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냄새와 무거운듯 밀도감 있는 공기와 따뜻하고 부드럽게 위무시켜 줄 수 있는 차 한잔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장소든, 그 곳을 가게 되는 계기와 현상태의 자신이 어떤지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익숙한 곳인데 낮설게 느껴지는 것은 항상 그런것과 관련이 있다.
요즘 들어 하루에도 세네번씩 낮설게 느껴진다.
도어즈의 노래 가사중에 이런게 있다.
People are strange. When you are Stranger.
입 닥치고 다 쓴 현상액이나 새로 타고
필름 현상이나 하는 것이 좋겠다.
……..
아주,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 이었다. 어머니는 대강 일을 마치고 나면서 문을 잠궈라는 말을 검은 철문 뒤에서 나에게 했다.
단지 내가 매우 날카로운 상태로 어떤 일을 하고 있은 상태라는 그런 사소한 이유로, 세번째 문 잠궈라는 말씀에 어머니에게 큰 소리를 질렀다.
\’그냥 두고 가세요!\’
문 밖으로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2~3분 쯤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분이 매우 우울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다. 그런데 전화기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어쩌면 이미 무슨 말을 하실지 알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그 말씀들이 되려 더 마음 아프게 할 것임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어있는 나의 머리통 속에선 아직도 아무런 소리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들린다.
아주, 예전부터 불과 몇년 전까지 나의 눈매라는 것은 날카롭다 못해서 아플정도의 눈빛을 지녔던것 같다. 아마도.
당연한건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건들기만 해도 베일것 같던 나의 모습은 어느덧 나름대로 모양과 형태를 잡아가고, 조금 정도는 둥글둥글하게 변한 부분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무엇을 느끼고, 바라보고, 다시 느끼고 행동한다던지.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바라보고, 행동한다던지. 둘중 어떤 시퀀스가 되었던 그러한 프로세스의 결과라는 것은 예전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워진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매섭던 눈매는 조금은 녹녹해지고, 약간씩 쳐져갔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이러한 많은 (나에게 있어선 정말 많은 것 이다) 것들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 머리에 총알이 관통당한듯한 충격의 번쩍임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훑고 지나갔다.
30분도 넘게 아무말 하지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겨우 담배 두가치를 태워내며, 겨우 겨우 사진 서너장을 찍어내며 사지가 찢겨나갈 것 같은 심신을 겨우 겨우 버텨낼려고 노력 하는것이 고작이었다.
무섭도록, 정말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무서웠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조금은 흘렸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 그럴땐 난 항상 무표정이다.
실상, 바뀐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모든건 Norah Jones 탓이다.
동그마니 조그만 나비가 있다.
날개짓을 할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가루가 떨어진다.
퍼더덕 거리는 날개죽지의 힘겨운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무런 소리도, 냄새도, 공간도, 빛도 없다.
날고는 있는 것인지, 어디론가 움직이고는 있는 것인지, 높이 떠 있는 것 인지, 바닥이라는게 있다면 거기서 날개만 퍼더덕 거리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단지, 동그마니 조그만 나비가 있을 뿐이다.
어디선가, 들리지 않는 냄새와 소리와 빛과 공간이 들린다.
몇일 전 현상중 원인불명의 이유로 360컷을 날려먹은 후 제정신이 아니었다. 원인불명이라고 했지만 인과응보, 이유 없는 결과 없다. 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서 백방으로 뒤져봤지만, 국내에는 전혀 자료가 없다. (단 한건도) 그나마 외국쪽 포럼과 평소에 잘 가는 곳을 뒤져봤지만, 역시 관련 쓰레드는 하나도 없었다.
그 중에서 그나마 한가지 귀중한 사실을 안 것은
\’XTOL 현상시, 절대 프리웨팅을 추천하지 않는다\’
라고 굵은 볼드 이텔릭체로 다른 문장에 비해 폰트 크기도 크게 기재 해놓은 것을 봤다.
