버리고 버리고 버려도 결국 1/3 밖에 버릴 수 없었다. 하나씩 하나씩 많은 것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나는 많은 것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나 스스로는 대단히 독하게 마음 먹었다고 생각 했었는데도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별 의미라던가 소중한 기억의 깊이가 얇은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 있다.
반대로 제법 가치가 있던것들인데도 누군가에게 그냥 준다던가 버린다던가 하는 것들도 많았다. 특히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버렸던것들은 책들이 아니였나 한다. 사실 난 책을 구입해서 보는 편이 아니다. 보통 도서관에서 읽거나 빌려 읽거나 혹은 서점에서 읽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콘텐츠 소비에 있어서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랑비 처럼 조금씩 쌓여가는 책들 중엔 제법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들도 있었지만 희안하게도 그런건 버려진다. 어쩌면 소위 서재에 대한 로망이 전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와 동시에 많은 분들의 호의와 도움을 빌어 바닥을 새로 깔고 벽을 중성 회색으로 다시 칠하고 전기 배선과 물의 입출수 배관을 하고 벽을 뚫어 문을 만들고 벽을 새로 새워 암실 공간을 만들었다. 문장으로 쓰니까 참 심플하고 아담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 각각의 과정들 속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고생이 함께 있었다. 벽을 전부 칠하고 바닥을 손수 한장씩 한장씩 다 깔아내고 마지막 한장을 마무리 할때의 기쁨도 나쁘지 않았다.
암실과 대형 프린터 때문에 이사를 두번하는 식으로 되었다. 물론 비용도 두배가 들었다. 공사의 순서와도 관련이 있었기에 도무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암실만 없었다면 훨씬 더 편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게 한두번이 아니였다. 십여년전 처음 작업실을 만들때 나의 모습을 회상해본다면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생각이였을 것이다. 당시엔 암실이 있는 내 작업실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나 생애 소원의 절반을 이룬것만 같은 소금끼 가득한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하고 희안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현재 디지털 프린트의 수준이 암실의 프린트를 재현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는 것을 매일 느끼고 있기 때문일테고, 오히려 대형 작업에 있어선 유리한 점이 훨씬 더 많다는 것 역시 매일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암실 작업은 나에게 있어서 고향 같은 곳이고 처음으로 네발로 기어갔던 곳이며 그곳에서 나는 걸음마를 배웠고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눈동자를 얻을 수 있었고 냄새를 맞을 수 있게 되었으며 들을 수 있게 해준 곳이다. 단순히 효용 가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암실만 없었다면 훨씬 더 편했을텐데, 라는 감각이 나에겐 매우 기묘하게 와 닿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논리적으로 설명 할 수 없는건 아니다. 그러나 논리로는 부족하다. 제법 시간이 흘러 작업실의 최소한의 모양이 잡히게 되고 완성된 암실에 들어서는데 대단한 위화감을 느꼈다. 예전 작업실과 배치는 거의 동일하다. 매우 사소한 부분만 다를 뿐. 그럼에도 몸에 커다란 뱀이 휘감는듯한 불쾌한 위화감은 나를 암실에서 다시 나오게 했다. 분명 내가 설계하고 만든 암실이였음에도 너무나 다르게 와닿는 기분은 이루 불쾌하기 그지 없었다. 모든 것들이 불편하고 어색하다. 손끝 하나 차이로 혀안에서 헛도는 미끌한 느낌과 비슷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암실에 들어가기가 싫어졌고 압도적으로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필름은 하염없이 쌓여가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만큼 필름이 쌓여있었다. 어림잡아 현상해야 할 필름이 100롤은 넘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기에, 납덩이를 종아리에 달고 걷는 느낌으로 끌려가듯 들어가서 한차례 현상을 마치고 나니 너무나도 지쳐있었고 불쾌감은 더욱 커져갔다. 하지만 앞으로 현상해야 할 필름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은것 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첫번째 현상 이후로 두어달은 암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상해야 할 필름의 압박으로 떠밀려가듯 현상을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쯤 되면 피하기 보다는 원인 파악을 해야 할텐데 곰곰히 생각해봐도 원인을 쉽게 알기가 어려웠다. 또 몇주일이 지나고 세번째 현상을 끝내면서 원인을 알게 되었는데, 십여년 넘게 있었던 예전 암실의 작업 습관이 적당히 있는데로 작업을 한것이 아닌, 그 환경 내에서 고도로 최적화된 습관이 뼈속 깊숙히 박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굳이 수치로 따지자면 불과 몇 Cm 의 차이고 한 걸음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의 차이로 미끌거리는 느낌이 들도록 하였던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참으로 적응의 동물이요 간사한 동물이요 섬세하고 민감한 동물이라는 것을 재차 느끼게 되었다. 원인을 알게 된 이상 남은 것은 나의 새로운 암실을 다시 내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환경을 나에 몸에 맞추는 것도 있을것이요 나를 환경에 맞추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미 암실의 설계는 기존과 다른게 거의 없으므로 불과 수 Cm의 차이 보정을 몸으로 해나가면 될 일이다. 이후엔 불쾌한 느낌이 들더라고 그것이 우울감을 만들어내진 않았다. 이러한 것을 두고 기뻐 할 정도 까진 아니지만 나의 것을 다시 찾아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는지 현상을 마치고 나면 5 Cm 정도의 보람감이 들기도 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여기도 오랫동안 지내다 보면 뭔가가 또 태어 나겠지. 그래. 암실은 무엇인가 태어나는 공간이기에.
