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시간이 제법 흘렀다.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반 시체가 되어간다는 감각을 지나, 누런 고름의 비린내를 남긴 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3년의 시간을 넘어 마주하고 확인을 했다. 그리고 싫든 좋든 나는 또 한 번 피할 수 없는 시기가 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지막은 신주쿠 교엔이였다. 그날로부터 인간으로서 나를 이루는 중심 혹은 나라고 하는 인간의 축이 변한 세 번째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의지나 바램따위와 상관없이 네 번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이것은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피할 수 있다면, 도망칠 수 있다면 제법 댓가를 치러도 좋겠다는 마음이다. 이 정도 횟수를 반복하면 익숙할 법도 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될지 예측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겐 두려운 것이다.
출발하기 불과 수일 전에서야 여권의 10년 유효 기간이 지난 것을 알게 되었다. 발급에 일주일이 걸리는 경우도 있는 터라 어마어마한 귀찮음을 감수하며 구청에 신청했다. 다음날 서울 출장을 갔다 남은 시간에 오랜 친우를 만나서 한강을 제법 걷고 담배를 피우고 매점에서 파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맛이어서 웃음이 터지는 커피를 길게 그리고 맛있게 마셨다. 연락할까 싶은 여자 몇 인가 머릿속을 잠시 돌았지만 관두었다. 바로 저녁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터미널에 도착하여 새까만 밤 속에 있던 하얀 목련을 몇 장 찍었다. 작업실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되었다. 그리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의 서류 뭉치가 담긴 항공 우편을 받았다.
깊고,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무척 길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종류의 기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무척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서류를 주의 깊게 세 번 더 읽고, 잠시간 그대로 의자에 깊숙이 파묻힌 채 불 꺼진 작업실에서 불 꺼진 모니터를 어둠 속에서 응시했다. 커피를 아주 진하게 내리고 담배를 피우고 이상하리 만치 배고프지 않았음에도, 한참 시기를 놓친 저녁 끼니를 억지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긴 밤을 견디다 잠이 들었다.
타이밍이 좋았다면 좋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신적 도살장으로 끌러가는 것 외엔 도쿄에서는 딱히 가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해야만 하는 것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번 도쿄행과 전시 결정의 시기가 겹친 덕에, 해당 전시장 조명 특성을 계측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사롭지만 해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그리 문제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마음이 옥죄는 느낌을 완화 시켜 줄 것이다. 안 해도 그리 문제가 없는 일을 한다는 일련의 흐름은 나에겐 그런 것이 되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몸을 짓누르는 중력이 목 뒷부분을 뻐근하게 한다. 가속도를 내고 있는 비행기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오르는 순간을 나는 좋아한다. 일상에선 거의 느낄 일이 없는 중력에 잡혀있던 나의 몸이 엄청난 힘으로 탈출할 때,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자리에서 관성과 중력의 반대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한다. 중력을 온몸으로 실감한다. 랜딩 기어를 집어넣을 때 꺼꺽거리는 정상적이지만 불길한 소리. 기류를 올라타고 내려 타며 흔들거리는 느낌, 기체 전체가 오른쪽으로 롤을 할때 몸 전체가 쏠리는 일련의 이륙 시퀀스 그 자체를 좋아한다. 맛대가리 없는 싸구려 기내식을 밀어 넣고 잠시간 눈을 감았다.
비행기의 오른편으로 후지산이 지나갈 때 즈음의 외벽 온도계는 영하 48도를 가리켰다. 공항에 도착해서 1박에 만 오천 원이라는 믿기 힘든 가격의 저렴한 숙소가 있는 신주쿠까지 갔다. 원래라면 조그만 사무실 용도의 방 하나에 2층 침대를 우악스럽게 우겨 넣어 16명을 수용하는 어떤 종류의 시설 느낌이다. 하지만 나무관과 같던 이전 캡슐 호텔에 비하면 가격도 그렇고 여러모로 낫다. 어디선가 딸기 캬라멜과 흑설탕이 녹을 때 냄새와 싸구려 화장품과 싸구려 버터와 사과잼 들을 한꺼번에 섞은 다음에 유통기한이 지나고 살짝 발효되기 바로 직전의 향기가 난다든가, 소위 정상적인 게스트 하우스처럼 라운지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여자에게 작업을 건다든가 술을 같이 마신 다던가 하는 정겨움 같은 건 전혀 없다. 하지만 나에겐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동생을 만나고 밥을 먹고 담배를 조금 피우고 잠시 헤어진 뒤 약속했던 사람과 9년 만에 만났다. 여러 가지 것들을 기억해주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을 보니 문득 세월의 거대한 흐름이 한차례 이상 지나간 흔적이 남은 얼굴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원칙이 대단히 중요한 사람임에도, 여러 가지 배려를 받았다. 무척이나 고마웠다.
