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제대로 이 날을 챙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할 수 있게 되었느냐고 한다면 꼭 그렇진 않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것에 대한 매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닿기 위해 긴 시간과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완성에 가까웠으나, 결과적으로 그 매듭은 사라졌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 했다. 세상 흔한 말인 만큼 그 마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소위 깨달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들이 세상엔 꽤 많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세상이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세상이야 어찌 되었든 적어도 나의 경우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 명하는 형식미에 따라, 적어도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방식은 불가능했다. 힘들고 아프기에 때론 몸을 마음을, 시간을 떼어낸 체 도망치거나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다시 제자리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영원한 형벌처럼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아니면 노을이 진 어느날 골목과 골목 사이로 밥 짓는 냄새가 올라올 때 엄마가 밥 먹으라며 부르는 목소리에 가지고 놀던 공이며 장난감이며 친구들을 내려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상처가 상기시키는 반복적인 알람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며 아물지 못한 채, 마치 환상통처럼 원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사라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엔 마치 있는 것처럼 실감 나게 욱신거리는 기묘한 감각은 나의 의지 따위와는 무관하게,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때론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고통이 들어올 땐 잠시 눈을 돌린다고 하더라도 나의 의지나 희망이나 바람과는 무관히 계속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렇기에 결국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있을까.
작년 가을에 이와 관련한 전시를 하고 책을 만들었다. 그 이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고 그에 따른 나의 정신적 상황과 처신으로 인한 약간의 문제가 생기기도 했는데 그것이 해결되기 보다는 적당히 뭉개진 형태로 틀어막은 것처럼 되었다. 누굴 탓하랴. 그렇게 해를 넘어 기어코 어머니의 기일은 점점 다가왔다.
마음을잡지 못한 체 구정 일주일 전 어머니의 남동생, 나에겐 외삼촌에게 찾아봬도 되겠냐고 연락했다. 외삼촌에 대한 죄의식을 외면하기에 어려웠지만 외삼촌은 거대한 검붉은색의 조용한 바위 같은 사람이다. 적어도 싫다고 할 사람은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다. 구정 하루 전에 보기로 하고, 하루에 버스가 3번 운행하는 곳에 도착했다. 차로 두어 시간 거리지만 여기에 다시 오는 데는 십 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세월이 흘러 외삼촌도 검붉은 커다람의 사이와 사이엔 조금씩 깨져나가고 갈라진 틈새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 사이로 조용히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조금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 자식이 죽은 줄도 모르는 치매 상태인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인지능력 상실 상태의 외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외할머니의 꼬깃꼬깃 접힌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문득 맥락 없는 작고 따뜻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외삼촌은 나에게 밥을 먹이고 싶어 했다. 그것이 어떤 마음에서인지 모르지 않았다. 밥을 먹고 아무짝에 쓸모없는 이야기들과 외삼촌의 그간 신변에 관한 일들, 외할머니의 일들, 시골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그리고 누나의 관한 이야기들, 외삼촌이 나에게 했던 말 중 경찰과 법원에 드나들던 당시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말했던 이유에 관한 말들, 누나가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을 줄은 몰랐었다는 말들, 그리고 이런 아픔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어서 누나도 기뻐하셨을 거라는 말들.
나는 외갓집에서 잠시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 주변을 돌아보니 딱히 바뀐 건 없었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었다. 하지만 외삼촌이 나를 조금 용서해 주셨다는 것은, 나를 조금은 받아들여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갓집에 가는 결심을 하는 것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나의 용기에 비하면 외삼촌의 용서의 크기는 감히 헤아리기 힘들었다. 곧 기일이 온다는 말을 했다. 어디에 뿌렸냐고 하시기에 차근차근 알려드렸다. 뿌린 장소를 주의를 기울여 귀에 담아두셨다. 그리고 나는 기일에 꽃과 담배를 챙겨 갈까 합니다. 라고 했다.
버스 막차 시간이 되어 인사를 나누고 작업실에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인가 지나고 꽃과 담배를 주섬주섬 챙겨 배회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한 밤의 길 위에 나섰다. 나와 바다와의 2차원 직교 좌표계의 차이는 8미터 였다.
어느 배우의 자살과 정황 그리고 일련의 과정들과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이것이 우리 현재의 무엇을 말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읽던 중에 다음의 문장에서 나는 한참을 멈췄다.