이 암실을 다시 나의 것으로 되돌려 받는데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여러모로 편해졌고 다시금 나의 암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반년의 시간동안 난 설사를 계속 했다. 수술 이후의 휴유증을 상정해보기도 했으나 이사하기 전엔 빈도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설득력이 없다. 헌데 나의 암실들 되돌려 받은 이후엔 설사가 몰라보게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빈도수가 무척 작아졌다. 우연이겠지.
작업실 내부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갔다. 처음엔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놓여 있어도 불편하고 어딘가 허허로운 기분이 들었다면, 지금은 적당히 정리되어 있고 적당히 어질러진 느낌의 밸런스가 잘 잡혀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 이전 작업실에 비해 프린트 의뢰 손님도 확실히 늘었다. 우연이겠지.
손에 쥔건 딸랑 카메라 하나가 전부였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없는 돈을 쥐어짜서 만든 작업실로 시작해서 그 사이에 정말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 수많은 행복, 슬픔, 외로움, 고통이 그대로 녹아나고 있었고 그리고 그 공간은 나에게 있어서 맞춤복 처럼 딱 들어맞았다. 그 공간이 바로 나인 것 처럼.
이전 작업실의 계약을 마치고 기존 시설물을 철거하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어딘가 가슴이 찡할것이라 예상하였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사람을 불러 철거를 시작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나오던지 바닥을 가득히 메우기가 삽시간이였다. 역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나온 잔해물과 정리하면서 버렸던 물건들이 1톤 트럭을 가득히 채우고도 트럭 운전석 보다 더 위로 솟아나있는 광경을 찍었다. 사십 계단을 다시 올라가고 거기서 다시 작업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고 텅빈 공간에 다시 돌아오니 암실때문에 막혀 있던 창문에서 밝은 햇볕이 암실이 있던 자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것이 한순간 걷잡을 수 없는 폭발적인 감정을 만들어냈다.
다시 사진을 조용히 찍었다.
2주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전시 시간 동안, 저의 개인전에 와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만약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면, 그 무엇보다 무척 기쁜 마음일 것 입니다.
감사합니다.
애플 II가 처음 인연이였고
월간 컴퓨터 학습에서 스티브 잡스 브로마이드를 주던 시대가 있었다. 벽에 붙여두었는데 부모님이 그 브로마이드를 버렸었지.
그때부터 스무해 넘게 지난 지금,
비록 지금 벽은 아니지만 웹 공간에서 그를 다시 붙여두었다. 다만 의미는 많이 달라졌다.
1984년 최초의 매킨토시 공개.
불의 전차.
코닥극장을 가득 채운 환호성에 그의 표정을 볼때 그 감정의 진폭을 알것만 같다.
스티브, 당신이 남긴 유산은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겠지요.
Thanks, Steve.
수면 부족으로 저녁 시간을 지나 곰이 동면하듯 몸을 웅크리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잠결에 뭔가가 느껴지긴 했는데 그게 뭐였는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몸이 무거워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38분을 지나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한지 대략 5~6시간이 지났으니 배가 고플만도 하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마늘소시지와 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남아있던 식은 커피를 마시고 다시 자리에 앉으니 희안하게도 마음이 허허롭다.
이런것은 어떠한 전조라 할 수 있는데, 역시나 십분도 지나지 않아서 적적한 쓸쓸함이 친근한 얼굴로 노크를 하고 내 속에 들어온다. 보통 이럴땐 음악을 듣거나 하는데 왠일인지 음악 들을 기운마저 없다.
해야만 하는 일이 세가지 정도 남아 있었는데, 그 중 한가지를 해치우고 나니 벌써 4시 30분이 지나있었다. 어딘가 석연찮은 기분이 들어, 남은 두가지 일 중에 한가지를 계속 정리하다가 지쳐서 쉬었다. 데이터를 추출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보기 좋도록 정리를 하는 단순 반복적인 일이다.