9년이라는 것은 순간이기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너무나 긴 시간이다.
다시 동생과 합류해 저녁을 먹고 간단히 맥주를 마시고 유통기한이 몇 년은 지난 카라멜 향이 나는 숙소에 몸을 뉘었다. 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몸이 고단했다. 중간에 두어 번 깼지만 이층 침대의 무척 낮은 천장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잠들길 반복했다. 겨우 잠에서 깨어 일어나니 거울을 보지 않아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미지근한 물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바로 길에 올랐다.
아직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다. 이대로 그 장소에 갈 것인지 아니면 긴자에 가서 사전에 처리하고 확인해야 할 것인지. 일기예보를 살펴보니 오후부터 비 소식이 있고 다음 날은 날씨가 좋다고 한다. 내가 가야 할 그곳은 날씨가 좋아야만 했다. 그래서 긴자에 가기로 하고 마루노우치 선에 몸을 실었다. 몇 정거장 가던 중 신주쿠교엔앞 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대로 내릴까 말까 하다가 관두었다. 만약 간다고 하더라도 그 장소에 간 다음 필요로 할 때 가면 될 일이다. 딱히 예정된 일도 급한 일도 정해진 일도 없었다.
긴자에 도착해서 일부러 조금 걸었다. 돈의 자리라는 지명 그리고 버블시대때 어마어마한 돈을 꿀럭 꿀럭 들이마시고 동시에 만들었던 역사와 달리,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지하철에서 지상까지 나는 길은 무척이나 낡고 오래되어 금이 간 곳과 보수 흔적을 보며 지상으로 나왔다. 긴자에서 처리해야 할 일을 마치고 밖을 나오니 날이 우중충하다. 적당히 길을 걷다가 아키하바라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뭘 사고 싶은 것도 전혀 없었다. 문득 배가 고파 460엔짜리 싸구려 가츠동을 먹었는데 참 맛이 없었다. 묵묵히 밥을 밀어 넣고 다시 거리로 나서서 걸었다. 단 한 컷도 촬영을 하지 않았고, 단 한 컷도 찍지 못했다.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아키하바라 중에서 가장 메마른 느낌이었다. 아는 동생을 불러내어 저녁 시간을 같이 보냈다. 조금 걷고 저녁을 먹고 다시 조금 걸어 시부야에서 후식으로 스트로베리 밀푀유와 훌륭한 맛의 커피를 먹었다. 둘의 궁합이 너무나 훌륭해서 적잖게 기분이 풀렸다.
갑자기 비가 엄청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촬영을 하는데 등 뒤에서 슬쩍 우산을 받쳐다 주었다. 걸으면서 백여 컷 정도를 촬영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숙소로 돌아가서 잠을 자고 일어났다. 이스트를 넣은 반죽처럼 몸과 손가락과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내일은 기필코 날씨가 청명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좋았다. 날씨가 좋았다. 날씨가 좋았다. 날씨가 좋았다. 날씨가 좋았다. 두렵다. 카메라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억지로 길에 올라 목적지를 향했다.
플랫폼에 내려 길에 오르니 명확한 악의와 저주를 품은 햇살이 비열하게 웃으며 내 심지 속 단단한 얼음을 기분 나쁘게 핥는다. 불쾌하다. 우에노 역까지 이동하는 전철 안에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다. 일종의 포기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에노 공원에 도착하여 묵묵히 계단을 오르니 평일임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꽉 들어찬 풍경이 나를 압도했다. 갑자기 숨이 가빠진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도망가면 될 일이다. 도망가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마침 근처 구석 자리에 흡연 장소가 눈에 띄어 담배 한 개비 분의 두려움을 태워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감싸는 시원한 바람과 티 없이 맑은 따스한 햇살과 분홍색 꼭지가 살짝 보이는 개화 직전의 봉우리 절반과 활짝 핀 벚꽃 절반이 한 그루 나무에 있었다. 그것은 겨울과 봄 사이의 엷디엷은 찰나의 경계였다. 그런 것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늘여져 있었다. 수많은 노란 머리의 사람들, 많은 중국 사람들, 막 사귀기 시작한 선명한 빛의 커플들, 느긋한 중년 커플들, 노인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부부들. 그리고 문자 그대로 평범한 하루일 뿐인, 평일 이 시간에 여기에 올 수 있는 직업 혹은 상태의 사람들이 각자의 조그만 공간을 가지고 걷고 앉고 먹고 마시고 사진을 찍고 찍히고 웃었고 때론 무표정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을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드문드문 촬영을 하기도 하고 병신 같은 벚꽃을 찍기도 하고 그 병신 같은 벚꽃을 찍는 사람들을 찍기도 했다.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아름다운 봄 이였다.
