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작업 하던 중 초등학교에서 촬영을 하는데 멀리서 남자 여자 꼬맹이들이 나를 보는 순간, 우르르 달려와선 날 보고 망태영감 망태영감 노래 부르면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기억이 있다.
짖궂은 아이도 있었고 눈을 초롱초롱 거리면서 신기하게 나를 처다보며 나에게 폭 안기는 아이도 있었다. 눈높이에 맞춰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같이 잠시 함께 놀았다.
겨울 오후 4시쯤의 선명하고 부드러운 햇살이 아이들의 얼굴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그런 평범한 날이였다.
그런 기억이 예고 없이 떠올라 몇 십 분간 나를 괴롭게 했다.
구역질 날 것 같은 봄의 나날 속에서 발생하는 것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은 비다.
먼 북소리처럼 천둥이 둥글게 이따금 들려오고 가까이에선 자동차의 젖은 타이어 소리. 세상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듯한 고요함은 외롭다기보다는, 부드럽게 눈을 감은 체 소리를 맛보고 냄새를 듣는 기묘한 감각. 분명 싸늘한 느낌일 터인 높은 습도의 공기도 어쩐지 부드럽고 포근한 두터운 느낌.
태양이 분명하게 떠 있을 하늘에 비구름이 가득하여선 마치 새벽 같은 한낮에, 옷을 다 벗은 연인과 침대 속에서 서로의 살결을 느끼며 부드럽게 껴안고 그대로 눈을 감는 부드럽고 온전한 감각. 시간이 흐르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는 흐름.
찰나의 순간이나마 삶이 완성된듯한 착각의 감각. 깊이깊이 눈을 감고 감고 감아서 결국 자신이 녹아 없어지는 감각과 동시에 껴안은 연인의 살결과 살 내음이 문득 나에게 알려주는 한 마디. 아무것도 아닌 사랑.
그런 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은 글렌 굴드가 노년에 연주한 골덴 베그르 변주곡. 지금의 나에겐 이것 하나면 족해졌다. 난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무렴 어떻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