안구가 뻑뻑하니 잠시 눈꺼풀을 내렸다 올리니 순간 온 세계가 흐릿하게 보였다. 1초간 생각 했었다. 이대로 볼까 아니면 빨리 눈을 감고 다시 떠볼까. 하지만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눈꺼풀은 자동으로 닫혔다 열린다.
암실에 잠시 들어갔다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다시 나왔다. 여전히 적응이 잘 안된다. 예전보자 더 넓어졌지만 아직 내 공간이라고 하기엔 시간이 좀더 필요 할 지도 모르겠다.
다시 잠을 청하려 생각 해보았으나 마치 불꽃놀이가 끝난뒤에 내려오는 불꽃 시체를 흐린눈으로 보며 가슴 한구석이 뱅글뱅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쩔줄 몰라 하고 있다.
그리고 담배를 몇가친가 태워냈다.
시간은 아침 6시를 넘어가고 있고 찐득하고 가벼운 한숨이 기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식은 커피도 다 마시고 남아있지 않았다.
선풍기의 흐르르르 거리는 전기 모터 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리는데 어째서인지 적적한데도 고맙다.
어느날, 이런 날이 있을때도 있다.
낮에는 시름 시름 앓는 매미가 울고
밤에는 시름 시름 울적이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시작은 언제나 이런식이다.
무엇인가 끝이날때와 무엇이 시작 될때는 혼돈스럽다. 연극의 무대 처럼 막이 있어서 적절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아, 이제 끝났군. 곧 다음 막이 시작 되겠구나. 이런건 좀체로 찾아 보기 힘들다.
소프트 랜딩이라는 단어가 생각하는데, 이런 계졀의 변화도 소프트 랜딩이라 할 수 있겠지. 다만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나는 여름을 좋아하니까, 단지 여름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소박한 아쉬움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과는 분명 다른 것이 있다. 올해 여름은 비가 많이 왔다고 하는데, 분명 비가 많이 왔었음에도 기억을 되돌리자면 몰라도 몸에 남아있는 비 냄새는 거의 나지 않는다. 미끄덩 거리면서도 축축하고 뜨뜻한 그 느낌 말이다.
올해는 여러가지 일들이 많았다.
여러가지 일들이 많았는데도
물에 컵이 반 정도 들어찬듯한 느낌이 들어서 스스로도 아연하다.
암실에서 작업을 하려고 하니, 천장에서 고여있던 빗물이 아직도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목구멍 혀 뿌리 근처까지 아릿한 느낌이 오면서 오만가지 짜증이 나려고 하는 것을 쑥쑥 말아넣고 다시 나왔다. 그때 혼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그리고
적절하게 보기 좋은 가을이 오겠지.
난 그 광경이 아무래도 좋아지질 않는다.
실버패스트 6가 대략 2002년도 쯤에 나온걸로 기억하니까 실로 10년 만의 메이저 업데이트가 되었다. 다만 넘버링이 좀 특이한데, 실버패스트 7이 아니라 8로 출시 된것. 어떤 내부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유저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실버패스트는 필름을 디지털로 바꾸는 스캔 프로그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말 그대로 불허 할 정도의 대단히 강력한 스캐너 구동 프로그램이다.
단, 이렇게 강력한 만큼 조정을 잘 못하면 강력하게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이 문제고 또한 초보자에게 있어선 강력한 기능을 사용하기엔 숙련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제대로 맞췄을때 나오는 스캔 품질은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하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한 솔루션이다.
허나 맥에서는 Mac OS X 10.7 라이온으로 메이저 업데이트 되면서 기존 로제타 기반 (즉 Power PC 기반 프로그램) 이였던 실버패스트가 작동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대략 2~3년 전 부터 꾸준히 x86 바이너리로 작성 해달라고 꾸준히 요청하였지만 결국 이번 텀에 그 작업이 완료 된 것이다. 따라서 실버패스트 8은 Mac OS X Lion을 정식 지원하게 되었다.
인터페이스는 기존에 비해 상당히 달라진듯 하면서도 기본은 변하지 않았다. 조금 냉정하게 이야기 하면 이번 버전의 난잡하고 난감한 인터페이스 느낌은 그대로이다. 독일 답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유저 편의성은 이전 버전에 비해 많이 신경쓴듯 하지만 그렇다고 초보가 쓰기에 좋아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때 중요한 부분이 개선이 되었고 지금까지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뽑아내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런고로, 결국 실버패스트를 업그레이드 하였다.
약간의 출혈이 있지만, 스캔 품질에 비하면 납득 할만한 가격이다.
현재 주요 스캐너 지원은 얼추 정리된 듯 하고
소위 말하느 2군 스캐너의 지원은 다음 릴리즈에서 지원 예정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는 미놀타의 5400 시리즈도 포함이 된다. 대략 3개월 안에 볼 수 있을것이라 예상 된다.