3년의 밀도를 가진 조그만 총알이 아릿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나의 뇌를 뚫고 지나가는 감촉이 느껴졌다. 조깅을 하듯 숨이 조금 가빠오기 시작했지만 멈추지 않고 걸었다. 수많은 벚꽃이 굵은 비계 덩어리처럼 나의 옆을 지나간다. 걸어도 내가 걷는 것이 아닌 나는 멈춰있고 풍경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지러웠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지만 침착하게 진정을 하고 마침 근처에 보이던 큰 나무 그늘에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태웠다. 정신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가 어디인지, 얼마나 걸어 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까와 똑같은 사람들의 풍경이 눈앞에 보였다. 며칠째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다니면서 땀이 났는지 왼쪽 어깨의 살갗이 벗겨진 것 처럼 쓰라리고 따갑다. 그것이 나를 진정 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담배 한가치를 더 태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길 중앙으로 들어서 몇십 걸음을 옮겼다. 분명 진정 했을 터이다.
메마른 전조조차 없이 눈 뜬 채 그대로 눈꺼풀에 물이 조금 맺혔다. 몇 번인가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지만, 억누르려 하면 할수록 어떻게 도저히 멈춰지지 않는다. 가다가 잠시 멈추고 사람들을 조금씩 보고 진정이 된 것 같으면 다시 걷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다 갑자기 쏟아지듯 눈물이 터졌다. 대로에서 벗어나 옆으로 몸을 피했다.
온 사방이 햇볕이었다. 태양 아래서 누런 카메라 가방과 검은 카메라를 �タ㈇플� 회색 옷을 입은 내가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몇 시간이고 울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동시에 빨리 끝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평생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콧물을 풀고 그자리에서 그대로 담배를 두 개비 피우고 높다란 쓰레기가 일사불란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할머니와 늙은 여자와 중년의 여자와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들의 수다 소리를 듣고, 할아버지와 늙은 남자와 중년의 남자와 젊은 남자와 어린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기린이 무척 보고 싶었다.
그대로 우에노 동물원까지 입구를 찾아 입장료를 치르고 멍청할 정도로 넓은 동물원에서 기린을 찾았다. 두 시간 가까이 찾았지만 결국 기린을 보지 못하고 뒷출입구로 나왔다.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30분 정도를 빙 돌아 다시 우에노 공원에 갔다. 희한할 정도로 아까와 풍경이 다르지 않다. 다시 걷고 사람들을 봤다. 그리고 같은 풍경임에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래. 이거면 된 거다. 이 짓거리를 하기 위해서 나는 온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우에노 공원을 빠져나오니 그제서야 해야 할 남은 일들이 생각이 났다. 모조리 해치운 다음 약속 장소인 신주쿠에 가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키치조지의 이노가시라 공원에도 갔다. 질척한 봄의 어두운 밤 검은색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 보트를 찍었다. 담배를 좀 피웠고 좀 걸었고 좀 마셨다.
다시 혼자가 되어 가부키쵸를 천천히 걸었다. 많은 젊은 남자와 많은 젊은 여자와 캬바쿠라에서 여자가 나와 손님을 배웅하는 모습과 흑인 삐끼들 그리고 토에이 극장 앞 광장이 휑하니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허무한 광경을 보았다. 온갖 욕망이 들끓는 최대 환락가라고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침잠한 느낌이다. 그 일대를 네 번 돌며 촬영을 하고 마지막엔 골든가로 향했다. 쇼와시대에서 그대로 멈춰 버린듯한 어둑신하고 꿉꿉한 간판과 좁은 골목과 사람들을 보고 달팽이 위에 나팔을 부는 소년의 청동상을 찍었다. 이 또한 봄이었다.