역시 그런건가 싶어서 다시 해봤지만, 역시 현상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면 화나가는 것을 넘어 오기가 생긴다. 현상에 의해서 날려버린 필름은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이미 망친것은 망친것. 어떤 수를 써서라도 원인을 밝혀내고 XTOL 현상을 제대로 성공해보기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먼저 XTOL의 현상액 성분 분석, 특별한 것은 없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비타민 C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난 현상전에 필름의 촬영날짜를 필름 리더 부분에 유성팬으로 기입해놓는 습관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예전에 비타민 C는 기름 성분을 분해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 스쳐 지나갔다. 일단 퍼포먼스를 중시한 현상법을 빼고 가장 안정적인 현상법을 찾아서 시도를 했다. 물론 유성팬 기입은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그렇지만 알고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전의 과정은 항상 괴롭기 마련이다.
이제야 말로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영역의 시도로써 표현영역 확장의 도움을 줄 현상액을 겨우 쓸 수 있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XTOL현상시는 프리웨팅 금지, 필름에 유성팬 기입 금지.
하아…. 무식이 죄다.
사실 요즈음 들어 항상 기분이 저기압이었다.
몇일 전 부터였는지, 몇주 전 부터 였는지 알 도리가 없다.
물론 평소엔 딱히 저기압이라고 할것도 우울해 할것도 없것만, 어쩐 일인지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다 보면 눅눅하게 젖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게다가 그저께 굉장히 중요한 필름을 현상중에 원인 불명의 이유로 360컷을 날린 이후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주 조금 과장을 해서 말하자면 암실을 다 때려 부셔버릴뻔 했다.
오늘 늦은 저녁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고 단촐한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이 가고 M군과 조금은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 새로운 커피를 주문하고, 묵묵히 천장을 바라보고 커튼에 드리워진 해바라기 핀을 찍고 테이블의 다리를 찍었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들었다. 어떤 음악이었는지 잘 기억나진 않았지만 무엇인가 익숙하게 조용히 허밍을 했다. 그 허밍이 꼭 울음소리만 같아서 그만두었다. 천천히 아득해지는 기운이 느껴지고 눈을 감고 있음에도 앞에 무엇인가 보여지는 기분이 든다. 많은 것들이 왔다가 사라지고, 들어왔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더 침잠해가고 M군이 말하는 이야기는 소리도 되지 못한체 아무런 자극마저 되질 못했다. 점점 더 빨려들어간다. 소파에 온 몸을 녹여낸체 벽에 머리를 기대고 커피를 조금씩 빨면서 새하얀 찻잔은 입술에 계속 묻어있다.
몇분이나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상태로 줄곧 오랫동안 있었던듯한 느낌이다. 몸속에 눌러 붙어있던 찌꺼기들이 조금씩 녹아가고 있는 느낌이 분명히 들었다. 갑자기 눈이 번쩍 떠지면서 나머지 커피를 훌훌 둘러마셨다.
무엇인가 정화된 기분이다. 커피에 취한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다. 아-주 오랫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다.
그리고 주인장에게 약간은 경박스럽게도 (왠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최대한의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주인장은 오히려 미안스럽다는 눈치다. 오늘 로스팅이 맘에 들지가 않아서 커피 맛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다음엔 정말로 맛있는 커피를 꼭 내어주겠노라고. 지금 계속 공부하고 있는 중인데 언제고 커피에 취하는 느낌의 제대로 된 원두를 볶아서 드리겠노라고, 그렇게 나에게 답례를 했다.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진심을 담아, 잘 마셨다고 말하고 미묘하게 좁다 싶은 계단을 올라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여전히 기분은 가라앉은 상태지만, 무엇인가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받은 기분이다.
몇일 전엔가 누군가 주인장에게 이렇게 물어본것을 들었던것 같다.
