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한장을 프린트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하이라이트의 톤을 맞추고 그에 따른 쉐도우 톤의 기본값을 먼저 기본으로 설정하고 그에 따라 내가 원하는, 그리고 \’목적\’하는 톤을 만들어 내기 위한 변화량을 조절해간다. 쉐도우의 변화량이 큰 핸들링을 할땐 미드톤에서부터 하이라이트의 중간부분까지 같이 변화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와 계산 그리고 경험이 요구된다. 그런식으로 감마값을 조절해나가면서 톤의 전체적인 무게와 촉감과 매끄러움 끈끈함 매마름 차가움 따뜻함을 만들어 나아간다.
그나마 오늘은 남은 프린트 분량이 적어서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프린트를 할 수 있었다. 보통은 12시간 15시간 동안 암실에서 거의 나오질 못한다. 그 시간동안 가끔 음악을 들으며 프린트를 하곤 한다.
몇번의 계속되는 프린트를 하면서 최종적으로 결정될 마스터 프린트를 확인하기 위해 불을 켜고 스퀴지를 해서 면밀히 살펴본다. 셀레늄 토닝을 통한 디테일의 상승과 D-MAX의 깊어짐, 웜톤 인화지가 셀레늄으로 인해 살짝 중성화 되는 색조. 그리고 드라이 다운을 통한 톤의 변화량을 예견하면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암실에서 혼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때 내 귀에 걸려있던 해드폰에서 바흐의 \’음악의 헌정, 리체르카레\’가 흘러나왔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하는 듯 했다.
좋았다.
그리고, 서글펐다.
지금 인화지 수세기에 담겨 있는 사진들은 열심히 수세 되어지고 있다.
……

출처 – http://www.zeiss.de/C12567A8003B58B9/ContentsWWWIntern/720D91333A3B82E1C12570F9003EE864
마운트 되어 있는 렌즈는 85mm/f1.4
생긴걸로 봐선, 나오기 힘들꺼라 생각했던 비오곤 시리즈도 나올듯,
그렇다면 디스타곤, 비오곤, 플라나가 나온다는 것은 거의 확정이고.
테사가 나올지 안나올지가 의문.
아마 두근거리는 사람 많을듯.
한가지 고무적인건 이번 ZF마운트 정식 발표에 따라서 일본내 니콘 카메라의 중고 가격이 소폭 상승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재미 있는건 NF마운트 렌즈 소개용 카메라가 F6라는 것인데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고무적이랄까…
이제 Nikon에서는 SLR용 MF렌즈의 생산을 종료후, 그 뒤를 칼을 쥐어짜는 듯한 샤프함과 명료함을 가진 렌즈의 라인업이 나왔으니, 이것 또한 재미 있는 일.
아마 수년 전 부터 계획이 되어 있었던 일 이었을까…
한가지 궁금한건 ZF마운트용 렌즈는 전부 MF방식인데(당연하게도) Nikkor 45mm P 렌즈처럼 안에 내장 CPU가 들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프린트 시작이다..
내가 얼마나 견디어 낼 수 있는지, 나 스스로 조차 짐작하기 어렵다.
암실로 들어가기 직전, 지금 나의 마음은 많이 무겁다.
어쩌면 난 이 말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주절주절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는지도 모르겠다.
실상 그 어떤것도 구원에 다다를 길은 없으며, 그 구원의 끝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마지막 끝에 있음을. 때문에 어쩌면 구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환상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언제나 혼자이며, 잠시 동안 하나 됨을 느끼는 찰나의 순간이 정말 존재 하기도 하겠지만, 난 그것을 믿지 않는다. 영원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저 만큼 쓰고 나서 한참을 있다, 다시 보니 웃기는 소리다.
하지만, 잠시 1 시간 동안이나마 7년 넘게 사라졌던 내부의 어떤 감각기관이 찌릿찌릿하며 다시 살아날려고 했었던, 그리고 지금은 다시 완전히 죽어버린 나의 그 감각 기관에 대한 위로의 글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글을 다시 지우고 쓰는 일은 여기 까지만 하기로 한다.
어짜피, 나의 업보이자 남자의 업보. 또한 나의 삶에 대한 댓가. 정도로 생각하고 싶다. 더 이상 놔두었다간 상당히 힘들 것이라는 예감을 강하게 느낀다. 그런 것 또한 내가 감내해야 할 것일게다.
술이 맛이 없다.
때문에 외로워 할 필요도, 가슴 아파 해야 할 이유도 없다.