숙소에 가는 길을 일부러 빙글 돌아서 멀게 멀게 걸었다. 도착하니 거의 밤 3시쯤이 되었다. 숙소의 문을 여니 한국 여대생 한 명이 족짜 만한 테이블에서 컵 신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약간의 농담을 하고 자신 몫의 컵 신라면을 나에게 권했다. 사양하지 않고 먹었다. 고향의 맛이 나지 않느냐는 여대생의 말에 네, 그러네요. 라고 말했다. 별 감각 없이 기계적인 신변잡기를 예의를 갖춰 잠시 나누고 나는 내일 귀국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정말 아무래도 상관 없을 이야기를 몇마디 나누고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말을 들은 후, 다시 숙소에서 나가 담배를 몇가친가 태웠다. 당장 변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딱딱한 카스테라 같은 외로움이 발목 복숭아뼈 정도까지 잠겼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바로 잠들지 못하고 몇 번이고 뒤척이다가 잠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하고 아침을 먹는 뒤, 귀국을 위한 사사로운 절차를 빈틈없이 클리어 해나갔다. 작업실의 철문을 열고 도착하니 저녁 8시 가까이 되었다. 카메라 가방과 배낭과 카메라를 내려놓고 한동안 몸을 의자에 길게 뉘인 체 눈을 감았다. 무척 피로했다. 얼만가 지난 후 먼저 고개를 들고 뻐근한 뒷목을 풀고 몸을 일으키고 다리에 힘을 줘 일어나서 카메라 가방을 정리하고 렌즈와 카메라를 정리하고 배낭을 정리해서 넣어두고 빨래를 하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달라지지 않았다. 동시에 많은 것들이 변해버렸다. 너무나 소중했던 것이 변해버렸다. 9년 혹은 3년이라는 것은 순간이기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너무나 긴 시간인 것이다.
전등을 끄고 몸을 침대위에 던져놓고 어둠속에서 천장을 잠시간 보았다. 새벽의 창문 밖에서 세어들어오는 불빛이 천장에 묻어서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몇분인가 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 시기가 되면 몸도 마음도 반쯤 물 먹는 스펀지처럼 된다. 봄이 점점 다가오는 소리, 봄이 바로 문턱에서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문틈으로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생생하다. 이젠 익숙한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괴로움이 상쇄되거나 하는 일 같은 건 없다. 난폭하게 지축을 뒤흔드는 전차 궤도의 바로 수센치 옆에서 몸과 마음을 웅크리고 눈을 감는 것.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앞으로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 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런지 난 쉬이 상상되지 않는다.
비가 내렸다. 탁한 먼지 냄새가 나는 축축하고 약간 서늘한, 하지만 명확한 악의를 품은 부드러운 비가 내렸다. 이십 미터 즘의 거리에서 들리는 버스의 굵은 엔진 소리와 타이어가 물을 찢어내는 소리와 크락숀 소리가 들린다. 대기 중의 공기가 혜성처럼 움직이는 듯한 소리다. 검은색의 차분함 속에선 너무나 크게 들리는 소리다.
그저 이 기다림이 어떠한 결론이 되던 빨리 끝나버렸으면 하는 바램과, 제발 오지 않았으면 하는 두려움이 함께 있다. 천천히 천천히 시간은 흐르고 있고, 교활하고 영민하게 시간은 흐르고 있다. 문득 내가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귀 기울여 들을 것이 아니다. 바램도 기쁨도 엷은 회색의 그림자 같다. 걷고 보고 먹고 앉고 몸에 나쁜 담배를 태워가고 입은 다물고, 결코 느끼지 못할 지구의 자전을 감각 해보려 하는 것과 비슷하다.
간혹. 문득 상쾌한 바람 자락이 뺨과 귀를 스치는 때가 있다. 그때는 눈을 질금 감고 싶어진다. 눈알이 빠져라 싶을 정도로 감고 싶다. 눈을 뜬 이후의 광경이 나는 두려운 것이다. 평생 눈을 감고 살 수는 없다. 눈을 감았을 때와 떴을 때의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그래 봐야 둘 다 나의 착각과 오해일 뿐이다. 조금 더 겸손하게 말하자면 찰나의 진심 정도인 것이다. 파편화된 조각을 주워서 녹색 접착 테이프 따위로 얼기설기 조악한 모양을 만들 뿐이다. 손가락 하나로 스윽 밀면 모양이 일그러질 그런 것을 계속 반복할 뿐이다. 어느 식으로든 자신이라고 하는 왜곡된 만화경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 따위 없다고. 그럼에도 사랑 밖에 없다고. 아니 어쩌면 이것마저도 그리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탄소 8개, 산소 11개, 질소 1개로 구성되어 있음.
끓는점은 섭씨 195도 이며 용해 물질은 물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으며
비릿한 생선과 유사한 냄새가 난다.
나는 제법 어렸을때 부터 초코렛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단맛이 나는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였고 오히여 쓴맛, 짠맛을 좋아하는 쪽이기도 하지만, 초코렛을 그리 많이 먹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간혹 머리가 지끈 거리며 아플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선, 나름 시절 좋았던 한때 한국에서도 오디오를 의욕적으로 설계 생산하던 때가 있었다. 그 중에서 한국 스피커에 있어서 나름의 자존심이라 불리웠던 동양 마샬의 M-104 스피커가 있다. 기본형은 당시 유행했던 4웨이 페이퍼 콘 시스템으로 네트워크의 주파수를 설정 할 수 있었고 슈퍼 트위터까지 달린 구성으로 지금 다시 봐도 나름 호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어딘가 JBL이라던가 야마하의 향기가 적당히 섞인 이도 저도 아닌 어떻게 보면 지극히 한국적 정서의 모습이였는데, 이 조합이 의외로 좋았다.
