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기본적으로 단맛이 나는 음식을 싫어한다. 심지어 너무 당도가 높은 음식을 먹으면 두통이 오기도 한다. 단맛이라고 해도 사방이 추워질 즈음 껍질이 얇고 잘 익은 감귤 정도가 나에겐 딱 좋다. 기본적으로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이 좋은 것이다.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있어서 그런지 이십여 년 가까이 입에 대지 않았던 파르페가 먹고 싶어졌다. 흰 수염에 장발인 사십 대 남자의 두툼한 손으로 조그만 스푼을 잡고 혼자 파르페를 먹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음…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사실 파르페 자체가 어떤 공식이나 엄밀한 법칙이 있는 게 아닌 제법 멋대로의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파르페를 눈으로 볼 때, 첫 한입을 시작할 때 어느 것부터 먹을까 같은 가볍기만 해서 좋은 고민, 그저 달기만 할 터인데도 기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운율의 밸런스, 무엇보다 다 먹은 후에 빈 컵을 잠시간 바라볼 때 느껴져야 할 응당의 기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부산에서 먹을 수 있는 ‘당연한 파르페’를 파는 곳을 알고 있는 분이 있다면 꼭 알려주셨으면 한다.
고독을 이기려면/마광수
고독을 이겨나가려면 우선 ‘사랑’에 대한 헛된 꿈을 버려야 한다.
완전한 사랑도 없고 남녀간의 완벽한 궁합도 없고
진짜 오르가즘도 없다.
‘오르가즘’이란 말은 의사들이 만들어낸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사랑의 기쁨에 들떠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자.
미혼의 남녀라면 기혼자들이 떠벌여대는
남편(또는 아내)자랑이나 자식자랑에 속지 말고,
기혼남녀라면 남들의 가정생활과 자기의 가정생활을 비교하지 말자.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요 허풍쟁이이다.
다 불쌍한 ‘자기 변명꾼’들이다.
믿을 사람은 오직 자기밖에 없다.
물론 혼자서 살아나가려면 뼈아픈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혼자들이 고독을 덜 느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결혼하든 결혼 안하든, 모든 사랑은 결국
나르시시즘적 자위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두라는 말이다.
취미생활이나 일로 고독을 풀어도 좋고
그냥 가만히 앉아 시간을 때워나가도 좋다.
이래도 외롭고 저래도 외롭다.
그때 그때 슬피 울어 고독을 달래도 좋고
술에 취하여 허망스레 웃어도 좋다.
요컨대 ‘완전한 사랑’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희망’을 갖기보다는 ‘절망’을 택하라는 말이다.
절대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연애하고 싶으면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라.
자식을 낳고 싶으면 낳고 낳기 싫으면 낳지 말라.
사회명사들이 잘난척 하며 써 갈기는 ‘행복론’ 따위는
읽기도 전에 찢어버려라.
다들 자기변명이요 대리배설일뿐,
믿을만한 ‘고독의 근치(根治)처방’은 없다.
그것은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신(神)의 사랑도 믿지 말라.
정 외롭거든 술이나 담배를
자학적으로 마시고 피우며 시간을 달래나가라.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자살해도 좋고,
바람을 피울 용기가 있으면 바람을 피워도 좋다.
아무튼 뻔뻔스럽게 운명 아니 신(神)의 ‘심술’과 맞서나가야 한다.
‘고독’이란 결국 ‘의타심(依他心)’에서 온다.
의타심을 완전히 버릴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독으로부터
당당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절대로 ‘밑지는 사랑’을 하지 말라.
사랑을 하려거든 이기적인 자세로 빼앗는 사랑만을 하라.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작업 하던 중 초등학교에서 촬영을 하는데 멀리서 남자 여자 꼬맹이들이 나를 보는 순간, 우르르 달려와선 날 보고 망태영감 망태영감 노래 부르면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기억이 있다.
짖궂은 아이도 있었고 눈을 초롱초롱 거리면서 신기하게 나를 처다보며 나에게 폭 안기는 아이도 있었다. 눈높이에 맞춰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같이 잠시 함께 놀았다.
겨울 오후 4시쯤의 선명하고 부드러운 햇살이 아이들의 얼굴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그런 평범한 날이였다.
그런 기억이 예고 없이 떠올라 몇 십 분간 나를 괴롭게 했다.
구역질 날 것 같은 봄의 나날 속에서 발생하는 것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은 비다.
먼 북소리처럼 천둥이 둥글게 이따금 들려오고 가까이에선 자동차의 젖은 타이어 소리. 세상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듯한 고요함은 외롭다기보다는, 부드럽게 눈을 감은 체 소리를 맛보고 냄새를 듣는 기묘한 감각. 분명 싸늘한 느낌일 터인 높은 습도의 공기도 어쩐지 부드럽고 포근한 두터운 느낌.
태양이 분명하게 떠 있을 하늘에 비구름이 가득하여선 마치 새벽 같은 한낮에, 옷을 다 벗은 연인과 침대 속에서 서로의 살결을 느끼며 부드럽게 껴안고 그대로 눈을 감는 부드럽고 온전한 감각. 시간이 흐르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는 흐름.
찰나의 순간이나마 삶이 완성된듯한 착각의 감각. 깊이깊이 눈을 감고 감고 감아서 결국 자신이 녹아 없어지는 감각과 동시에 껴안은 연인의 살결과 살 내음이 문득 나에게 알려주는 한 마디. 아무것도 아닌 사랑.
그런 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은 글렌 굴드가 노년에 연주한 골덴 베그르 변주곡. 지금의 나에겐 이것 하나면 족해졌다. 난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무렴 어떻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