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필름 정리를 하다가 그대로 졸아버렸다.
얼마나 졸았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느낌상으론 제법 오랫동안 잔것 같은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봤던 것이 밤 열한시 십분, 지금 시각은 밤 열두시 이십오분.
마지막으로 시계를 봤던 이후에 시간이 조금 흐르고 졸았던걸 고려한다면 삼십분 정도 졸았던것 같다. 그대로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자고 싶었지만, 쌓여있는 필름들을 보고 있으니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몇몇인가와 메신져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사람들은 돌아갔다. 그 사이에도 필름을 계속 정리하고 있었다. 다소 피곤한 느낌이 들어 커피를 좀 진하게 타서 마셨더니 확실히 좀 낫다.
음악을 들으면서 혹은 뭔가를 보면서 계속 필름 정리를 해나간다.
정신 차리고 보니 작업실 창문 밖으론 태양이 엉덩이를 내밀고 있다. 이때 즈음의 태양빛은 바로 직광으로 눈을 쏘기 때문에 눈이 많이 피곤해진다. 게다가 체력도 거의 바닥날때 쯤이기 때문에 이럴때 받는 오전의 태양 빛 같은 건 달갑지 못하다.
결국, 완전히 지쳐 필름 정리는 관두었다. 어짜피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을.. 어쩌면 내가 숨이 붙어있는 한 네버 엔딩 스토리 같은 일이다. 조금 필름 정리가 늦어 진다고 해도 큰일 이야 나겠는가.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다가 이렇게 쌓여 버리게 되면 무리 해서라도 일정량 이상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리듬이 흐트리 지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서 필름조각들을 계속 만지고 있다 보면 가끔은 무엇인가 속에서 치밀어 오를때가 있다. 어떤 종류의 분노라던가 안타까움이라던가 슬픔 같은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진 알고 있다.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냥 묵묵히 그것과 마주하며 필름을 정리 할 뿐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것이 나를 아주 못살게 굴때가 아주 드물게 한번씩 있곤 한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나 보다. 그것에 지기 싫어서 이빨 꽉 깨물고 악으로 버텼지만, 지쳐가는 몸뚱아리와 커피만으론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든 머리 덕분에 결국 지고 말았다.
시간은 아침 다섯시 삼십 팔분이었고, 아직 매미가 운다. 몸이 끈적끈적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몸 속에 남아있는 소나무 진액 같은 것들이 스물스물 삐져나와서는 온 몸을 그렇게 굳어버리게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느끼곤 했기에 당황하진 않았다. 하지만 정말이지 여전히 기분 나쁜 감촉이다.
몹시 목욕탕에 가고 싶어졌다.
마침 몇달 동안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목욕탕에 갔던게 몇달 전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그 뜨거운 온탕에 몸을 푹 지져넣고 근육 한올 한올을 전부 풀어헤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검은색 비닐에 샴푸, 린스, 바디소프를 챙겨넣고 MP3플레이어와 헤드폰 그리고 카메라를 챙기곤 바깥으로 나왔다. 아마 여섯시가 넘었으리라 생각한다.
거리로 나서 횡단보고를 건너고 예전부터 제법 좋아했던 목욕탕엘 갔다.
문은 오래 전 부터 닫혀 있었던듯 했다. 입구 쪽에 뭔가 그리스 기둥 같은 것이 뒹굴고 있었다. 태양은 벌써 이 만큼이나 떠 있었고 그 빛은 나의 눈을 바로 찌르고 있었다. 아침 시내 특유의 미끌거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그렇게 문을 닫은 목욕탕을 멍하니 삼 사분 정도 보고 있다가, 가져간 카메라로 셀프를 한장 찍었다. 이 목욕탕 정말 망했나 보다. 라는 말을 중얼 거릴때 갑자기 생각이 났다.
시내로 나갈때 내가 주로 잘 다니는 길이 있었는데, 실은 그 길가에 그 목욕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소엔 목욕탕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같은건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눈으로 보고 있었을 런지는 몰라도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던가 인지하고 있었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간은 그 당시, 그 순간의 자신과 어떤 종류의 관련이 없다면 이다지도 무관심 해질 수 있는 것인가 싶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나의 문제도 크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자 문을 닫는 목욕탕에 대한 불만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을 닫았다 라는 느낌보다는 망해버렸다 혹은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았다. 라는 느낌에 훨씬 가깝다.
어쩔 수 없이 길을 돌아서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던 목욕탕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가격은 올랐고 목욕탕이 아닌 사우나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속에 뭔가 바뀐거라도 있었던가 싶었는데 알맹이는 전혀 바뀐게 없다.
옷을 다 벗고 카메라도, MP3 플레이어도 모두 로커에 넣어두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탕에 들어갔다. 물은 가득 차 있지 않았고 뜨겁지도 않았다. 순간 지금까지 쌓여있던 것이 한꺼번에 폭발할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별 수 없다. 폭발한다고 한들.
관의 벨브를 열어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적당히 섞이도록 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탕에 몸을 맡겼다. 이제 조금 기분이 좋은듯 하지만 이미 중요한 무엇인가는 지나가 버린 이후라는 느낌이다. 살다 보면 당연하게도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비록 이런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뭔가 맥이 빠지고 기운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뜨거운 탕 덕분에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다. 찬물을 마시고 다시 탕에 들어가고 다시 머리를 감고 몸에 비누칠을 하고 샤워하고 탕에 들어가고 다시 찬물을 마신다.
바깥엔 목욕탕에 들어갔을때 부터 나를 흘깃 흘깃 보던 30대 말 즈음으로 보이는 가운데만 대머리인 남자가 지겹다는 듯 TV채널을 느릿느릿 돌리고 있었다.
커다란 아디아스 로고가 등에 박힌 검은 티셔츠와 그의 머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물기를 모두 닦아내고 머리를 말릴때 거울을 봤다. 콧등 주위로 부터 주름이 가기 시작했다. 콧등에 난 주름은 왼쪽눈을 따라 그 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군.. 왼쪽 눈이군.. 오른쪽 눈에는 주름이 거의 없는데 왼쪽 눈으로 주름이 많이 졌구나..
그렇구나.. 작업실엔 거울이 없기 때문에(없는거나 마찬가지) 본적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뭔가 순간 확 하고 늙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옷을 입고 카메라와 MP3플레이어를 챙기고 길을 나섰다. 오전 아홉시가 넘었다. 작업실에 돌아오는 길에 뭔가를 찍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찍기 싫었다. 그럴때가 간혹 있다. 뭔가를 찍고 싶지만 아무것도 찍기 싫을때 말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무엇인가를 찍었다. 보였기에, 어쩔 수 없다. 찍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검은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샴푸니 뭐니 하는 것들을 다시 제자리로 놓고 봉지는 쓰레기 통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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