이 스피커와 함께 한 시간은 15년은 족히 넘었지 싶다. 절망의 끝에서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에, 있는듯 없는듯 항상 나를 지켜봐주었다. 기분이 좋을때, 혹은 외로움의 심지가 딱딱해져 화가난 듯한 웃음이 터질때도 항상 묵묵히 나와 함께 있어 줬다. 정말 많은 음악을 들었다. 크기가 제법 있는 편이였기에 쎄멘 보로꾸를 밑에 고여놓고, 가로로 눕혀서 의자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거기에 귀여운 여자 아이를 앉혀놓고 일부러 베이스가 크게 울리는 음악을 틀어놓고는 표정이나 행동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기도 하고 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에 천장 위에 달아놓고 음악이 위에서 쏟아질듯한 위치에 놓고 사용한 적도 있었다.
어떤 식으로 놔두어도, 어떻게 사용하더라도 언제나 항상 묵묵히 그 자리에 있는듯 없는듯 나를 지켜봐주었다. 어쩌면 이 녀석 때문에 나도 인식하지 못한체, 목숨을 구제 받았었던 일이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소리 자체는 대단치 않았다. 적당히 뭉글하고 적당히 공기감이 있고 적당한 심지가 있었고 적당한 따뜻함과 적당한 위안과 적당한 적적함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네트워크 조정 노브에 탄소가 끼고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음에도 일부러 딱히 손대지 않았다. 제일 먼저 슈퍼 스위터가 침묵했다. 점점 고역대의 소리가 뭉글어지면서 뭉툭하게 익은 홍시 처럼 소리가 변했다. 나는 이것이 좋았다. 문자 그대로 24시간 음악을 틀어놔도 피곤 하지 않았다. 라운지 음악의 BGM처럼 들릴때가 있는가 하면 때론 아무런 예고 없이 나를 울게 만들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나와 함께 보냈다. 굳이 고치고 싶지 않았고 더 좋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럭저럭 십-사오년을 함께 지냈을때, 일년 반 동안 벼르고 벼르던 새 스피커를 들였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만듦새가 무척 뛰어나며 포커스, 스테이징, 다이나믹스, 콘트라스트, 리스판스, 토널레인지 그 어느 것 하나 이 가격대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인 톨보이 스피커였다. 대단히 만족 하였다. 게다가 나는 톨보이를 좋아한다. 비열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앰프 였다. 오랜 친구와 후배의 호의로 간만에 닥치는데로 포식을 했다. 다양한 앰프를 물리고 감을 다시 찾아갔다. 흥분되고 흥미로우며 즐거운 시간이였다. 그렇게 몇개월의 시간이 따끔거리며 지나갔다.
어느 한날, 문득 생각이 들어 무척 오랫동안 나와 함께 했던 스피커의 네트워크 주파수 노브에 끼어있던 탄소를 털어내었다. 오랫동안 반쯤 뜨고 있던 눈을 하고 있던 부드러운 표정의 스피커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듯 했다. 그것에는, 그 어떤 슬픔도 없었다. 적잖이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초연함에 순간 마음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언제나, 늘 나를 지켜봐주고 있었다. 수 많던 일들이 나를 덮쳐오고 뚫고 지나가고 스쳐 지나간들 그는 있는듯 없는듯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그 어떤 슬픔도 없는 초연함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음악을 듣고 공간을 들었다. 한 동안 눈을 감고 또 감고 또 감았다.
어제 이 스피커를 장터에 내놓았다. 진작 장터에 내놔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생각을 실제로 실천에 옮기기 까진 거의 반년을 소모해야 했다. 단순히 정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직 새로운 스피커와 공간이 서로 충분히 녹아들지 못했다라는 느낌이 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하다 못해 다시 도망칠 익숙한 장소를 마련해두고 싶다는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내놓은지 몇시간 되지 않은 오늘 바로 팔렸다. 약속 시간이 되자 다대포에 살고 있는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작업실에 왔다. 테스트라는 명목하게 마지막으로 팔리기 전, 이 소리를 다시 가슴속에 담아두었다. 탄소를 털어내었다 한들 그래서 겨울 잠에서 깨어났다 한들, 결국 이런 버릇, 저런 버릇이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간의 물살 만큼 숱하게 변해왔지만, 결국 가슴속에선 변하지 않는 것이다. 몇가지인가 음악을 계속 들었고 볼륨을 조금씩 높여갔다. 그리고 이 녀석이 제일 힘들어 하는 음악을 큰 볼륨으로 몇곡인가 들었다.