”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를 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 사람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는데 그때의 구원은 쌍방향적인 것이다. 용서받는 자도 구원받고 용서하는 자도 구원받는다. 근데 이때 중요한 것이 참회의 행동이다. 참회라는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 죄과를 보다 엄중하게 물을 수 있다.
그가 구원받지 못하게 된 처지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
나는 잠시간, 저 말이 가지는 원래의 의도와 맥락에서 분리하여 글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매듭을 묶고 싶었던 나는 그 매듭을 묶을 끈을 만들기 위해 무척 애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매듭을 묶을 때 쓸 끈이라는 것 자체가 나의 과욕이었을까.
그저 몇 가지 필연과 우연이 겹친 것이겠으나, 이것의 감정적 형태의 모습은 나에겐 어둑한 밤길을 걷다 고속으로 돌진하는 고장 난 자동차에 덮쳐진 것 같다면 과장일까. 그래 뭐 아무렴 어떻냐만..
계속하다 보니 어딘가 쿰쿰한 기분이 든다. 무엇인가와 닮았다는 끈적끈적한 느낌이 엷게 콧구멍 속을 찝쩍거린다. 순간 플리퍼가 멈추었고 마지막 남은 공이 떨어졌다.
최초로 핀볼과 마주한 것은 8살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전자오락을 좋아해서 어린 나이에 용맹하게도 혼자 버스를 타고 켜켜이 굽어있는 산복도로를 지나 부산 남포동 시내까지 원정을 나가서 전자오락실에 가곤 했었다.
시내의 전자오락실은 소위 동네 오락실과는 전혀 분위기가 달라서 덩치가 아주 큰 녀석부터 일반적인 캐비넷 형태의 것들까지 종류도 다양했고 무엇보다 동네 오락실에는 없던 최신 게임들이 있곤 했다. 그렇게 1~2주에 한 번씩 원정 게임을 하러 가곤 했었던 것이 나의 유년 추억 중 하나다.
어느 날 남포동 시내 오락실에 태어나 처음 보는 녀석이 들어왔었는데 익숙하게 보던 CRT의 화면은 전혀 없고 땡기는 레버와 버튼이 하나씩 왼쪽과 오른쪽에 붙어있는 지극히 간단한 그리고 무척이나 거대한 녀석이 들어왔다. 난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몰랐지만 어쩐지 그 크기에 압도되어 주눅 들었다. 어른 한 명이 멋을 부리며 동전을 넣고 레버를 땅기자 공이 튀어나왔다.
무척이나 맑은 스테인레스 공이다. 저걸로 머리를 맞으면 무척 아프겠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눈으로만 봐도 단단한 느낌의 반짝거리는 공이 ’공간’의 좌우를 가른다. 뭔가가 닿으니 튕! 소리가 나면서 요란한 불빛들이 반짝인다. 도대체 이건 뭐지? 딱히 피한다거나 맞춘다는 것도 모르겠고 뭔가를 어떻게 어떻게 하면 또 뭔가 열리는데 도대체 규칙도 모르겠거니와 버튼을 누르면 까닥까닥하는 이 막대기로 단지 공을 튕기고, 구멍 아래로 빠지면 게임 오버. 이런 간단한 규칙으로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담? 싶었지만 그것은 무척 잠시였다.
공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희한하고 아름다웠던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공의 움직임인데도 간혹 보기 좋게 내 예상이 빗나가는 반짝이던 공의 움직임은 변화무쌍한 포물선을 그리며 하염없이 테이블의 공간 속에서 춤췄다. 이것이 나와 핀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홀린 듯, 손에 쥔 땀에 쩔어있는 소중하디 소중한 동전을 겨우 밀어 넣고 처음으로 레버를 당기자, 공들이 튕기면서 화려한 소리와 음성들이 들린다. 벽면을 때리고 타겟을 때리고 알 수 없는 양키 말로 뭐라 뭐라 떠들어대는데 국민학생이 뭘 듣고 알겠는가. 그냥 공이 내려오면 버튼을 눌러 막대기를 튕기고 그렇게 공을 계속 튕기다가 어처구니없게 공이 죽음의 땅으로 떨어지면 심플하게 끝이다.
