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의 일기, 동물원에 다녀오다.

그간 아주 오랫만에 동물원엘 다녀왔다.
이제 곧 폐쇄될 동물원의 퇴락한 모습은 왠지 보기에 훈훈한
느낌이 든다. 그래.. 훈훈한 느낌.

축 쳐저서 눈알이 빠질것 같은 나태한 코끼리의 모습이라던지

몽뚱아리는 상처투성이에 한쪽눈은 실명되고 한쪽눈은 병에 걸려서
썩어가는 중인 물개의 모습이라던지.

깽깽거리며 눈알을 부라리는 원숭이라던지.

세상만사 다 제쳐둔듯한 염소때라고 생각했는데 과자 몇줌에 한꺼번에
달려드는 모습이라던지.

엄청나게 거대한 버팔로의 썩은 슬픈 눈이라던지.

작동을 이미 오래전에 멈춘듯한 소형 메리 고 라운드 라던지.

녹이 쓸데로썰어 힘줘서 치면 부서질듯한 철조망 이라던지

나태한 모습의 호랑이, 사자의 모습에서… 아직까지.. 아직까지…
‘눈’만큼은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모습이라던지.

멍청한 느낌의 공작새라던지..

이 모든것이 잿빛 하늘 (오늘 날씨는 무척 어두웠다.) 밑에서
모노톤으로 보였다.

난 이런 종류의 동물원을 좋아한다.

에버랜드 같은 밝고 활기차고 뭔가 상당히 정교하게 시스템화
되어진 동물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 동행인 찍사 한명과 모델 한명을 데리고 나섰다.
애초에 내가 생각했었던 것은 그런 풍경속에 여자를 넣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그 동물들의, 그 건물들의, 그 울타리(우리)의 에너지가 너무나도
강력했다. 난 그것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했다.

도무지 제대로 찍힌것은 단 한장도 없는듯 싶다.

내가 바라는 이미지는 ‘전혀’ 나오지 못했다.

오늘 찍은 컷수는 총 180컷…

빙글빙글 헛돌기만 한 180번의 셔터 누름.
하지만… 이런것도 좋다고 난 생각한다.
이런 느낌도 좋다… 아아… 정말이지… 좋다.

어찌되었건 나의 말과 지시, 그리고 느낌을 잘 잡아주는
좋은 모델이 있어서 좋았고
나와 동행으로 온 찍사 한명도 좋았다. 그는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나로써는 최선을 다했다.

나름대로의 선물..이라는 의미.

이 동물원이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난 무척…
‘슬프다’라는 단순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비록 시설에 비해 입장료가 비싸더라도…. 왠지 어느 무엇이
무너저버린 이 동물원을, 퇴락한 이 동물원을… 난 좋아한다.

추신 : 이번 여름을 난 고대하고 있다. 태풍이 불어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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