\” 이렇게 해서 가계 운영을 어떻게 합니까? 남는것도 거의 없겠어요. \”
약간 기묘하게 어눌한듯 밝고 담담한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 괜찮아요. 조금만 남기면 됩니다. \”
\”난 사진에 무엇인가 숨겨두는 걸 정말 좋아해.\”
\”역시 당신 악마야\”
그리고 다음에 목소리 들으면서 이야기 하기로 했다.
밤 3시 52분. 하루를 마감하고 서로 자야 할 시간이다.
미묘하게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이다.
대강 8년 전의 일 이다.
사용하던 카메라를 도난 당하고, 새로 살 돈도 없었다.
조금씩 돈을 모아 F90X를 구입하고 싶었다. 당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F4보다도 더 좋은 기능과 성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F4보다는 가격이 저렴했다. 게다가 F4에 비해서 조금은 작고 가볍다. 특히 당시 F90X에 있어서 \’노출은 칼\’ 이라는 짧은 말이 나에겐 깊히 박혔다. 게다가 카메라로써의 카리스마는 F4에 비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단단한 느낌이 드는 F90X에 대한 관심은 매우 깊었다.
어느날엔가 F5의 발매를 알게 되었다.
가지고 있는 돈은 F90X와 50mm f1.4D 렌즈를 구입하는 돈을 겨우 맞추던 때였다. 처음엔 그다지 관심도 없어서, 내가 저런걸 쓸 필요가 있을까 가격은 또 왜저리 눈 튀어나오게 비싼건지.
현실적으로 봤을때 F5는 나완 관계 없는 카메라였다.
당시 카메라 샾의 분위기는 현재에 비해서 오히려 더 좋았던 건 아닌가 라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모 샾에선 History of Nikon이라는 초대형 판넬이 할로겐 조명을 받으며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Nikon F5의 초대형 포스터 판넬이 붙어 있었다. 그 판넬이 붙어있는 위치는 내키의 두배쯤은 높은곳에 붙어 있어서 샾의 문을 여는 순간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볼 수 밖에 없는. 하지만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그런 높이에 붙어있었다. 이쁜 할로겐 조명을 받으며.
그 판넬을 볼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가지고 싶다. 저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싶다. 말도 안되게 매력적인 느낌이다. 저 카메라로 찍으면 도대체 어떤 사진이 나오는 걸까.
F5라고 이름 불리어지는 \’그것\’은 나에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
이미 F90X를 구입할 돈은 모였지만 우습게도 돈을 손에 꼭 쥐고만 있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F5를 구입 할 수 있는 금액을 겨우겨우 맞출 수 있었다. 그 돈이 마련된 순간 바로 샾에 뛰어가서 덜컥 사버렸다.
우습게도 렌즈 살 돈이 없었다. 바디만 구입해버린 것 이다. 렌즈가 없어도 좋으니까 바디만이라도 사고 싶다.
이건 사진을 찍기 위한 도구로써의 카메라 라기 보다는 단순한 열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니콘 종이 가방속엔 유치하리만치 찬란한 금빛 종이 박스 표면,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졸렬 하리만큼 강렬한 금빛으로 로고 내부가 채워진 검은색 라인으로 F5로고의 내부를 채워주고 있었다. 침착하지 못했다. 바로 필름 두껑을 열어 셔터박스에 있는 주의문을 떼어내고 배터리를 채우고 셔터를 눌러보았다.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렌즈도 없이 반투명의 우유빛 바디캡만 덩그러니 붙어있는 카메라.
그렇게 하루 하루 지나가고, 드디어 50mm 렌즈를 구입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처음 넣은 필름은 Kodak Plus-X 필름. 왠지 그러고 싶었다. Tri-X, T-Max 필름도 있었지만, 왠지 꼭 그래야만 할것 같았다. 렌즈를 구입하기 위한 기간 동안 렌즈없는 바디를 수도 없이 만지고 눌러보고 메뉴얼은 5번은 넘게 정독했었던듯 싶다. 잘때는 배게 곁에 놔두고 잠을 자기도 했었다.