구매하려 하는 중년의 남자에게 커피를 내주고 몇 가지인가 이야기를 하고 음악을 몇곡 더 들었다. 갑자기 팔기가 싫다. 저 안팔겠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그 순간 ‘이제 됐습니다. 무척 마음에 듭니다.’ 라고 남자가 말했다. 나는 다행입니다. 라고 화답을 하고 상대방에게 약간의 부담을 주기로 결심했다.
사실 이 스피커는 이럭저럭 이십여년 가까히 저와 함께 했던 스피커 입니다. 부디 잘 사용해주세요.
스피커를 차에 태우고 마지막으로 그릴과 몸체를 손에 대고 잠시간 온기를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주인은 이 스피커를 잘 사용해줄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시 한번 남자에게 이야기 했다. 모쪼록 잘 사용해주세요.
작업실에 돌아와서 몇개월 정도 지난 새 스피커로 다시 음악을 들었다.
포커스, 스테이징, 해상력, 다이나믹스, 콘트라스트, 리스판스, 토널레인지 그 어느 것 하나 이 가격대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인 톨보이 스피커다. 일년 하고도 반년 동안 고민했던 결정체라 할만 하다. 대단히 만족 스럽다. 그 바로 옆, 옛 스피커가 있는 자리가 유난히 크게 비어 보인다.
왼쪽 아래 가슴에서 ‘우-웅’ 거리며 멍울이 지는 소리가 들렸다.
렌즈의 포커스 홀딩 고무링이 늘어난지 좀 되었다. 이런건 성격상 제법 참기 힘들어할법도 한데 결국 이리저리 쓰다가 결국 A/S센터에 전화를 넣어 부품을 주문하고 오늘 교체를 했다. 35mm f1.4 시그마 렌즈. 후드가 부러지고 포커스 홀딩 고무링이 늘어나도록 쓴 렌즈는 처음 인듯 하다.
부품을 기다리는 시간은 일주일 정도, A/S센터에서 접수하는데 다시 15분 정도 기다린후 실제 교체하는데는 불과 2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야 단순한 고무링 교체 정도이니 시간이 많이 걸릴 일이 없다. 나는 이런 느낌이 좋다. 이런 저런 이유로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한들, 그래서 준비를 마치고 실제 작업을 할때 한번에 착착 되어가는 이 느낌이 좋은 것이다. 렌즈가 다시 한번 새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메뉴얼 포커싱을 할때 흐물거리면서 무척 기분이 우울해지는 느낌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타이트하게 감겨있는 포커스 고무링은 어딘가 내 마음 한구석에 묽게 남아있던 덩어리를 착착 빨아 당여주는 듯 했다. 비록 내 돈을 내고 받는 서비스지만 기분이 좋아서 예를 표했다. 신세졌다. 감사히 잘 쓰겠다. 라는 말을 하고 A/S센터 사장님도 기분 좋게 화답해줬다. 한번 더 기분이 좋아졌다.
일을 마치고 나오니 비가 왔다. 갑자기 미국에서 비를 맞았던 일이 생각 났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캘리포니아에는 비가 온다고 한들 우산을 쓰는 사람의 비율은 한없이 낮았다. 일본만 해도 비 맞으면 감기 걸린다고 법석을 피우는 경우가 많은듯 한데, 어째서 여기는 그렇지 않을까. 라는 아무래도 상관 없을 것 같은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엷은 빗방울이 머리카락 사이를 보슬보슬 훑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작업실에 돌아오는 동안 이어폰에선 몇 곡의 음악이 지나갔다. 허감독의 봄날은 간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비치보이스의 God only Knows, 벨벳 언더 그라운드 Pale Blue Eyes, 카즈히토 야마시타의 무반주 첼로 기타. 계통이 전혀 없는듯 어딘가 끈질기에 계통을 관통하는 음악을 들으며 작업실의 철문을 열고 의자에 앉았다.
비가 오는날의 소리는 맑을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밀도가 높아지고 냄새가 쉽게 느껴지고 무거워지고 그리워진다. 내가 그리워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생각하곤, 이내 우울해져서 담배를 한대 피우고 오줌을 싸고 남아있던 식은 커피를 마셨다. 살짝 짠맛이 났다.
강의를 마치고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중에 모친에게 전화가 왔다. 일생 동안 나의 혈육인 부친과 모친이 나에게 걸었던 전화 중에는 그리 기쁜일이 있었던 기억이 없다. 기억이라는 것은 오묘해서 내 멋대로 그렇게 정의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때론 좋은 기억이 있었을법 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더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핸드폰을 가진 이후, 혈육의 이름이 찍혀 있는 전화를 언제나 받을 수 있게 된 이후로 정말 좋았던 기억 따위 없었다. 혹은 당장 나쁘진 않았으나 언제나 나쁜 일에 대한 예고가 되었다.
