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핀.

중학교 때부터 다녔던 단골 화방에 들려 콜크가 발린 있는 두터운 보드를 한장 샀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 라기 보다는 내가 콜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골고루 압력을 받아 평면도가 높은 가공이 잘 된 콜크는 손끝으로 스쳐지나가는 느낌도 좋지만, 햇볕을 받았을때 보여지는 아주 엷은 표면의 질감은 때론 뭐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느낌을 갖게 한다.

작업실 입구 벽면쪽 (내가 항상 앉아있는 맞은편)에 콜크 보드를 붙이고 나니 알게 되었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빈 평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거기엔 뭔가가 조금씩 채워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채워졌으면 하는 바램이였다. 단순히 돈으로 해결 될 수 없는, 시간이 충분히 들어야만 하는 것들이다.

시간이 흘러 한장의 콜크보드는 다 차버렸고 이어 두번째 콜크보드를 그 위에 붙였다. 공간이 한결 넓어졌고 답답한 느낌은 조금 사라졌다. 그래, 공간이 더 생겼으니 붙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아주 가끔 암실에서 미스 프린트가 난 조그만 내 사진들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체취가 남겨져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 연결 되어 나에게 와준 것들이며 그것들은 그렇게 나의 일부로 녹아내려갔다.
당연한 이야기다.

어느덧 제법 시간이 흘러 남아 있건 공간이 거의 다 차버렸다. 한장을 더 구입해 세번째 콜크 보드는 아에 입구 문쪽에 붙였다. 다시 공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 동안 붙어 있었던 것들의 배치를 다시 하였다. 전체적으로 너무 꽉 차보이지 않도록, 그러나 너무 비어 보이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조정하고 아무렇게나 붙인듯한 느낌이 들도록 비뚤비뚤 붙이기도 하였다. 한결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저렇게 다섯번째 콜크 보드까지 왔다. 처음 붙였던 날로 부터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많은 것들이 보드에 붙었다. 더 이상은 붙일 장소가 없어서 콜크 보드를 더 붙일 수 있는 곳을 생각 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리곤 몇 몇 것들은 보드에서 떼어지고 나선, 휴지통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새벽 폐지를 모으는 사람에게 수거되어 갔을 것이다.

시간은 더 흘러 작업실에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것이 옮다고 판단했으며 그것을 납득 했기에 보드에 붙어있던 것들을 하나씩 떼어 냈다. 아트핀을 먼저 뽑고 붙어 있던것들을 떼어낸다. 그렇게 벽에 붙어 있던 콜드 보드 네개를 떼어냈다.

많은 것들이 재활용 통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99개의 아트핀만 남았다.

본래 투명한 색이였을 아트 핀은 군데 군데 먼지가 묻어있고 담배진 때문에 연갈색으로 세월만큼 불투명 코팅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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