보는 것에 비해서 직접 해보니 너무나도 어려웠다. 도대체 이렇게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해? 무엇보다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불합리하다. 테이블의 정중앙에서 90도 각도로 내려오면 좌우의 막대기로는 막을 수도, 튕길 수도 없다.
공의 움직임이 예상되는데도 그냥 멀뚱히 바라보며 공 한 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게 참 마음이 좋지 않다.
금방 싫증을 느낀 나는 어쩌다 간혹 장시간 은구슬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20분이고 30분이고 싫증 내지 않고 보는 정도였다. 아무튼 공이 만들어내는 궤적은 굉장히 신기했으니까.
’아저씨 이거 뭐라고 부르는 거예요?’ ’핀볼 이라고 해’ ’핀볼요? 이름이 이상해요’ ’아무튼 이것의 이름은 핀볼이야’
시간이 흘러 다양한 종류의 게임이 나오고 그만큼의 시간 동안 동네 오락실에도 시내 못지않은 최신 게임들이 들어오곤 했었다. 하지만 핀볼 만큼은 동네 오락실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 원정을 나가야 할 수 있는 게임.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핀볼을 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듯싶다. 아무도 하지 않는, 게다가 그 시간 동안 반짝 반짝 거리는 느낌은 전부 사라지고 이미 검은 때가 구석 구석 박혀있던 낡아버린 핀볼 테이블에 동전을 넣자 주르륵 소리가 나오며 내가 공을 튕기길 기다리는 기계를 봤을 때, 내가 공을 튕기지 않으면 기계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런 짧은 순간, 가슴이 허-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또 흘러 대학생이 되고선 아주 가끔 근방 오락실에서 핀볼 게임을 하곤 했다. 희한하게도 핀볼을 하고 있다 보면 이상하게 외로운 기분이 들곤 했다. 자세한 규칙에 대해서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고 재미있게 하는 방법과 몇 가지 사소한 요령도 터득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조금 외로운 기분이 든다.
단지 플리퍼를 까닥거리는 것만으로 많은 것들이 반응한다. 공의 속도와 각도 그리고 제일 중요한 타이밍에 따라서 각도는 변화무쌍하다. 당연히 전략도 필요하다.
그리고 정말 아주 약간의 차이에 의해서 마치 나비효과처럼 예상치도 못한 형태가 생기곤 한다. 운이 따라주는 것도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플리퍼를 치는 그 한순간마다 이후에 일어날 모든 일은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득 그것이 난 소름 끼쳤다.
그 뒤로 오랜 세월 동안 핀볼 게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에 들어 정교한 물리엔진으로 만들어진 컴퓨터로 하는 핀볼이 아닌 핀볼 기계 관리자가 와서 나사를 다시 조이고 각도를 맞추고 램프의 상태와 플리퍼의 각도와 고무줄을 체크해야 하는 진짜 핀볼 게임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진짜 핀볼 게임을 할 수 있는 날은 다시 오지 않았고 지금은 컴퓨터로 간혹 핀볼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지나갔다.
삶과 무척 닮았구나. 라고.
그리고 위의 글을 쓴 11년 후, PC용 핀볼 게임 제작사에게 이런 글을 썼다.
때론 인생은 핀볼이랑 어딘가 약간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전체적인 규칙이 있고 그에 따른 달성해야 할 스테이지가 있다. 마치 우리가 태어나 나이에 따른 달성 해야 할 목표처럼. 하지만 제대로 노린다고 해서 항상 그렇게 달성되는 것도 아니며, 무조건 노력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때론 행운의 실수로 잘 풀릴 때도 있다. 또한 흐름을 잘 타서 진행이 잘 되는 중에도, 예상 밖의 연쇄 작용으로 어쩔 도리 없이 어두운 구멍에 빨려가는 경우도 흔하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론 결정론적 물리 세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다.