그 이름 석자가 핸드폰에 비춰질때마다 언제부턴가 한숨이 나오면서 받을지 말지를 생각하지만 혹여나 어떤 사고 같은게 난건 아닐까, 혹시나 내가 이 전화를 받지 않음으로 인해 뭔가 일이 더 잘못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매번 전화를 강제로 받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제 부터인가 한숨과 동시에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감정을 죽인체 조용하고 담담하게, 심지어 극도의 짜증이 날때 마저도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잔인한 말을 하게 되곤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였다. 세상은 여전하고 역사는 반복되며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한땐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 극복 할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그렇지 않았고 내가 무엇을 시도하고 어떤 노력을 십여년 이상 했다 한들 티끌 하나 바뀌는 일 따위 없었다. 몸이 노쇠해지고 기운이 빠지고 외견이 쭈그러들고 얼굴이 찌그러지고 팔과 다리가 쇠젓가락 마냥 가늘어지고 삶의 고통에 찌들대로 찌들은 육신에서 풍겨오는 노인의 악취가 언뜻 나기 시작했다 한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부친은 얼마전 또 사고를 쳤다. 심지어 그 사고의 패턴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폭언과 폭력을 당하고 거기에 더해서 피해망상 초기 증세가 더해진 모친은 그 사고와 동시에 산더미 같은 절망감에 또 다른 절망에 씌워졌다. 그리고 가스렌지에 불을 지핀 뺀지로 자신의 이빨을 뽑고, 삶의 행복이나 의미, 목표 같은 문장 따위 사치인지 오래다. 저 양반 내가 설겆이 하고 가야 하는데, 라고 자신이 살아서 죽기전 해야할 마지막 남은 일은 사신이 되는 일 이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힘을 잃었다.
육친의 전화를 끊고 난 이후엔 예외 없이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리고 동시에 신문지의 잉크를 졸여놓은 듯한 냄새가 마음에서 올라오기 시작해서 소뇌와 대뇌를 거쳐 코끝으로 진짜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어폰을 다시 귀에 박아두곤 입을 닫은체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들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문을 열고 꺼진 불을 켜고 가방과 카메라를 내려놓고 쌀을 씻고 빨래를 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해서 버리고, 녹색 벽을 잠시간 보고, 담배를 피우고 의자에 앉았더니 기묘하게 몸이 춥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걸어두었던 세탁기에서 빨래가 다 되었다는 삐-ㅂ 뽀 삐-ㅂ 뽀 소리가 건조하게 들렸다.
난 술을 무척 좋아한다. 단 많이 마시지는 못하고 맛을 즐기는 쪽이다. 그 중에서 맥주를 참 좋아하는데 얼린 잔을 좋아하지 않는다. 얼린 잔에 맥주를 부으면 풍미가 약간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맥주나 너무 차가우면 목넘김이 시원하고 덩어리감 넘치는 에너지가 있어서 간혹 그런걸 원할때가 있긴 하지만..
아무튼 너무 차가운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맥주의 향을 맡을때 올라오는 부드러운듯 향기 흐름의 형태는 살짝 야한 느낌이 드는게 좋다. 술로 빚은 향수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 감각은 얼린 잔과 지나치게 차가운 맥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몇년 전 아주 무더운 여름,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날. 살짝 살얼음이 생기는 정도 까지 맥주를 차게 하고, 굳이 옥상에 태양을 마주보고 왼손을 허리춤에 차고 스포츠 드링크 마시듯 맥주를 마신적이 있다. 순간 목구멍이 마비가 될 정도의 차가운 느낌이 나는게 좋았다. 그리고 그 맥주는 내 일생을 거쳐 맛있었던 맥주 베스트 5에 드는 맥주가 되었다.
결국 자신에게 모자란 것을 채우는 그때의 상황이, 기억과 의미와 가치를 만든다. 날이 조금씩 싸늘해진다.
