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df_Mutter

40년

오랜 기간 만성이 되어 나름 마음을 다스리는 요령 따위가 있었을 터임에도, 심장에서 검은 피가 퍽 하고 터져나가는 살의의 감정 둔턱까지 이르는 데는 단 몇 분 만이었다. 그토록 익숙함에도 여전히 그리고 대단히 아프고 고통스러운 감정이기에 나는 생존을 위해 감정을 최대한 없애고 냉정해지는 요령을 성장기에서 부터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터득했다. 그래서 나의 그런 모습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어떤 이는 나를 감정이 없는 로봇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떤 이가 나를 로봇같이 보든 아니든 상관 없이, 감정은 그냥 사라지진 않는다. 타조가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머리만 처박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인간에 감정에도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슷한 공식을 갖는다. 정신의 스트레스가 몸으로 전환되어 퍼진다. 그 몸의 고통이 다시 정신의 고통으로 번진다. 그렇게 몇 순의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가라앉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살미수로 끝난 뒤에 남는 몸의 상처 처럼 가슴에 새겨지고 남는다.

그저 그때그때를 모면하며, 잔에 든 흙탕물을 가만히 두어 흙을 아래로 가라앉히는 것 외엔 수단이 없는 것이다. 생존 본능은 이토록 저열하고 지독하다. 그러나 시간과 공을 들여 겨우 맑은 물을 분리 해놓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잔은 결국 특정 조건에선 또 흔들려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지독한 흙탕물이 된다. 이런 일이 건조하게 예고 없는 반복이 될 때마다 끈적거리는 흙탕물의 썩어가는 농도가 짙어질 뿐 이것이 순수하게 맑은 물로 정화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나다.
컵을 바꿔 물만 따라낼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삼류 소설에서처럼 몸이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내가 바뀌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자신만의 지옥을 껴안고 살아간다.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빈번하게 한계선까지 갈려 나가다 보면 노이로제에 걸린다. 정신병이 되는 것이다. 마음의 결단이 강제되고 있음을 느낀다. 정신병자임에도 생존 본능은 이토록 저열하고 지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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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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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나약함을 누군가의 희생으로 극복하려거나 탓을 하여 덮으려는 인간이, 삶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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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정기적으로 생리가 오는 것과 비슷하게
나는 비교적 어떤 시기를 기준으로 정기적인 우울증을 겪는다.

그리 특별할 일도 아니고 만성도 되었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하고 밥은 맛이 없었으며, 딱히 재미있거나 신나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였다.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라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사실 이것 또한 만성이라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목욕탕에 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샴푸로 머리를 감고
뜨거운 물에 몸을 밀어넣고선
절로 흘러나오는 미적지근한 신음 소리를 토하고 난 뒤에,
거리를 나서면 얼마간 기분이 좋아진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려 맥주를 살까 했다.
그래 오늘 같은 날엔 무조건 맥주다.

4캔 1만원 세트. 즉 캔당 2,500원에 에비스를 입수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 어찌 되었건 저찌 되었건 세상은 조금씩 좋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500원에 에비스를 입수 할 수 있게 됨으로 나는 최소 6개월은 더 싸울 수 있다.

농담이 아니다.

원하는 것

깨진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보인 사진.  

존 시스템에 기반하여 필름 실효 감도와 하이라이트의 경계를 맞춰 캘리브레이션 된 데이터를 기본으로 내가 사용할 필름 현상 방법과 약품의 종류, 온도 그리고 암실에서 사용할 확대기의 특성을 미리 고려한 카메라의 노출을 정하고 촬영한 이후,

암실에서 베셀러 집광식 확대기에 일포드 웜톤 화이버 베이스를 사용하여 인화지에 빛으로 새겨넣은 후, 중탕된 덱톨에 희석비를 높게한 셀레늄 토닝을 거쳐 D-Max를 올리고 웜톤 화이버 베이스의 색감을 보다 깊고 풍부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너무 딱딱한 느낌을 가져서는 안된다. 부드러움 속에 단단한 덩어리 감이 양립 할 수 있는 균형감각을 유지 해야 한다.

이후 충분히 시간을 들여 오리엔탈 인화지 수세기에 픽서가 완전히 제거 될때까지 수세 시킨다.

오랜 경험상 문제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만에 하나 혹시 모르기 때문에 잔류 픽서를 확인 하기 위해 하이포 인디케이터 약품으로 같이 수세 했던 테스트 프린트에 픽서 잔류 여부를 검출한다. 이후 자연건조 방식으로 최대한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건조시킨다.

마지막으로 드라이 마운트 프레스로 표면과 광택감을 마무리 했었던 마스터 프린트 인데, 이후 보관은 중성 아카이브 박스에 중성 간지를 넣어 보관하였다.