단지 순순히 그것을 이해 하고 받아 들이면 될 일이다. 어떤 의미부여도 시간의 흐름도, 마치 그것은 테이블의 왼쪽 끝에 있던 우유곽이 오른쪽 끝으로 위치가 바뀌어지는 것 뿐 일 것이다. 물건 자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단지 그 물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자체 혹은 순수성 만이 무기질 처럼 있을 뿐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 그것이 \’실존\’하고 있는지 아닌지 조차 난 알 수 없다.
때문에 비통해 할 것도, 슬퍼 할 것도 없다. 그저 묵묵히 보는 것이다.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 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함에 다름이 아니다. 무엇에 의미를 부여 함으로써 그것은 자신만의 소유물이 되어버린다. 공통된 기호를 사용 하고 있지만, 실은 껍질만 그럴뿐 각자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정확히 겹쳐 질수도 붙일 수도 없다. 무엇과 무엇이 서로 통한 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단지 우리는 열심히 오해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왜 그 사람은 날 이해하지 못하는거죠? 라고 소란을 떨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혹은 어째서 그 사람은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라며 분노하거나 가슴 아파 할 수도 있다. 자신만이 알고있는 소유물에 공용의 레테르를 붙임으로 인해서, 언제나 사람들은 마음 아파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해, 소통 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과연 가능 한 것인가.
서로 언어가 다르지만 한자어는 통하는 아시아권 캐릭터가 나오는 시시한 영화조각 한편을 보던 중에 \’이해\’ 라고 어설프게 쓴 한자어를 보며, 난 어째서 심장의 피가 터져버려 역류하는 듯한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것 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마음을 가다잡으며 희망을 버리려 하지 않고 있다. 무심해 보이는 사소함 속에 \’그 무엇\’ 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저편 넘어 그 어떤 것은 틀림없이 존재 하고 있을 것이라고 난 믿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난 숨쉬는 것 조차도 너무나도 힘들 것이다. 온기를 믿으며 사랑을 믿는다. 이러한 것 마져도 오해라는 것을 난 감지 하고 있지만, 실로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고 난 믿고 싶다. 이 세상이 생성되고 이루어지고 움직일 수 있는 이치는 사랑일 것이다. 라고 난 믿고 있다.
지독스러울 만치 잔인한 고독과 외로움이 내 살과 피와 뼈를 먹어치운다 할 지라도, 오해의 파편들로 인해서 내가 짖겨 찢어진다 할 지라도, 난 내가 사랑 하는 것을 사랑하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한 댓가는 어쩌면 외로움과 고독일 수도 있겠다. 그 댓가를 통해서 난 어쩌면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자유는 또 다시 외로움과 고독을 불러 올 것이다.
어쩌면 삶에 대한 집착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춥고 슬프고 외롭다.
진득하게 술에 취해 토악질 하며 주정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이미 주머니에 식어버린 캔커피를 홀짝 거리면서
바람을 가득 품고, 폐속에 있던 먼지를 조금 털어주고
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에 서점엘 들려 책 한권 사려 했지만 찾던 책은 모조리 재고가 없었다. 그리고 외견상으론 코끼리 모양을 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샀다.
저녁을 먹고 영화를 30분인가 보다가 끈 후에 사진을 보고 다시 거리로 나와 추운 바람속에서 중간중간 실수가 잦은 5인조 브라스밴드의 성금함 앞에 지갑속에 있던 전재산 천원을 넣고 항상 가던 곳에서 커피를 얻어마시고 폐점 시간이 되어 돌아왔다.
오늘 하루 동안 4롤 정도 사진을 찍었다.
딱히 외롭다던지 하진 않다.
단지 해가 떨어진 후가 너무 추웠을 뿐이다.
어딜가더라도 나에겐 다르지 않다. 어디로 발걸음을 옮긴다고 한들 그곳은 나에게 있어서 호소하는 것이 없다. 그저 저마다의 상태로 길거리를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무엇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정직하게 알 수 없는 수많은 가계들과 노골적인 가계들, 주머니엔 아무런 빛도 들어오지 않은 순수한 36컷의 필름 두롤과 이미 담겨진 4롤의 필름. 그리고 카메라가 있을 뿐이다.
딱히 외롭다던가 하진 않다.
단지 추웠을 뿐이다.
초겨울, 항상 지나가던 골목길에 피어있던 해바라기가 죽어 사라졌던게 생각났다.
당연하다 겨울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