무척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각자의 돌아가는 길로 오르니 일요일이 끝나고 월요일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어딘가 단단하게 굳어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바로 돌아갈까 하다가 무슨 심산이었을까, 서면에서 작업실까지 걷기로 했다. 바람도 적당히 부드럽게 시원했다. 촬영을 하면서 조금씩 걸었다. 건물의 후미진 곳에서 반사된 빛이 마치 노란 그림자처럼 보였고 기름에 쩔은 주유소 바닥의 페인트가 일어난 것을 보고 아직 행선지를 명확히 하지 못한 이십대 말 커플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모텔로 가득 차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네온 사진의 우-웅 거리며 지직거리는 소리. 후미진 뒷골목을 지나 거주구가 있는 곳으로 흘러들어왔다. 나트륨등의 빛이 닿지 않는 길가에 어두운 파라솔과 테이블 그리고 여자 둘 남자 하나가 이야기하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그중 한 여자는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 보였으나 분위기를 보건데 중재 역할을 하는 여자의 속마음이 얼핏 보이는듯했다. 흔한 이야기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듯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고요하다. 이십 분 정도 더 걸었을까, 살짝 뿌연 쇼윈도우에 색온도가 맞지 않아 눈을 쏘는 LED바 조명을 사이드로 가득 달아놓은 모형점 같은 게 보였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개인 모형 작업실처럼 보이는데 살짝 안을 살펴보니 프렌차이즈 도시락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스포츠머리의 중년 남성이 무언으로 앉아 있었다. 어딘가 벽 너머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손을 무겁게 옮겨 잔을 들이키기도 한다. 아무도 없었다.
나도 도로 위에서 담배를 꺼내 한대 태웠다. 귀뚜라미가 무척 시끄럽다. 그믐달이 하얗게 질려서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내가 밖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중년 남성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다시 걸었다. 문득 굵고 무딘 송곳이 심장에 억지로 쑤셔박힌 듯한 통증이 왔다. 외로웠다. 여자 생각이 났다. 마치 다른 행성의 생명체처럼 찰랑거리고 부드러운 살결과 냄새가 생각났다. 10초 정도 그러다가 입술을 안으로 당기고 힘을 주고 짧은 한숨을 쉬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었다.
바로 얼마 뒤 맞은편에서 순도 100퍼센트 중년 불륜 커플이 걸어온다. 마침 옆에 있던 대형 마트 앞에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 산이 보였다.
그러다 시골 읍내 같은 길이 보인다. 이 짧은 몇 블럭이 마치 세상의 시작과 끝 같은 광경이다. 어디에도 모텔은 가득했다. 생긴 지 삼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OB집이 있었고 맞은 편에는 도무지 이 자리에 있어선 안될 것 같은 느낌의 바다장어 집이 있었다. 불이 켜져 있었으나 영업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지나가며 보니 50대 후반쯤 중년 남성이 얼굴이 점잖게 붉어진 체 소주를 마시며 초점 없이 테레비를 보고 있다. 여기 사장님인듯하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밤 2시 30분이 넘은 시각에 어찌 된 연유로 이러하고 있을까를 잠시 생각하고 다시 길을 옮겼다.
수많은 쓰레기가 도처에 있었다. 어디선가 멀고 굵게 When the night has come 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Ben E. King이 부른 오리지널이 아닌 카피 밴드 노래다. ‘밤이 되어 어둠이 찾아오면, 달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빛’ 이라는 가사를 듣다가, 이쯤 되니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쳐있는 것 같다.
수많은 교회가 있었고 수많은 병원과 수많은 장례식장이 있었다.
진배기 원조 할매국밥 간판에 다시 원조 글자를 넣어 세 번이나 강조한 돼지국밥집을 지났다. 정신 나간 할머니가 주차장 난간에 걸터앉아 혼잣말을 하다가 맥락 없이 자판기 커피를 마시다 이내 민요 한 곡조를 부르는가 싶더니 조용하다가 다시 혼잣말을 한다. 날이 제법 싸늘하다.
길 건너편 전광판에선 행복하세요. Happy Time. 힘내세요 Happy Time이라는 글자가 강요하듯 위아래로 중량감 있게 흔들며 반짝인다. 바로 눈앞에 또 모텔에선 ‘깨끗하’ 까지 글자가 멈춰있다가 시설을 자랑하는 내용이 흐른다.
노스딸기야라 적인 러시아어와 한글이 적힌 곳을 지났다. 노스텔지어라는 뜻이다. 수많은 중국어와 키릴문자가 혼재되어 있다. 증명여권사진, 필방이 있는 곳까지 걷는 동안 러시아 아가씨 필요 없냐고 하는 사람을 세 명 만났다. 부드럽게 웃으며 목례를 하고 걸었다.
지하철 환풍구에 걸터앉은 반 대머리에 묽은 선글라스를 끼고 면바지에 붉고 검은 가로 스프라이트의 웃옷을 입은 중년이 하릴없이 앉아 있다. 옆에는 조그만 가방이 있었다.
4시간 정도 걸어 작업실에 도착할 때쯤 그믐달이 검은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았고 하늘이 무척 어두웠다.
아마 내일도 혹은 다음 주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