수천 년 전의 인간과 지금 인간의 삶이 가지는 형태는 많이 다르지만, 근본적인 행동 원리는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럼에도 역사의 더께가 쌓여가며 조금씩 발전 해나가는 것과 같이, 핀볼 또한 거듭해 가며 쌓인 경험에 따른 노련미로 전체적인 흐름이나 리듬을 읽어가게 되는 과정들을, 단지 버튼 두 개만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핀볼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오랜 핀볼 팬으로서 실제 핀볼을 플레이하기 어려워진 세상 때문에 결국 PC로 핀볼을 하면서 대리만족했었으나 항상 마음이 허전했었다. 그렇게 점점 핀볼과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 취미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이 핀볼을 처음 봤을 때, Zen Studios의 오래된 IP를 단지 재활용해서 VR로 껍데기만 바꾼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경우 VR로 하는 핀볼은 이번이 첫 경험인데 아직까지도 물리 엔진의 미묘한 아쉬움 같은 게 있었지만, 플레이를 거듭하는 동안 결국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훌륭한 경험을 했다. 바로 이것이 아날로그를 넘어 디지털 시대의 핀볼이 가져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자 경험이다.
덕분에 십수 년 동안 죽어있던 나의 핀볼 취미가 다시 살아났다. Zen Studios에게 진심의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아케이드 모드에서 에피소드 4 테이블의 세계 랭킹 1위가 될 때까지 플레이 하면서 느낀 아쉬운 점을 이야기 하자면 Quest 2의 하드웨어 연산 능력에 따른 한계인지 모르겠지만 게임 내부 설정에서 고해상도 모드로 진행을 해도 여전히 해상도가 아쉬웠다. 테이블의 플레이 필드 아트워크는 스토리, 지시성, 플리퍼 동작 타이밍의 힌트와 더불어 아름다움 또한 핀볼의 매우 중요한 점이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Zen Studios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타협을 한 결과겠지만 플레이를 거듭해 갈 수록 이 부분이 계속 아쉽게 느껴진다. 또한 간혹 초당 프레임이 순간적으로 렉이 걸리는 경우가 있었다. 좀 더 최적화를 진행하여 네이티브 렌더링 지원된다면다면 핀볼 팬으로서 너무나 기쁠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역시 하드웨어 연산 능력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Zen Studios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광원 처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핀볼의 정서적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시시각각 변하는 불빛으로 물드는 테이블의 광원과 볼에 반사된 주변 시야에 따른 정서적 고양감인데 과거 Zen Studios에서 만들었던 테이블의 매력적인 광원 처리가 빠지고 Baked Lighting으로 대체 한 것이 쓸쓸했다.
이것 만큼은 VR 하드웨어 성능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쓸쓸한 건 쓸쓸한 거다.
멀리 한국에 있는 핀볼 팬 중 한 명으로서 Zen Studios에게 감사와 찬사를 보내며,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핀볼 팬이면서 VR를 가지고 있다면 플레이 하지 않을 이유 따윈 하나도 없다. 이건 꼭 경험해야 한다.
그렇게 위의 글을 쓴 날로부터 다시 몇 달 후 나는 총 11개의 테이블 중 4개의 아케이드 테이블에서 세계 랭킹 1위를 했다.
계속하다 보니 어딘가 쿰쿰한 기분이 든다. 무엇인가와 닮았다는 끈적끈적한 느낌이 엷게 콧구멍 속을 찝쩍거린다. 순간 플리퍼가 멈추었고 마지막 남은 공이 떨어졌다.
그로 부터 2년이 지나 지났지만, 내가 다시 핀볼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올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 봐야 핀볼, 고작 핀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볼.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진정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한 달이 지난 나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과 복수에 물이 가득 찬 것처럼 혹은 산소가 부족한 고산지대의 가쁜 호흡 같은 감정을 매일 마주하고 있다.
일상을 조금 바쁘게 지내면 일시적 마취 효과라도 생길 것이라는 생각에, 당장 쓸 때는 없지만 예전부터 간간히 해왔던 비생산적이며 반복적인 것들에 조금 더 몰두했다. 덕분에 관련 기술들은 조금 더 단순해지고, 조금 더 결과가 좋아졌다. 하지만 이런 도피처에서 영원히 있을 순 없기에, 결국 다시 땅 끝에 발이 닿고 나면 오히려 그간 도망쳤었던 시간 만큼의 분량을 더하고 거기에 이자까지 더해서 나를 깔아뭉갠다. 이를 몇 번 반복하면서 점점 악화되었다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친구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나의 이야기가 복잡하여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내가 순진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복잡하다고 말하는 그가 잘 이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복잡하다는 관점으로 다시 보기로 했다.
