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수많은 것들과 아주 몇가지의 소소한것들이 축을 이루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으며 살아가곤 한다.
꿈이 없는 미래, 하릴없이 하루를 견디어 나가는 삶,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시간, 해가 저물고 도시의 불빛도 사그러들며 아침이 오고 햇살이 비추어 올때, 내 가슴속엔 무엇을 품고 있는가를 생각할때 한가지 느껴지는 것은 수 없이 되뇌어 반복한 그 말이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때에 따라선 일종의 마취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그래서 순간 세상이 달라보이기 시작했을때, 그저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때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의미도 만들 수도 찾을 수도 없었다. 가슴이 아팠기 때문에 허공에 주먹질 하듯 나 자신을 밀어넣고 싶은 곳을 찾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무엇하나 구제 할 수 없는 끌려다니는 그림자가
나의 앞과 뒤와 옆에 있을 뿐이였다.
태풍 한번 오지 않는 여름이 끝났고, 매미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모기들은 아직도 득실거리고 시간은 겨울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카메라를 들고 어질러진 작업실을 찍고 반숨을 내쉬고 2분 정도 전화를 한통 하고 담배를 피우고 설겆이를 하고 다시 카메라를 들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작업실을 다시 찍었다.
그러나 자를 대보면 직선.
삶을 살아가면서 직선은 직선인데 주변의 붙어있는 것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다.
왜곡되게 보여지는 것들과 그렇게 보여지도록 하는 것들이 많다.
그 직선은 그야말로 직선일 뿐인데.
세삼 스럽지만, 정말 웃기는 일이다.
내가 과연 뭘 제대로 볼 수 있단 말인가.
고양이 소리가 들리지 않아 걱정되어 가보니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없어졌다.
남아있던 것은 물을 담아 주기 위해서 급히 찾았던 말라버린 흰색의 플라스틱 그릇과 여전한 그 공간만이 남아있었다.
아마도 새끼 다섯마리는 어떻게든 살았었나 보다.
남아있던것은 어미 고양이의 악취나는 오줌 냄새 뿐이였다.
나의 한계는 여기 까지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좀더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있는것 그대로 보려(그것은 불가능 하지만) 노력했고 또 노력했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난 마지막의 마지막의 일말 까지도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정말 최선의 노력을 다 했고 이윽고 그것에 대한 경멸감에 가득찼음에도 불구하고 난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내 인내심의 한계를 몇번이나 넘었고 귀를 기울이려 했고 잘 듣고자 노력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원인인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윽고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신경줄이 끊어질 정도로 집요하게 생각했고 노력했다.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난 손을 놓았고 그것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있다. 아무리 전력을 다 하고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의 노력을 했다 한들, 아무리 진심이라고 한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한들..
냉정하지만 결과라는 것은 언제나 그런 법이다.
진정 내가 원했던 것에 대한 회의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작업실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복도는 한사람 정도가 다닐 수 있는 조그만 크기다. 계단을 올라가는 공간에는 작업실 공사하면서 나왔단 각종 잡동사니(혹은 쓰레기)가 모여있는 곳인데 거기서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이였을 거다. 자꾸 소리를 내길레 뭔가 싶어서 가보니 어두운 곳에서 눈동자의 빛을 내고 있었다. 혹시나 이 녀석이 장난 치다가 다친건가 싶어 가만히 보니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더라.
오늘 낮에 신경이 쓰여 다시 가보니 새끼 고양이 다섯마리가 눈도 못뜨고 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새끼를 낳은 어미는 신경이 날카로운 법이다. 조심스레 접근하니 역시나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를 하고 날 쏘아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적의 없는것을 알았는지 혹은 뭔가를 포기한건지 알 수 없는 느낌으로 가만히 있었는데 어떤 새끼는 어미 젖을 찾지 못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마도 다섯놈중 두마리 정도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뭔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가만히 놔두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여 결국 물 한그릇 떠서 곁에 놔두었다. 이 근처에 고양이가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을테니 말이다.
하얀색이 두놈, 타이거 스프라이트가 한놈, 얼룩이 두놈이 있었는데 하얀놈과 타이거 스프라이트 한놈이 신경쓰였다. 내 생일 하루 전에 태어난 놈들이라 그런지, 쓸때없는 의미부여를 하며 이것도 인연인가 싶은 기분이 든다.
이 넓고도 황량한 중앙동 바닥에서 내 작업실 구석, 사람들이 오지 않는 쓰레기 더미들 속에서 새끼를 낳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새끼들과 어미와 나라고 하는 인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정말 없는걸까?
세상을 삼키기엔 다소 함량미달의 많은 비가 들이붓고 낙뢰와 천둥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한 없이 올것만 같은 기세였다.
당연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이런 종류의 날씨는 언제나 그렇듯, 언제 그랬냐는 흔적도 없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자국만은 남아 있어서 빗물의 자취는 남아있었고 숨을 들이마시니 깨끗해진 공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자국도 사라지고 공기도 예전으로 돌아갔으며 정말 그 만큼의 비가 왔었는지 확신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아 있는거라곤 기억 뿐인데 그 기억도 믿을 수 없다.