렌즈를 F 마운트에 끼우고 완벽한 정착을 위해 렌즈를 완전히 돌리는 순간, 바디에선 소리도 되지 못할 정도의 작은 소리로 \’틱\’ 하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이미 심장은 터지기 직전이다. AF-S 모드로 맞추고 AF를 가동해보는 순간, 심장이 터지는 것 따위 아무런 상관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문득 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F5가 날 주인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구입을 했다. 법적으로는 당연히 내가 주인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보다. 아무리 만지작 거려도 감정의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난 우습게도 조그만 상처를 받았다. 어쩌면 내가 너무 과욕을 부린건지도 모르겠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사진도 못 찍는 놈이,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할 능력도 없는 놈이, 이런 바디를 사서 상처 받은 것이다.
그래. 친해지자. 그리고 익숙해지자. 그러다 보면 몸에 붙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난 너의 주인이다. 하지만, 속절 없는 성냥개비 같은 마음속 메아리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1년 정도의 시간을 보낸듯 싶다.
녀석도 나도 서로에게 조금은 익숙해졌다. 녀석은 처음으로 렌즈를 마운트 하던날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서로에게 익숙하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조그만 돌맹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표정도 있고 감정도 있다. 심지어 사람이 만든 카메라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녀석은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아무 말이 없다. 무뚜뚝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무기질. 바로 그 느낌이었다. 아무런 에고도 느낄 수 없는 카메라 라니… 그리고 언제 부터인가 어디를 가든 항상 녀석은 나와 함깨였다.
어느날, 카메라가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히 손에 들고 있는건 맞는데 카메라가 느껴지지 않는다. 셔터를 누르고 있어도 셔터를 누르는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진을 찍고 있어도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나의 몸.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약간의 돈이 생기면 필름, 약품, 인화지값을 제하고 나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악세사리를 붙여주었다. 녀석의 기분(애당초 그런게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악세사리를 붙이는 순간, 그 자체도 무기질로 되어 버렸다.
8년이란 시간동안 내가 본 것, 내가 느낀 것, 내가 생각한 것, 내가 바라본 것, 내가 희망했던 것, 내가 표현하고 싶어 했던 것을 녀석은 아무런 방향성도 감정도 따뜻한 혹은 차가운 말 한마디도 없이 그대로 받아주었다.
난, 사랑을 했었다. 숨쉬는 것의 절밤함을 느꼈다. 증오를 했고 숨쉬는 것에 대한 절박함을 느끼기도 했다. 갈곳 없이 떠돌기도 했고, 분노를 하기도 했다. 방향성과 정체성을 찾지 못한체 나 자신을 괴롭게 만들기도 했다. 애증에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있기도 했으며,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하는 것 마저도 싫은 것 들을 찍었다. 고독하고 외로웠다. 칼바람이 에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남포동의 이른 새벽을 묵묵히 계속 걸으며 폐속 깊이 따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곤 했었다. 조그만 애정 한조각을 동정 받기도 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나날이 계속 되기도 했다. 무관심과 염세주의에 질퍽거리기도 했었다. 때론 어쩌다 따뜻한 온기어린 시선을 가지기도 했다. 내가 \’본 것\’들……을.
녀석은 아무런 여과 없이 필름속에 녹여냈다.
8년 동안 그렇게 녀석과 나는 같이 지냈다. 그 기간 동안 녀석은 딱 두번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난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단지 잠자코 듣고만 있을 뿐이다.
어제 오후, 녀석을 보내기 전에 나의 흔적들을 나의 청춘이 고스란히 베어있는 녀석의 모습을 찍었다. 세월이 제법 흘러서인지 녀석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노긋노긋 해진듯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여전히 무기질 이었다. 최후의 최후까지도.
녀석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데엔 조금은 아니 매우 우습게도 – 그리고 눈물이 날 만큼 슬프게도 – F6가 날 도와주었다. 나의 청춘을 그렇게 바라보고 느끼고 찍었다. 하지만 느꼈던 만큼 찍질 못했다. 미처 1롤도 채우지 못한체 촬영을 끝냈다.
