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오후

본질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다.

한 명의 인간은 인류가 경험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경험의 경로 중 극히 일부만 경험할 따름이며 이렇게 일생 동안 만들어진 자기 자신이라는 필터로 세상사를 가늠할 따름이다.
동시에 이러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엮임으로, 인류의 지평과 시야는 때론 넓어지기도 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눈꼽을 띠고 살아가야 하는 일상의 경우는 어떠한가.
서로의 다름을 틀렸다고 이야기하던, 혹은 틀린 것을 다르다고 이야기하던 그 어느 쪽이던 기준은 항상 유동적이어서 결국 자신의 일생 간 만들어진 편향의 물살에 스스로 휩쓸릴 따름이다.
익숙한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편향을 가졌다고 느끼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때론 즐겁거나 행복한 시간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어쩌면 서로 비슷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말해 비슷하다고 느꼈을 뿐인 사실은 오해였다 할지라도 편향의 주파수가 서로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느끼는 동안은 그 실체가 오해였던 아니던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거기에 어떠한 의미가 가치가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은 그저 오래된 바람이자 희망이요 동시에 미신일 뿐이다.
때론 기적적으로 서로가 통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경계해야 한다.
그 기적적 느낌은 그 순간의 것일 뿐이지 그것이 온전히 전달되어 세월의 훼손에도 굳건하게 변형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몇 가지 필연과 우연으로 잠시 맞았던 것뿐임에 다름이 아니다.
그 자리엔 다시 다른 파도가 일렁일 뿐이다.

게다가 기억은 자신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이 기억이 편집되고 변한다.
결국 만물이 변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불가능에 의해 만들어진 빈자리는 진공과 같아서 여백을 허락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비슷한 사람을 은연중에 찾게 되고 안심과 행복감을 손에 넣으며 동시에 자신과 다른 편향을 가진 사람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렇게 계속 찾고, 채워 넣고, 비우고, 합치고, 반목하고, 싸우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삶을 마감한다.

그러나 설령 정말 이렇게 된다고 할 지라도 슬퍼하거나 외로워할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못한다.
저마다가 조금씩 이상한 부분이 있고, 망가져 있고, 병들어 있으며, 편향 덕분에 생존했던 때도 있었다.
더불어 편향의 모양과 성질이 그 사람을 구분하게 하고 정의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타인을 인식할 수 있고, 미워하기도 하며 때론 사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모여 자신이라고 하는 유동적 기준이나마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편향이라는 것 자체가 생존의 기술이며 동시에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근간 중 하나다.
이러한 근간을 통해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게 애초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순진한 물음을 가지는 것을 마침내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은 어떤 특정한 상태에서 우연히 겹쳐진 인연이라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사람에게도, 작품에게도, 그 작품을 보는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와 당신의 인연으로, 단 1센치 만큼이라도 단 1초 동안에라도 마음이 움직였다면 이러한 우연과 필연 그리고 당신에게 그저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것이 설령 일순의 오해였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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