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과 농도를, 명확한 형태가 있는 것으로서 손에 쥐어 사용 할 수 있는 물감과 붓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2,033개의 컬러 칩세트를 만든다.
대략 16년 전에 컬러 칩 갯수를 800여 개부터 5200여개 까지 다양하게 시험해 본 적이 있다. 예상과 달리 갯수가 너무 많으면 일종의 노이즈 처럼 되어서 특정 구간에서 색이 튀고, 갯수가 작으면 인터폴레이션이 심해져 정확도가 떨어졌다. 그로부터 대략 8년 이후 장비 성능과 프로그램 알고리즘이 개선되면서, 앞에서 했던 것처럼 컬러칩 갯수를 800여개 부터 5200여개 까지 다시 다양하게 시도해 봤는데, 알고리즘이 개선된 덕에 예전보다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역시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결국 돌고 돌아, 시작 하기 좋은 출발점으로서 2033개가 합리적이었다. 여기에 필요에 따라 3~1000개 정도의 컬러 칩을 추가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측정을 위한 컬러칩 세트는 크게 다음 요소에 따라 결과 값이 다르게 나온다.
헤드 이동 속도 / 프린트 렌더링 해상도 / 쉐도우 로컬 콘트라스트 확장 / 스펙트럼에 UV 포함 관능평가용 / 스펙트럼에 UV와 편광을 제거한 관능 평가용에 따른 셋팅 조합은 대략 40가지 정도 되는데 작품 프린트 범위 안에 들어오는 기초 조합은 대략 16가지 정도다.
그 중 기본 특성을 고려하고 경험상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해서 2033개의 컬러칩 세트 6개를 만들었다. 이런 접근을 통하면, 하지 않은 나머지 10개의 조합도 데이터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하다. 설령 드물게 6개 세트의 결과가 전부 기준 이하가 되더라도 최종적으로 2~3개 셋트만 추가로 작업을 더 하면 보통은 기준 범위 안에 들어온다.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최적화용 패치 셋을 만들어 보충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만든 컬러칩 세트는 건조가 매우 중요하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건조 시키는 동안 색상과 농도가 계속 변화한다. 때문에 프린트 하자 마자 나온 것을 손에 들고 곧바로 색상, 농도 판단하는 행위가 적절치 않은 이유다.
암실에서 프린트 할때 트레이의 물 속에서 보는 것, 스퀴즈 하고 나서 바로 보는 것, 완전히 건조되고 나서 보이는 콘트라스트 특성은 확연히 다르다. 드라이 다운 현상 때문이다. 때문에 경험이 풍부한 이는 스퀴즈 하자 마자 바로 보는 톤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퀴즈 할 때는 약간 맞지 않더라도 최종적으로 드라이 다운 되었을때의 변형 정도를 미리 예상하여 작업한다. 경우에 따라선 셀레늄 토닝할때 D-Max 변화를 고려하여 작업 하기도 한다.
같은 이유로 프린트 전반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특히 색상과 농도의 기준을 잡기 위한 측정 작업엔 건조라는 요소는 정말 중요하다. 컬러칩 세트를 만들 때도 되도록 표준 온습도 범위인 습도 40~60%, 온도 15~25도 범위 안에 들도록 환경을 만들고 이를 추적 체크 하기 위해 데이터 로그 기능이 내장된 온습도계로 확인한다. 흑백 프린트의 경우 온습도의 차이에 따라 톤이 제법 달라지기도 한다. 종류 따라 다르지만 통상 3일 가량 건조 과정을 추적 계측 해보면, 색상 이동 평균값은 대체로 허용 범위 안으로 수렴한다. 그렇게 3일을 건조 시켰고 이제 측정이 가능해졌다.
분광광도계로 12,198개의 컬러 칩을 꾸역꾸역 계측 했더니 5시간이 사라졌다.
단순 반복 작업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편이지만, 컬러 칩을 읽고 있을 땐 약간 신경질적으로 멍해진다.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멍한데 신경질적이고, 신경질적인데 멍한 상태라는 것은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 속에서 마시는 것과 비슷 감각이지 싶다.
컬러 칩을 읽을 때 분광광도계의 위치를 제대로 잡으면서, 동시에 읽는 속도가 너무 빨라도 너무 느려도 안 되고, 중간에 튀어도 안 되니까 생각보다 꽤나 신경 쓰인다. 게다가 분광광도계와 컬러칩 사이의 거리가 조금 달라지기라도 하면 측정값이 살짝 튄다. 물론 이런 휴먼 에러에 대비한 몇 가지 절차적 안전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안전장치는 평소엔 꽤나 잘 작동한다.
하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절차적 안전장치는, 그 안전장치를 만든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안전장치를 만들고, 예외 처리를 꼼꼼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상상 이상의 일들이 벌어진다. 때론 이런 일들이 창조와 창의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안전장치를 만드는 사람으로선 그저 재앙일 뿐이다. 프로그램 만들어본 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렇게 측정한 2033개의 컬리칩을 3차원 색 공간 좌표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모델이 깨지거나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잉크 조합 커브에 튀는 영역은 없는지, 톤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선형적으로 증가하는지, 중성 채널에 잡색이 끼어있진 않은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순서상 제일 먼저 하게 되는 3차원 색 공간에 데이터를 올려서 나온 결과가 이거다.