그리고 녀석은 마지막 3번째로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하다가 아무말 하지 못하고 – 어쩌면 정말 나에게 간절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느낌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말 하지 않은체 입을 받아버렸다 – 녀석이 처음나와 대면하던 장소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악세사리는 다 떼어내고 원래 있던 필름 백커버를 녀석에게 돌려주었다. 셔터박스에 있는 주의문을 다시 붙이고 – 난 그것을 버리지 않던 것이다 – 원래 있던 배터리하우징 속에 새 건전지를 채웠다. 침착하지 못했다. 손에서 식은땀이 난다.
그렇게 스티로폼 박스에 넣어지고 유치하리만치 찬란한 금빛 종이 박스 표면,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졸렬 하리만큼 강렬한 금빛으로 로고 내부가 채워진 검은색 라인으로 F5로고가 찍혀 있는 종이 박스속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남아있던 보루지 박스에 다시 넣고 택배회사 접착테이프 속에 봉인이 되었다.
택배직원이 차가운 겨울밤의 칼바람을 뚫고 박스를 가져갔다.
아마 지금쯤 어딘가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얼굴 모르는 어떤이의 어께위에 걸쳐질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 광경이 상상되지 않는다. 똑같은 F5지만 같은게 아니기 때문이다. 똑같은 겉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느낌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정말로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일어 날 수 있는 일이고, 내일 점심께에는 틀림없이 그렇게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靑春은 끝났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는 처음부터 녀석과 함께한 – 적절한 단어가 모두지 생각나지 않는다 – 구형 50mm 렌즈가 붙어있는 F6가 오도카니 나를 보고 있다.
1.
몇일전 드디어 코트를 한벌 구입했다.
같이 동행해준 K군과 함께 십여군대 정도의 가게들을 둘러다니며
결국 구입했다.
그 중에서도 굉장히 쏙 마음에 드는 코트가 한벌 있었는데.
왠지 옷이 몸에, 몸이 옷에 착 붙는 정말 잘 짜여진 코트 한벌이 있었다.
속 마음으론 조금 비싸더라도 돈을 좀 빌려서라도 구입 하고 싶다.
마침 K군도 옆에 있으니 조금이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 될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얼맙니까?\’
\’네. 손님 30% 세일기간을 계산하면… 150만원 입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코트 구입시 구입 가능 가격은 15만원에서 최대 18만원까지. 이 돈을 손에 쥐기까지 굉장히 힘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겨우 마음에 드는 코트를 찾아냈다. 물론 100% 만족까진 아니지만, 90% 까지 만족이 된다. 가격도 17만9천원. 최~~~대 한도액에서 1000원 남는다.
옷감이 두툼하고 약간한 무겁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도 옷이 쉽게 흩날리지 않고 체온을 보호해준다. 색도 주광에선 회색빛이, 형광등 밑에선 검은빛이 도는 색이다. 참 좋다.
게다가 어깨의 제단, 봉제선의 처리가 좋아서 카메라를 들고 팔을 움직여도 전혀 불편하지가 않다. 이건 나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아무리 멋있어 보여도 이게 해결 되지 않으면 안된다.
앞으로 십년은 입어야 하지 않겠어?
: )
2.
내가 메인으로 사용하고 있는 베셀러 확대기의 수평이 맞지 않았다. 원인을 조사하고 따져본 결과 콘덴서 렌즈의 수평이 틀렸다. 확대기를 뜯어서 들어내고 정리해야 한다. 게다가 손으로 맞추는 거니까 다시 한다고 해도 쉽사리 맞을리 따위 없다. 한가지 이상한건 예전엔 분명 테스트를 했을땐 확대기의 수평따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간혹 렌즈보드의 수평을 누군가가 건드려서 그야마로 엄청나게 (속에선 용암이 끓어 오를 정도로) 화를 내며 (누가 그랬는지 알수도 없는) 혼자서 삭이며 렌즈보드의 수평을 몇번 맞춘적이 있다. 그때도 콘덴스 렌즈의 수평따위는 맞았던 것이다.
