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지럽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심각하고 치명적이며 지속 가능성의 근본 자체를 위협하는 수많은 문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우리를 보고 있다. 그 속에 수많은 사람이, 이유를 알아도 이유를 몰라도 시체의 산이 쌓아 올려지고 있거나, 미래의 시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정서적으로 인지 교류할 수 있는 범위와 거리와 깊이는 매우 한정적이다. 그래서, 어쩌면 덕분에 우리는 별일 없이 살아간다. 오늘 하루에 있었던 시덥잖은 일들과, 그 시덥잖음 속에 깊이 상처를 받기도 하는, 때로는 시덥잖음에 깊은 위로를 받으며 하루를 살아내어 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개인의 깊은 고통도 타인에게 온전히 왜곡 없이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 자기 자신의 고통을 아는 것 조차 힘들다.
나는 힘없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 영상을 건조하게 보다가, 왜 전조 없이 콧물과 눈물이 났는가? 특정 포인트에서는 비린내가 느껴질 정도로 직설적인 순진함을 가장한, 철저히 정밀하게 조율된 장면도 있다. 게다가 광적인 기술적 집착으로 완성된 장면들은, 단순 서사도 고도로 정제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에 대한 모범에 가깝다. 나는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뻔하디 뻔한 것에 마음이 흔들릴 일인가. 몇 분간 생각했다. 사실 생각이라기보다는,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 옆으로 돌린 고개를 천천히 다시 돌리는 에너지를 소모했다.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기미가 보이는 순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애쓴 것도 왜인지 알고 있었다.
건조한 냉소로 가장한 체념을 재차 생생하게 인지한다는 것은 꽤나 아픈 일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되었건, 지금과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 바람, 욕심, 상상, 예측, 예상, 환상, 믿음, 착각, 집착, 맹목 등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 반대로 저런 것들 중에 어느 비슷한 것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비록 그 생존의 모습은 달라도 적어도 살아는 있다고 볼 수 있다. 살아 있음을 견딜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미래로 한 움큼씩 걸어가진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미끄러져서라도 가고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한. 설령 그것이 매우 순진한 낙관론이라 할지라도 무언가를 태어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냉소가 아닌 낙관이었다.
혹은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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