지금도 장비만 있으면 바로 암실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 깊이 들어와있는데도, 막상 이 사진을 보고 있으니 잠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디지털로 오면서 많은 것들이 좋아졌다. 단언컨데 암실에서 작업 했을때 보다 지금이 여러가지 의미로 더 좋다. 프린트 또한 오랜 시간의 투자와 연구 끝에 마침내 납득 할 수 있는 프린트를 만들 수 있게 된 것도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심지어 나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프린트 하는 것으로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 최소한 본인 스스로가 납득이 안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와 무관하게 가끔 지독스러울 정도로 암실에서 프린트 하고 싶을때가 있다. 햇볕이 들지 않는 조용한 오후 2시 30분쯤 암실에 들어가서 다음날 태양이 반짝 거리는 오전 11시까지 프린트를 하는 동안, 오직 붉고 어두운 암등 아래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프린트를 거듭해나갈때 온 몸과 마음을 관통해나가는 감각 만큼은 지금까지도 대체 할 수 있는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종류의 것은 대체물이 없는지도 혹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그저 뭔가를 매우 정교하게 깎아내고 깎아내고 또 깎아내는 단순하고 정교한 작업의 반복일 뿐일지도 모를 암실에서의 프린트는,

때론 고통스러운 작품의 내용 때문에 때론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선 눈을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프린트를 만들 수 있다.그 과정에서 어쩌면 난 많은 위안을 받았던건지도 모르겠다.

과정을 따지자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암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와 어둡고 붉은 암등에서 빛나던 한 줄기 빛이 인화지 위에 새겨지는 마법의 시간 만큼은 여전히 암심에서 보냈던 숫한 날들 달들 년들을 환기하게 한다.

앞으로 내 손에 계속 카메라가 들려있을지 아니면 다른 뭔가를 들고 있을지 아니면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무사히 완료되어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형태로 정제되어 전시가 가능 할 수 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딱 그것 하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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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th is like poetry.
And most people fucking hate poetry.

– Overheard at a Washington, D.C. bar

진실은 시와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를 혐오한다.

– 워싱턴 DC 어느 술집에서 들려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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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죽음을 양분 삼아 꽃이 피듯
이 아름다운 세계 밑바닥엔
셀 수 없는 비극이 파묻혀 있다.

당사자라도 아닌 한
그대가 그걸 알 일은 없다.

그대는 그저 너무도 눈부신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채
대지를 짓밟고 나아가면 될 터이다.

그대의 비극은 양식이 되고
새로운 꽃을 피울 것이다.

Keep Walk

 

내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지식과 시간과 가용할 수 있는 한도 금액에서 정말 다 쥐어짜냈다.

더 이상 어떻게 달리 다른 방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선을 다 했다. 그렇게 날려버린 내 작업의 복구율은 최종적으로 50% 정도가 최대 한도였다.

2장 중에 1장은 위에 보이는 것과 같다. 20년 가까이 밀도를 가진 시간을 복구 하기 위해 정말 끈길기게 악착같이 여기까지 하고 보니, 포기와는 좀 다른 감각의 것이 밀려온다. 좋은 감정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감정만도 아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나에겐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두가지 감정이 물이 불 타들어가듯 흐르고 있다.
1년 반 전 부터 시작한 이 작업에 동참 해주셨으나 데이터를 복구하지 못하여 사라진 백 팔십 일곱 분들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죄송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다. 단순히 사진이나 작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의 순간 이자 신기루 같은 영원과도 같은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가 받아내어 맡고 있었으나, 이것을 잃어 버렸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

두번째는, 그 와중에 예술을, 나의 작업을, 지금까지 나의 삶을, 단절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도피 행위를 통한 생존의 열망에 가득차 있었던 와중에도.. 그런 나의 열망찬 의지와는 하등 관계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마주하고 렌즈 너머 상대방의 눈을 맞추고 작업을 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작업이 무사히 끝나고 잘 정련 되길 바란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전시가 될 수 있길 바란다.

목적

부질 없다는 감정을 제어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마음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새로잡아보지만, 걸레조각이 된 짜투리들을 맞춰서 다시 분류하고 정련해가는 과정에 휩쓸린 시간속에서, 나의 반쪽도 휩쓸려나가버린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게 휩쓸려나간 자리엔 두껍게 굳어있는 검은 피와 혈관이 빼쭉 튀어나와 있는 느낌이다. 이 짓거리를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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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시간을 쏟아부어
날라간 작업들을 복구 해봤으나 결과는 먹먹하다.

슬레지 헤머 들고 작업실 다 때려 부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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