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이 있고 그래서 다시 좋은 날이 오다가 나쁜 날이 오기도 한다. 그리고 때론 그 나쁜 날이 기대보다 오래가는 경우 또한 흔하게 있다.
항상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서 봄은 언제나 좋지 않았다. 나름 좋은 일들이 생기는가 싶으면, 밝은 길가에 난 조그만 어두운 귀퉁이에 숨어있다가 그것은 나를 항상 덮치곤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좋은 일 따위는 없는거지\’
잠시간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건 실로 맞는 이야기다. 애초에 좋은 일 같은건 있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 느끼기에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한들 딱히 법석떨고 유난 떨면서 자랑할 거리가 못된다.
단지, 좋은 사람과 함께 묵묵히 술을 마실 수 있는 것 정도 만으로 그것은 좋은 일. 이라고 그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 또한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이라는 것은 실지 존재하고 또한 그렇기에 나쁜 일 또한 존재하기 나름이다.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아마 우리네 인생은 견디기 수월치 않을듯 싶다. 희망이라는 것은 희망으로만 멈추었을땐 덧없음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또한 그것이 아픔이나 좌절로 흘렀을땐 희망 그 자체가 원망 스럽게 되고 마는 것이다.
좋았던 것 또한 후일에 나쁘게 되었을 경우 후회하지 않는다고 격양스럽게 말한다 한들 그 속엔 이미 좋았던 것들에 대한 원망은 항상 어느 정도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이렇게 움직여지는 이유는 \’기억\’ 때문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대체로 자기 좋을대로의 기억으로 변형이 무쌍하여, 자신을 치유하게도 썩게도 만든다.
나쁜 기억도 가슴 아픈 기억도 괴롭고 외로워 새벽 2시 48분의 새벽길을 걷게 만들었던 짓찢겨 낸 빛망울이 축축한 기억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날카로웠던 그것은 무디어지고 반짝이던 검은 날에 피를 담뿍 머금었던 자리엔 세월과 모레와 바람이 씻기어내어 마침내 추억이라고 말해지는 자기 좋을대로의 기억으로 정리 되어 버린다.
때론 그것이 되지 않는 경우 또한 있어서 일생의 트라우마 같이 평생 괴롭힐 것 처럼 득의양양하게, 마치 늙고 거죽만 남아있는 악취나는 늙은이가 열세살 소녀의 목을 소리 없이 슬그머니 조이듯 따라다니는 것이다.
어느 쪽이 되었던 그 사람을 이루고 행동하게 하며 판단하게 하는 것은 기억이다. 태어날때 유전자로 만들어지듯 살아가며 기억으로 만들어지는 인생은 마치 원죄와 가깝다.
정리되어버린 기억도 언젠간 사라지게 되고 그것에서 부터 자유롭다고 스스로 느끼는 순간 그것은 다시 옥죄여 온다. 기억은 인식하지 못할때 해방 된다. 그것은 참 고약한 심보의 애늙은이 같은 것이다.
난 기억력이 대단히 나쁘다. 단순한 건망증을 떠나서 가끔은 내 머리가 심각하게 손상을 입은건 아닌지 싶을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다. 아주 어렸을땐 기억력이 대단히 좋아서 한번만 들어도 그것을 다 기억해내곤 했다. 그리고 그때의 뇌속의 감각을 난 지금도 생생히 되새겨 볼 수 있다. 뇌가 부드럽게 꿈틀하면서 그 속에서 저절로 두루마리가 쾌활하게 펴지듯 기억 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 부터인가 기억력이 대단히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나의 게으른 품성의 탓이 제일 크고, 그 자체의 팩트 보다는 인과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사고 시스템 탓도 크겠지만 단순히 그걸로 설명하기엔 언제나 부족했다.
이런 증상은 대략 팔년 전 즈음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 원인을 알게 된 것은 몇년 전 즈음이다.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원인을 알게 된 이후로 난 기억력이 나쁘다는 것이 참 좋았고 편했다.
물론 세상엔 공짜 따위 없다. 그것을 댓가로 난 많은 것을 뺏겼다. 굳이 이것을 고치고 싶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강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삼년 전만 하더라도 그렇다고 느꼈다.
당연하지만 그런식으로 강해진 다는 것은 자신의 무엇을 팔아넘기고 얻어낸 순수한 그 무엇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은 나를 무척이나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강함을 처음부터 끝까지, 싸그리 부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의 약함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납득해야만 했다.
봄이 되면 내 몸속에 있는 기억을 드르륵 소거해버리는 세단기가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내 손 위에 가만히 올려놓고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봄엔 언제나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면 세단기는 몸을 비틀거리면서 꾸역꾸역 세단해버린다.
그렇게 잘게 잘게 잘려진 기억들은 바스켓으로 떨어지고 그것을 꺼내어 아무리 짝을 맞추려 해도 대단히 힘들어진다.
때론 내가 그러한 것을 강하게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토하듯 집어삼키고 몸을 비틀며 꾸역꾸역 세단하는 것을 망연하게 보고 있으면, 나라고 하는 인간은 정말로 지독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낀다.
봄엔 모든 것들이 새로 움트는 계절이다. 죽음의 수면의 외로움의 반성의 계절이 지나고 영겁의 세월이 시작되고 그것으로 부터 모든 것이 끝난다. 암컷들은 발정기가 되고 수컷들은 놓치지 않는다. 나도 한땐 이 계절을 좋아했었다. 겨울은 너무나도 춥고 고통스러운 계절이다. 그래도 의지 할 수 있는 영혼과 살이 있으면 오히려 그런 겨울 이기에 더 따뜻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견딜만 했고 어떨땐 겨울을 찬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봄이 오면 모든 것들이 굳은 땅에서 솟아나듯 나의 기억들도 솟아 오른다.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지만 막으려 하면 할 수록 기억이라는 것은 구질구질한 애늙은이 같아서 더더욱 나를 괴롭히게 된다.
숨을 멈추고 오직 여름이 오기만을, 온 몸과 마음을 고아 처럼 잔뜩 웅크리며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할 것인가. 언제까지 나의 업보는 계속 될 것인가. 언제쯤이 되어야 나는 이런것에 대하여 묵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너무 민감해요. 물론 그래서 좋지만, 너무 힘들어요\’
내가 민감한것 이라기 보다는 네가 둔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그 말은 절반 이상의 타당성이 있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나의 민감함은 어떻게 고칠수도 바꿀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다. 사진을 찍어가며 몸에 흡수되어버린 그것은 어설픈 낙인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나름대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을 익히게 되었고, 아무리 말하고 싶어도 무심한듯, 모르는 듯 할 수 있는 요령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었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는 행동이나 공기, 표정으로 나도 모르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 까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적어도 나라고 하는 인간의 그릇으론 그것까지 어떻게 통제 할 수 없다.
삼월이 지나고 사월의 말미에 아직도 봄이다.
그리고 날 민감하다 말했던 그말을 들으며 아주 아주 예전의 그녀도 나에게 같은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봄을 증오 한다.
그리고 봄을 증오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증오스럽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