이 짓거리를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럭저럭 20년은 해왔는데 이렇게 선명하고 깊은 구멍이 난 것을 만든 적은 처음이다. 처음 측정 시 허리가 아파서 중간에 살짝 튀었는데 그게 원인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원인이야 워낙 다양할 수 있다. 컴퓨터 접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생한 누설전류가 케이블을 타고 분광광도계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하필 전압이나 전류 변동이 발생해서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접지를 잘 해두었기에 이게 원인일것 같진 않았다. 혹시나 싶어 누설전류 계측기를 꺼내서 케이블을 직접 측정 해보니 문제 없다. 그 밖에 원인을 생각해보면 컬러 칩을 읽을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기에 찌그러진 곳의 하이라이트 옐로우, 하이라이트 마젠타 구역에서 측정 좌표가 어그러진 곳의 좌표를 보고 측정 데이터의 순서를 찾기 위해 데이터를 눈으로 훑어보는데, 에러 난 곳을 찾기 어렵다.
잠시 눈을 감고, 밖에 나가서 숨을 들이 마시고 담배를 한대 태우고 음료수 한 캔을 마신 다음 의자에 눈 감은 채로 잠시 앉아 있다가 해당 컬러칩 셋트를 처음부터 다시 측정했다. 값이 멀쩡하게 잘 나왔다.

이런 상황이 생기기도 하다 보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멍함과 신경질적인 것이 공존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분광광도계의 시그널 케이블이 혹여나 컬러칩 셋에 쓸려서 반사율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기에 이를 방지하며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혀서 하다 보니 허리가 아프다. 멍한데 신경질적이고, 신경질적인데 멍한 이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이것을 총 6회 반복한다.
이렇게 다시 측정한 2033개의 컬러칩을 3차원 색 공간 좌표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모델이 깨지거나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프리머리/세컨드리 컬러 좌표 경로가 지나치게 휘는 곳은 없는지, 잉크 조합 커브에 튀는 영역은 없는지, 톤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선형적으로 증가하는지, 중성 컬러 채널에 잡색이 끼어있진 않은지를 면밀히 살펴본다.
데이터 확인이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각기 적용한 6개의 테스트 프린트 만들고 다시 3일을 건조한다. 현장에서 테스트 프린트를 뽑아서 보더라도, 앞서 말한 드라이 다운 현상 때문에 컬러와 농도를 제대로 판독 할 수 없다. 때문에 3일 건조가 끝나면 표준 뷰잉 부스에서 관능평가를 한다.
너무 극단적으로 표현되진 않았는지 혹은 너무 중성적으로 표현되진 않았는지 다시 말해 용지가 품고 있는 어조와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지,
형광 증백제가 들어 있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용지의 경우 조명에서 나오는 UV 광에 반응 정도에 따라 보이는 어색함이 허용 범위 안에 있는지,
만약 형광 증백제 영향으로 어색함이 허용 범위를 초과할 경우 이를 다소 중화할 방법과 도구로 어떤 식의 접근을 할 것인지,
형광 증백제 무첨가의 고급 용지 경우 페이퍼 화이트와 하이라이트 영역 색상 및 밝기 전환 그라데이션과 선형도가 매끄럽게 잘 연결 되는지,
쉐도우 분리력은 용지 특성을 고려하여 스펙 범위만큼 나오는지,
데이터와 실제 프린트 사이의 괴리는 없는지,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방법과 도구로 더 나은 것을 만들 것인지를 고려한다.
이렇게 6개를 평가하여 용도에 따라 2~3가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나면, 오롯히 자신의 작업에 더욱 순도 높은 매진을 할 수 있게 된다.
때론 아주 엷고 투명한듯 하이라이트의 미묘한 어조는 그냥 볼때는 아주 사소해보이지만, 이 하이라이트의 예민한 어조 차이가 작업 전체를 결정 할때가 있다. 깊고 무거운 쉐도우의 중량감, 맑고 폭신거리는 쉐도우의 찰랑거림이 작업 전체의 어조를 결정 할때가 있다. 종종 어조라는 것은 내용에 한없이 가깝다.
위와 같은 기초 작업을 통하고 나면, 최종 프린트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할 필요 없이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공방에 모니터를 통해 시뮬레이션 결과값을 확인 할 수 있다. 일부 특수 매체를 제외하면 대부분 눈에 본대로 나온다. 건조가 덜된 테스트 프린트를 들고 잘못 판단하여 최종 완성작품의 어조가 다르게 나올 일도, 추가 비용도 들지 않으며 더 정확한 예견이 된다.
이것을 각 용지 종류별로, 기준안에 들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지금까지 컬러 작업만 이야기했다. 흑백 작업 이야기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흑백은 이와는 또 다른 식으로 별도 진행 해야 한다.
컬러 보다는 흑백이 난이도가 더 높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색과 농도를, 명확한 형태가 있는 것으로서 손에 쥐어 사용 할 수 있는 물감과 붓 그리고 캔버스를 만들었다.
이렇게 기준을 만든 후, 기준을 잊기 위한 준비를 하나씩 녹여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