저녁을 먹었다.
이상하게 뭔가 허허로워
한시간 쯤 후에 맥주를 반캔 마셨다.
이상하게도 튀김이 먹고 싶었다.
그냥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심산으로
적당히 누르기를 서너시간이 지날 즈음이였다.
사실 이런 시간에 튀김집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하지만 여기는 한국 아니던가?
게다가 시내에 살고 있어서 소소하게 좋은 것 중에 하나가 이런것이지.
아마 어디 한군데 정도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굳히고나니 도무지 참기 힘들어 자정이 넘은 시간에 광복동, 남포동을 지나 충무동까지 몸을 질질 끌고 갔다.
혹시나 했는데… 피프광장을 지나 충무동 초입으로 들어가는 길의 포장마차들은 전부 철수 상태였다. 조금 더 들어가보니 불빛이 어른하게 보이는데 불법 성인 도박 오락실 앞을 지키고 있는 예닛곱 명의 사람들, 맞은편에 대략 3동 정도 되어 보이는 큰 포장마차가 꼬마김밥, 오뎅, 튀김, 막걸리, 맥주, 소주 등을 파는 곳이 보인다.
집게를 찾아서 하나를 집어 먹으려니 아주머니가 비닐을 씌운 그릇을 주며 여기에 담으라고 한다. 물론 튀김은 따뜻하게 먹어야 맛있다는건 대부분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그래. 다시 데워주려고 그러는 것이겠지라고 당연스럽게 생각이 듬과 동시에 느낌이 어딘가 석연찮다.
오징어 튀김 3개, 깻잎 튀김 1개, 고추 튀김 1개 그리고 새우 튀김 하나를 올리고 나니 그것을 받아서 튀김 기름에 넣는다. 튀김의 소리가 들리는데, 그때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 했다. 기름이 튀겨지는 리듬감, 소리의 고저, 냄새와 열기를 봤을때 이 튀김들은 이미 튀긴지 한참 지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앞에 가득히 쌓여 풍성해보이던 튀김 같은건 처음 포장마차 입구에 들어섰을때 보이지 않았던거겠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풍성히 쌓여 있어서 안도 했던건지도 모른다. 이런 바보 같은. 이미 튀긴지 오래 되어 기름의 산도가 올라갔을터이고 게다가 한번 눅눅해진 것을 다시 기름으로 데운다고 한들, 그것은 순수한 튀김이라고 하는 것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식의 부드러우면서도 바스락 거리는 일종의 집요함이 느껴지는 고급 튀김만을 순수한 튀김이라고 생각하는 안타까운 인생을 살고 있진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류의 튀김은 이것 나름의 맛이라는 것이 있고, 게다가 그것은 살아가면서 기억속에 남았던 추억과도 연결된다면 나름 훌륭한 음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제차 확인하고 싶어서 아주머니께 물었다.
여긴 몇시부터 몇시까지 영업 하냐고.
24시간, 풀타임. 명절도 없고 무조건 24시간. 이라고 한다.
이런…
오징어 튀김을 씹으며 복잡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오징어 특유의 향은 하나도 없고, 단지 부드러운 고무를 씹는 맛이 났고
깻잎 튀김에선 은은하면서도 향미가 풍기는 깻잎의 향이 하나도 없는 단지 기름 범벅이였으며
새우튀김은 속살이 푸석거리고 고추튀김은 속살에 거의 비어 있었다.
이야.. 이건 마치 관광지에서 바가지를 쓰는 여행객이 된 기분이다.
그래도 그런 경우엔 관광지니까 이런 바가지 쓰는 것 마저도 관광스러운 기분으로 치환해서 나름 즐겨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건.
무미건조한 맛을 대략 10분 정도 맛 보면서 불법 성인 오락실의 게이트 키퍼를 보고, 그 안에서 나온 손님이 물건을 돈으로 환전하는 것을 보면서 갑자기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라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무미건조한 맛을 혀에 담은체 무미건조하게 얼마에요.라고 묻고 값을 치르고 돌아왔다.
그래. 그런거지. 뭔가를 굉장히 원해서 막상 그것을 성취하거나 하게 되지만 그 이후엔 별 느낌이 없는 법이지. 라고 적당히 스스로를 위로 해주고 싶었으나… 어떻게 스스로 더 이상 속일 수 없었다.
내 가슴속 튀김은 이렇지 않아!
덕분에 한동안은 튀김을 먹고 싶어 지지 않게 되는 긍정적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진짜 제법 괜찮은 튀김을 내어 오는 일식집에 미친척 하고 들어갈지도 모르지.
오늘따라 날이 미묘하게 후덥지근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