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도

렌즈의 포커스 홀딩 고무링이 늘어난지 좀 되었다. 이런건 성격상 제법 참기 힘들어할법도 한데 결국 이리저리 쓰다가 결국 A/S센터에 전화를 넣어 부품을 주문하고 오늘 교체를 했다. 35mm f1.4 시그마 렌즈. 후드가 부러지고 포커스 홀딩 고무링이 늘어나도록 쓴 렌즈는 처음 인듯 하다.

부품을 기다리는 시간은 일주일 정도, A/S센터에서 접수하는데 다시 15분 정도 기다린후 실제 교체하는데는 불과 2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야 단순한 고무링 교체 정도이니 시간이 많이 걸릴 일이 없다. 나는 이런 느낌이 좋다. 이런 저런 이유로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한들, 그래서 준비를 마치고 실제 작업을 할때 한번에 착착 되어가는 이 느낌이 좋은 것이다. 렌즈가 다시 한번 새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메뉴얼 포커싱을 할때 흐물거리면서 무척 기분이 우울해지는 느낌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타이트하게 감겨있는 포커스 고무링은 어딘가 내 마음 한구석에 묽게 남아있던 덩어리를 착착 빨아 당여주는 듯 했다. 비록 내 돈을 내고 받는 서비스지만 기분이 좋아서 예를 표했다. 신세졌다. 감사히 잘 쓰겠다. 라는 말을 하고 A/S센터 사장님도 기분 좋게 화답해줬다. 한번 더 기분이 좋아졌다.

일을 마치고 나오니 비가 왔다. 갑자기 미국에서 비를 맞았던 일이 생각 났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캘리포니아에는 비가 온다고 한들 우산을 쓰는 사람의 비율은 한없이 낮았다. 일본만 해도 비 맞으면 감기 걸린다고 법석을 피우는 경우가 많은듯 한데, 어째서 여기는 그렇지 않을까. 라는 아무래도 상관 없을 것 같은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엷은 빗방울이 머리카락 사이를 보슬보슬 훑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작업실에 돌아오는 동안 이어폰에선 몇 곡의 음악이 지나갔다. 허감독의 봄날은 간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비치보이스의 God only Knows, 벨벳 언더 그라운드 Pale Blue Eyes, 카즈히토 야마시타의 무반주 첼로 기타. 계통이 전혀 없는듯 어딘가 끈질기에 계통을 관통하는 음악을 들으며 작업실의 철문을 열고 의자에 앉았다.

비가 오는날의 소리는 맑을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밀도가 높아지고 냄새가 쉽게 느껴지고 무거워지고 그리워진다. 내가 그리워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생각하곤, 이내 우울해져서 담배를 한대 피우고 오줌을 싸고 남아있던 식은 커피를 마셨다. 살짝 짠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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