복잡한 것은 단지 복잡하기에 잘 이해 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이 이야기가 복잡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정적 준위 차이 혹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하면 끝날 일이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중 한 가지가 있다. 이해 되지 않는 모든 것은 복잡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단지 복잡하다고 해서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니듯.
다시 혼자로 돌아왔다. 언제부터였을까, 걷고 있다고 생각 했지만 사실 땅도 하늘도 바람도 꽃도 별도 달도 없는 공간이라는 개념 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그저 걷는다는 동작 혹은 행위의 형식만 반복 했을 뿐, 실제로 걷는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을 일평생 해왔던 것은 아닐까.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자명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마치 무한한 자유는 그 자체로 자유가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혹은 무한의 확률은 확률 그 자체의 의미가 사라지고 오직 확률에 의해 발생한 사건과 사건의 중첩이 세계를 이어가듯 말이다.
산소가 얼마 남지 않은 느낌이다. 실제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힘들다. 신문지의 잉크를 졸여놓은 듯한 들숨과 날숨이 시커멓게 내려앉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죽을 리는 없다. 여행을 다녀오라는 말을 들은 게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느낌이다. 분노와 허탈과 까만 들숨과 날숨, 엉킨 뇌수와 호흡이 가쁜 몸은 내가 원하고 바란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 발버둥을 친게 아니다.
Nikon F6 이전에, 8년 동안 꽉 채워 사용했던 Nikon F5는 내가 생각하는 카메라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F5는 가장 무감하고 무기질적이다. 그야말로 내 이상에 가장 가까운 카메라였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서 카메라 라는 개념을 현실로 완성한 것이 F5였다. 난 아직도 F5를 뛰어넘는 카메라를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이미 완성 돠었기에 완성을 뛰어넘을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F6는 완성애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남으로서 생기는 여유 공간에 보다 친절하고 상냥한 느낌이 들었다. F5보다 맑고 밝은 파인더는 세상을 조금 더 밝게 봐도 자신을 속이는 일은 어닐거라고 말해주었고, 셔터음과 셔터 진동이 몸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주는 느낌은, 너무 분노하지 말고 너무 실망하지 말고 너무 기대하지 말고 그저 내면에 떨어지는 물방울들의 소리를 조금 더 들어봐라고,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카메라와 랜즈와 너의 눈과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거리는 F5가 해줬을지 모르지만, 무릇 뼈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어닐터이니 거기엔 살과 피가 있어야 할 것이기에 반발짝만 뒤로 물러나서 촬영해도 괜찮다고… 그렇게 나에게 말하는 듯 했다.
그로 부터 8년 동안 꽉 채워 F6와 함께 했고, 다시 그 뒤로 11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F6를 뛰어넘는 카매라를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 작업이나 사진이 변했는가 하면 그리 달리진건 없다. 결과물만 보자면 관점에 따라선 더 정제된 것들이 나오기도 한다. 한가지 다른게 있다면 F5나 F6와 함께 할땐 작업적 외로움이 크지 않았다면 지금은 그 외로움이 커졌다는 것이다. 말 없이 항상 그 자리에 같이 있는 동료나 조력자 혹은 이해자와 함께 하는 느낌이 도무지 들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말이 많고 미리 준비해둬야 하며, 분주하기에 멀리 투명하게 보려하면 언제나 중간에 눈먼 소리를 끼워 넣는다. 이건 이것 대로 그리 나쁘진 않지만 그저 카메라를 통해 생을 목도 하고 싶을땐 언제나 방해가 된다.