이젠 이런 일로 짜증내는것도 귀찮아졌다.
느긋하게, 해야지 어쩌겠어. 라고 생각했다. 피일차일 미루다 결국 뜯어서 수평을 맞췄다. 천천히 렌즈를 닦아내고 두장의 대형 콘덴서 렌즈를 들어내고 위치를 바로 잡고 콘덴서 하우징 베럴의 위치도 바로 잡아주었다. 부품 하나가 유실이 되어 고민하던중, 종이로 대강 만들어서 보수해주었다.
테스트를 해보니 그래도 전의 상태보다는 훨씬 좋다.
침침하던 눈이 시원하게 떠지는 느낌이다.
3.
G군에게서 확대기와 토요뷰 대형카메라, 대형 카메라용 트라이포드를 받았다. 당연히 나에게 완전히 주는것은 아니다. 먼지 쌓일바에 작업많이 하는 사람이 써야 좋다. 라면서 나에게 한아름 안겨주었다.
그 동안 작업실에 확대기가 아주 가끔 모자라는 경우가 있어서 상당히 고민하던 차에 나에겐 마른하늘에 단비같은 소리였다. 무엇보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무엇인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나로써도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더더욱 놀라운 것은 최근 대형카메라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던차에, 슈나이더 아포 (!!!) 짐마 210mm가 달린 대형카메라까지 나에게 안겨주었으니, 이거야 말로 놀랠 노짜 아니겠는가? 이로써 나의 사진세계는 더욱 넓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최근에 대형카메라 관련 서적을 다시 읽고 있다) 또한 이런 일과 관련해서 난 G군에게 일절 언급한마디 없었건만, 그저 너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일단 렌즈에 끼어있는 곰팡이만 제거하고 홀더와 현상탱크를 구비하면 일단은 준비 끝이다. 트라이포드는 군데군데 삐걱거리는 곳이 있지만 하루 날 잡아서 완전히 분해 한다음 깨끗히 수입하고 기름도 치고 나사도 조여주면 충분하고도 남을듯 싶다.
그러니까 말이지. 혹시나 이 일기를 보고 있는 분 중에, 쓰지도 않고 먼지만 쌓여있는 4×5 필름 홀더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큰소리(은밀히 해도 좋다)로 나에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4.
K양이 이어폰을 구입했다. 비교적 가격대 성능비가 좋고 바람이 쉽게 들지 않는 튼튼하고 음질이 비교적 좋은 (하지만 에이징에는 조금 시간이 걸리는) 모델을 구입했다. H카메라의 K사장님과 나, K양이 동행했다. 살랑 살랑 마실 다녀오는 기분이었는데, 왠지 약간은 푸근한 발걸음을 스스로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찾았던 모델은 있었고, K양은 그 모델을 구입했다. 색깔도 흰색이다. 아이포드와 잘 어울릴듯 싶다. 음질을 비교해봤는데 내가 쓰는 이어폰 따위 비교가 안된다. 다행이다 싶다. 돌아오는 길에 K사장님이 덜컥 저녁먹을꺼리를 구입하신단다. 지금까지도 이리저리 민폐를 많이 끼친터여서 가만히 있기엔 너무나도 염치없는 행동인듯 싶었다. 사람이 아무리 금전적으로 부족한 삶이라곤 하더라도 기본적인 도의 라는 것이 있다. 하다못해 조금이나마 꼭 보태고 싶었다.
\’에이. 괜찮아요\’
결코 받지 않는다. 돌아가는 길에 난 1.5리터 콜라를 한통 샀다.
그것만이라도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가계 사람들과 맛있게 먹었다. 콜라도 같이.
매번 신세만 지는것 같아서 미안스럽다.
추신1 : 밖에 있는 달의 모양이 매우 섹시하다.
추신2 : 가끔은 이런 일기 쓰고 싶을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