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각자의 돌아가는 길로 오르니 일요일이 끝나고 월요일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어딘가 단단하게 굳어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바로 돌아갈까 하다가 무슨 심산이었을까, 서면에서 작업실까지 걷기로 했다. 바람도 적당히 부드럽게 시원했다. 촬영을 하면서 조금씩 걸었다. 건물의 후미진 곳에서 반사된 빛이 마치 노란 그림자처럼 보였고 기름에 쩔은 주유소 바닥의 페인트가 일어난 것을 보고 아직 행선지를 명확히 하지 못한 이십대 말 커플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모텔로 가득 차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네온 사진의 우-웅 거리며 지직거리는 소리. 후미진 뒷골목을 지나 거주구가 있는 곳으로 흘러들어왔다. 나트륨등의 빛이 닿지 않는 길가에 어두운 파라솔과 테이블 그리고 여자 둘 남자 하나가 이야기하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그중 한 여자는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 보였으나 분위기를 보건데 중재 역할을 하는 여자의 속마음이 얼핏 보이는듯했다. 흔한 이야기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듯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고요하다. 이십 분 정도 더 걸었을까, 살짝 뿌연 쇼윈도우에 색온도가 맞지 않아 눈을 쏘는 LED바 조명을 사이드로 가득 달아놓은 모형점 같은 게 보였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개인 모형 작업실처럼 보이는데 살짝 안을 살펴보니 프렌차이즈 도시락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스포츠머리의 중년 남성이 무언으로 앉아 있었다. 어딘가 벽 너머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손을 무겁게 옮겨 잔을 들이키기도 한다. 아무도 없었다.
나도 도로 위에서 담배를 꺼내 한대 태웠다. 귀뚜라미가 무척 시끄럽다. 그믐달이 하얗게 질려서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내가 밖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중년 남성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다시 걸었다. 문득 굵고 무딘 송곳이 심장에 억지로 쑤셔박힌 듯한 통증이 왔다. 외로웠다. 여자 생각이 났다. 마치 다른 행성의 생명체처럼 찰랑거리고 부드러운 살결과 냄새가 생각났다. 10초 정도 그러다가 입술을 안으로 당기고 힘을 주고 짧은 한숨을 쉬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었다.
바로 얼마 뒤 맞은편에서 순도 100퍼센트 중년 불륜 커플이 걸어온다. 마침 옆에 있던 대형 마트 앞에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 산이 보였다.
그러다 시골 읍내 같은 길이 보인다. 이 짧은 몇 블럭이 마치 세상의 시작과 끝 같은 광경이다. 어디에도 모텔은 가득했다. 생긴 지 삼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OB집이 있었고 맞은 편에는 도무지 이 자리에 있어선 안될 것 같은 느낌의 바다장어 집이 있었다. 불이 켜져 있었으나 영업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지나가며 보니 50대 후반쯤 중년 남성이 얼굴이 점잖게 붉어진 체 소주를 마시며 초점 없이 테레비를 보고 있다. 여기 사장님인듯하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밤 2시 30분이 넘은 시각에 어찌 된 연유로 이러하고 있을까를 잠시 생각하고 다시 길을 옮겼다.
수많은 쓰레기가 도처에 있었다. 어디선가 멀고 굵게 When the night has come 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Ben E. King이 부른 오리지널이 아닌 카피 밴드 노래다. ‘밤이 되어 어둠이 찾아오면, 달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빛’ 이라는 가사를 듣다가, 이쯤 되니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쳐있는 것 같다.
수많은 교회가 있었고 수많은 병원과 수많은 장례식장이 있었다.
진배기 원조 할매국밥 간판에 다시 원조 글자를 넣어 세 번이나 강조한 돼지국밥집을 지났다. 정신 나간 할머니가 주차장 난간에 걸터앉아 혼잣말을 하다가 맥락 없이 자판기 커피를 마시다 이내 민요 한 곡조를 부르는가 싶더니 조용하다가 다시 혼잣말을 한다. 날이 제법 싸늘하다.
길 건너편 전광판에선 행복하세요. Happy Time. 힘내세요 Happy Time이라는 글자가 강요하듯 위아래로 중량감 있게 흔들며 반짝인다. 바로 눈앞에 또 모텔에선 ‘깨끗하’ 까지 글자가 멈춰있다가 시설을 자랑하는 내용이 흐른다.
노스딸기야라 적인 러시아어와 한글이 적힌 곳을 지났다. 노스텔지어라는 뜻이다. 수많은 중국어와 키릴문자가 혼재되어 있다. 증명여권사진, 필방이 있는 곳까지 걷는 동안 러시아 아가씨 필요 없냐고 하는 사람을 세 명 만났다. 부드럽게 웃으며 목례를 하고 걸었다.
지하철 환풍구에 걸터앉은 반 대머리에 묽은 선글라스를 끼고 면바지에 붉고 검은 가로 스프라이트의 웃옷을 입은 중년이 하릴없이 앉아 있다. 옆에는 조그만 가방이 있었다.
4시간 정도 걸어 작업실에 도착할 때쯤 그믐달이 검은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았고 하늘이 무척 어두웠다.
아마 내일도 혹은 다음 주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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