그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셔터를 누른다는 이 단순한 일련의 행동 조차 이리 민감한 일인데, 살아내간다 라는 것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세상 수많은 ‘상투적’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은 분들이 봐주셨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관객이 울음을 삼키거나 숨을 삼키는 소리가 갤러리의 여기저기서 들리기도 했습니다. 또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상투적 가정에 관한 경험은 그야말로 우리네의 상투적 경험이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갤러리 토크에서도 이야기했었지만, 이 작업에 있어서 작가 개인의 생각과 희망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이 작업을 보면서 별 다른 감정 없이 유유히 갤러리를 나가는 관객이 제일 좋다는 생각입니다. 저마다 자신만의 지옥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곤 하나, 그 와중에도 적어도 이번 작업이 와 닿을 일이나 필요 없는 삶이 주어지고 이어 나가는 분들인 것이지요. 다행인 일이 좋은 일 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이번 작업을 보면서 누군가가 떠오르는 경우입니다. 그 대상은 친구, 연인, 부모 혹은 관객 자신인 경우도 있겠습니다. 떠오르는 것이 자신의 경우, 어느새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의 자신이, 작업이 마주하여 그 안에서 벌어지는 기억의 호출과 내적 감정 그리고 환기되는 고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관객 중엔 작업을 다 본 이후, 마음이 눈물의 무게를 견디기 버거워 그대로 갤러리를 나가는 분도 있었고, 어떤 관객은 그대로 나간줄 줄 알았는데 갤러리 바로 몇 발치에 있는 바다를 보며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있다가 다시 갤러리에 와서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는 분도 있었습니다. 다시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을 터인데, 차오르는 눈물이 멈추질 않아도 느린 걸음으로,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을 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때론 특정 사진 앞에서 오래도록 서서 보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도록 서서 보는 장면은 저 마다 다 달랐습니다. 어떤이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가운데에서도, 기묘하게도 위안과 위로를 받았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당연하지만 저 마다 각자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특정 영역에 길게 수렴하는 것을 목도 했습니다. 때론 자신의 친구 이야기를 하며, 어머니를 남겨두고 도망쳤던 친구에게 질타했었는데 이제서야 그 친구의 마음이 어땠었을지 이해가 된다며 그 친구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은 분도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해준 분들이 서로 전부 다른 사람임에도, 내용을 텍스트로 바꾸고 말하는 사람을 지운 것을 본다면 누가 이야기를 했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상투적’ 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대로 도망치듯 갤러리를 나간 분도, 밖에 잠시 앉았다가 다시 갤러리에 와서 재차 마주하는 분도, 고통 속에서도 기묘한 위안과 위로를 받았다는 분들도. 친구의 고통을 이제야 알 것 같다는 분들도. 그것은 아마도 관객이라는 개념을 넘어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서 작업을 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찌그러진 식물의 섬’ 을 갤러리에서든 책으로든 접했던 분들이 떠오르는 이가 있어서 이것을 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 했을 때, 바로 건네는 것 보다는 이 작업을 받을 분을 생각하며, 이것을 보이는 게 좋을까? 어떤 말로 전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하고 전시든 책이든 전하는 것까지가 저의 이번 작업의 범위라고 생각 했습니다. 비록 전하는 행동이라는 그 자체는 결과적으로 같더라도 잠시나마 생각하고 전하는 것과, 바로 건네는 것의 차이엔 의미가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번 작업의 출판과 전시가 결정되었을 때부터 품었던 희망이 있었습니다. 전시가 끝나고 난 뒤, 책을 들고 병원에 가서 치매에 걸려 자신의 죄에 따른 형별에서 자유로워진 생부를 만나는 일 이였습니다. 저로서는 어떤 감정이 들지 예상 할 수가 없었기에 몇 가지 상황에 대한 것만 생각 할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처음엔 먼 발치에서 생부를 보다가 책을 그대로 가방에 넣은 채로 돌아온다던가, 혹은 뭔가가 느껴져 중간 즘 거리에서 보다가 역시 그대로 돌아온다던가, 아니면 좀 더 가까이 가서 눈동자를 본다던가 라는 그런 것 말입니다. 치매 환자를 경험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과거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미래가 사라지기에 현재와 과거는 더욱 가속하여 망실이 됩니다. 하지만 뇌의 가장 깊숙한 속에 자리 잡아 그 사람을 구성하는 핵심 기억의 파편들이 명확하게 노출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생부를 이해하는 것까진 힘들더라도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생부를 알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핵심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관찰하고 조합하여 이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것에 따라 저는 화를 내거나 분노하거나 저주하거나 혹은 넓은 의미에서의 자비이거나 또는 용서 같은걸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몇 가지 상황에 따라 책의 특정 페이지를 보여주려는 준비도 했습니다.
그렇게 매듭을 지어야 하는 일이였습니다. 매듭을 묶는데 쓰이는 끈의 소재는 따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애초 내가 특정 소재의 끈을 원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닐 뿐더러, 길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국 주어지는 것이기에 매듭을 묶는 끈의 소재가 화가 되었던 분노가 되었던 저주가 되었던 자비가 되었던 용서가 되었던 따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장장 40여 년에 걸친 일련의 궤적과 4년에 걸친 발버둥 끝에, 그저 매듭을 묶는 끈이 있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싶은 마음이였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그 끈의 소재에 따른 뒷감당은 제가 오롯이 받아내야 하는 것이라 생각 했습니다.
