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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가 되면 몸도 마음도 반쯤 물 먹는 스펀지처럼 된다. 봄이 점점 다가오는 소리, 봄이 바로 문턱에서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문틈으로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생생하다. 이젠 익숙한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괴로움이 상쇄되거나 하는 일 같은 건 없다. 난폭하게 지축을 뒤흔드는 전차 궤도의 바로 수센치 옆에서 몸과 마음을 웅크리고 눈을 감는 것.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앞으로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 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런지 난 쉬이 상상되지 않는다.

비가 내렸다. 탁한 먼지 냄새가 나는 축축하고 약간 서늘한, 하지만 명확한 악의를 품은 부드러운 비가 내렸다. 이십 미터 즘의 거리에서 들리는 버스의 굵은 엔진 소리와 타이어가 물을 찢어내는 소리와 크락숀 소리가 들린다. 대기 중의 공기가 혜성처럼 움직이는 듯한 소리다. 검은색의 차분함 속에선 너무나 크게 들리는 소리다.

그저 이 기다림이 어떠한 결론이 되던 빨리 끝나버렸으면 하는 바램과, 제발 오지 않았으면 하는 두려움이 함께 있다. 천천히 천천히 시간은 흐르고 있고, 교활하고 영민하게 시간은 흐르고 있다. 문득 내가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귀 기울여 들을 것이 아니다. 바램도 기쁨도 엷은 회색의 그림자 같다. 걷고 보고 먹고 앉고 몸에 나쁜 담배를 태워가고 입은 다물고, 결코 느끼지 못할 지구의 자전을 감각 해보려 하는 것과 비슷하다.

간혹. 문득 상쾌한 바람 자락이 뺨과 귀를 스치는 때가 있다. 그때는 눈을 질금 감고 싶어진다. 눈알이 빠져라 싶을 정도로 감고 싶다. 눈을 뜬 이후의 광경이 나는 두려운 것이다. 평생 눈을 감고 살 수는 없다. 눈을 감았을 때와 떴을 때의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그래 봐야 둘 다 나의 착각과 오해일 뿐이다. 조금 더 겸손하게 말하자면 찰나의 진심 정도인 것이다. 파편화된 조각을 주워서 녹색 접착 테이프 따위로 얼기설기 조악한 모양을 만들 뿐이다. 손가락 하나로 스윽 밀면 모양이 일그러질 그런 것을 계속 반복할 뿐이다. 어느 식으로든 자신이라고 하는 왜곡된 만화경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 따위 없다고. 그럼에도 사랑 밖에 없다고. 아니 어쩌면 이것마저도 그리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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