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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던 봄이 끝났다. 골골히 들어찬 둔통이 아릿하게 남아있지만 그래도 봄이 끝났다. 그저 부드럽게 눈을 감고 그대로 길고 긴 잠을 잘 수 있으면 했다.

밤의 길이가 짧아졌다. 조금 더 잘 수 있게 되었다. 적당히 습도가 낮을때의 태양은 제법 나쁘지 않다. 걷고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아무 의미없는 하늘과 구름을 잠시 보았다. 좋았다.

날이 흐리다 비가 왔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살짝 열린 창문에서 비가 보인다. 먼지가 뭍어있는 검은색 블라인드엔 물방울이 단 한톨도 묻어있지 않다. 20초 동안 물끄러미 처다보다가 커피를 끓였다. 너무 먼 세계로 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목구멍에 붙어있는 성대부터 발톱까지 흐물거렸다. 잠시 누워 습기로 두꺼워진 천장을 보고, 무겁고 두꺼운 회색 공기를 뚫어지게 봤다. 이대로 영원히 눈을 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일어나 식은 커피를 마시고 셔플 모드로 음악을 틀었다. 아주 미끈하고 신경질적인 느낌의 아주 잘생긴 젊었을적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평균율 클라비어 1권의 첫번째 트랙이 나왔다.

가슴속에서 소리없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동자가 뜨겁게 시큰하다가 침착을 찾고 다시 조용히 돌아갔다. 무겁고 두꺼운 회색 공기속에 음악이 섞여들어갔다. 큰 종이에 나비 박제용 핀으로 고정되어 박힌 느낌이다. 화장실에서 똥과 오줌을 싸고 담배를 피우고 수염을 조금 자르고 물을 마시고 적당히 아무 포르노를 틀어놓고 자위하고 입을 다물고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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