기상청에 자료가 남아있다고 한들 데이터의 입력 혹은 처리나 보관에 오류가 생기게 된다면 그것도 믿을 수 없으며,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 않는다 한들 숫자와 글자로 된 \’xxxx년 x월 x일\’의 날씨따위를 느낄 순 없다.
도대체 무엇을 기억한단 말인가.
기억한다는게 가능하기나 하냔 말이다.
인간은 매순간 사라지고 존재하고 혹은 허상만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건 아닌가.
이 모든것을 견뎌내기 위해 도대체 얼마 만큼 사랑해야 한단 말인가.
비가 몰아닥치다 마는둥 날씨가 부산하다.
이쯤 되면 태풍이 언제쯤 오는가 생각하고 예전 생각이 나고 때론 앞으로의 생각을 하게 된다. 제법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의 얼굴과 눈도 그렇지만 세상의 흐름도 그렇다.
하늘은 아직까진 파랗고 태양을 정면으로 보려하면 실명할것 같은 따가움은 여전한데 마음은 주석을 녹여 만든것만 같다. 스무살이 되려하던때, 뭔가에 등 떠밀려 나온 천둥벌거숭이 같았던 때는 얼마전이였다.
서른살이 되던때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 기간 동안 난 몇권인가 책을 읽고 몇가지 음악을 듣고 몇가지의 연애질을 하고 몇가지의 괴로움과 사소한 깨달음(그게 정말인진 모르겠지만)을 얻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느꼈던 한가지는,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어나 내 이름 석자를 한글로 쓰지 못했던게 일곱살 까지였다. 기억 이라는것이 으레 그런거지만 그때 즈음이 정신적으론 가장 풍만했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똑똑히 기억 나는것은 봄햇살의 따가움과 훈풍을 있는 그대로 느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때 마다, 지금의 나에게 죄를 짓고 있는듯한 자책감이 들때. 가슴이 1mm 정도 움찔거리는 것을 멀건 숨소리로 날려 보낼때 나의 무엇이 먼지 만큼 소모되는 느낌이 든다.
먼지를 마시며 살아가니 그 만큼 날려 보내야 하는 것이 이치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점토 만큼이나 두꺼워지는 것이 먼지 일테니 이것 또한 살아있기 위한 소모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덟살이 되고 삐뚤삐뚤 써놓은 내 이름을 봤을때의 기분이라는 것은 \’뭔가 이것은 아닌데..\’ 라는 기분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을 5분이고 10분이고 계속 보고 있자 그것은 내가 아니라는 어렴풋한 느낌을 받았을때 봄 햇살의 따가움과 훈풍은 사라진듯 했다. 주위에서 봤을땐 내색은 안하고 끈기있고 참을성 있게 지켜본 사람으로써는 내색 못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위에 언제나 볼 수 있었던 색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구슬로 숫자 셈하는 것을 배웠다. 붉은색 구슬과 하얀색 구슬이였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건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터 한글을 공부하지 않아도 글자를 쓰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붉은색과 흰색의 구슬을 보지 않아도 산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그때 즈음 이였을 것이다.
마음에서 울렁거리던 소리와 감촉들이 사라지고 그곳엔 희고 빨간 구슬다발들과 내가 아닌 이름 석자가 들어왔다. 그때 부터 무엇인가가 명확해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구분 가능한 것들은 들어오고 구분이 되지 않는 것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색을 구별하는 느낌도 사라지기 시작했고 명확하게 부를 수 있는 색들만이 살아남았다.
제일 좋은 것은 음악이였다. 스스로 찾아서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 부터였다. 집에 레코드가 무척 많았기 때문에 질리지도 않고 계속 들었다.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제일 좋았다.
그때 즈음 부터 컴퓨터를 하기 시작했고 프로그램을 짜기도 하고 컴퓨터를 좋아하는 형들이 두서 없이 모이곤 하던 장소에 주말마다 나가곤 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애매한게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그것을 구현하고 그리고 정확히 그렇게 움직여질때의 쾌감은 핏덩이던 나에겐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인연이 되어 아는 형과 같이 동호회를 만들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되고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진학과에 와있는 나를 발견했고, 언제 부터인가 봄을 증오하던 나를 자각 했을때.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느꼈을때.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을때 비로서 어렴풋이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골초가 되어버린 삼십대의 몸뚱이가 나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요상스럽다. 내 마음이 주석같이 된 것은 담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요즘이다.
하늘은, 아직까진 파랗고 태양을 정면으로 보려하면 실명할것 같은 따가움은 여전하다.
다행이다.
아주 간단한 것이다.
지금 나는 술을 많이 마셨고, 타이핑이 제대로 안되어서 백스페이스를 수차래 눌러서 하나의 문장을 만들고 있지만.
정말 바라는 것은 최소한.
연결된다는 것은 실상 의미가 없지만
그리고 연결 되지지 않는 다는 것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