하루하루 전시가 끝나는 날을, 고대하고 고대하던 와중 전시가 끝나기 얼마 남지 않은 날, 생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하여 옆에 사람이 있는 것조차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 같은 게 있어서 전시 끝나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올 때마다, 저의 발자국 소리가 쿵 쿵 울리며 다가오는 것을 생부가 알게 되어 하루 지날 때마다 나의 발자국 소리가 무서워 도망이라도 쳤나보다. 내가 매듭을 짓는 것조차 이 양반은 싫었구나. 같은 소리를 했습니다. 참으로… 최후의 마지막에 끝자락 까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삶의 모습이라 생각 했습니다. 혼자 장례식을 마치고 바로 그다음 날 있는 갤러리 토크에 나갔습니다. 생부의 사망을 알릴 수는 없었기에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2회차 갤러리 토크를 마쳤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매일을 두고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직 결정되지 않아 지금 말 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이 내용은 형태를 달리하거나 혹은 처음 떠오르는 대로 결정되거나 할 것 같습니다. 매듭을 묶을 끈이 없으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매듭을 지어야 제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이 되었건 제가 해야 하는 매듭이 되리라 생각 합니다 그리고 결국 전시 마치는 날이 왔습니다.
전시 철수 중에 학교 후배들이 왔습니다. ‘찌그러진 식물의 섬’ 작업에 위안과 위로와 용기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후배의 잔잔한 말과 행동 속에서 저를 향한 깊은 감사와 선의 그리고 호의에 의한 모습들이, 제 마음의 깊은 곳에 있는 매듭과 관련된 무엇을 헤집어 놓았습니다. 이마저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어쩌면 저는 조금은 휴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방명록을 다시 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불모지라 불리는 예술 서적 출판이라는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출판사 헥사곤의 조동욱 대표와 조기수 에디터 그리고 전시 진행을 함께 해주신 김영호 관장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관람객분들과 책을 봐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모쪼록 작업을 접하시고 잠시간이나마 어떤 종류의 ‘환기’가 되었다면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 입니다.
꽃이 피었어요 꽃이 꽃이 피었어요 매서운 바람에 겁에 질린 누구도 본 적 없는 꽃이 피어있나 봐요
꽃이 피었어요 꽃이 꽃이 피었어요 매서운 바람에 겁에 질린 누구도 본 적 없는 꽃이 피어있어요
꽃이 꽃이 피었어요 꽃이 꽃이 피었어요 본적 없는 꽃이 피어있어요
꽃같은건 없어 그런건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리했는데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꽃이 있어요
누구도 본적 없고 보일리도 없고 피어날리 없는 꽃이 피어있었고
그곳에 역시 그곳에 분명히 그곳에 그곳에 있어요 꽃이 피었어요 꽃이 꽃이 피었어요 지독한 바람에 겁먹은 누구도 본 적 없는 꽃이 피어있나 봐요
그러면 그렇다면 그것은 지독한 바람에 겁먹은 누구도 본 적 없는 꽃은 꽃은 꽃은 바람에 겁먹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흔들려지고 겁먹고 떨고 바람이 불면 꽃의 풍설을 싣고 왔기에 바람이 무서웠던 꽃은 흔들리고 겁내고 바람에 흔들리고 흔들려지고 겁내고 바람에 흔들리고 흔들거려지고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보일 리도 없는 꽃은 바람에 겁이 질려 요동하며 흔들리고 흔들려지고 바람은 꽃의 소문을 불어날라 실어 가기에 바람에 흔들리고 흔들거려지고 꽃은 진동하며 흔들려지고 진동하며 흔들려지고 바람에 바람에 바람에 바람에 움직이며 흔들려지고 겁에 질려 있는 모양이에요
꽃이 울어요 꽃이 꽃이 울어요
끔찍한 바람에 맞아버린 빛을 본 적 없는 꽃이 울고 있어요
이전 바람 소리보다 더 바람 소리에 소리의 바람이 바람 소리의 바람보다 더 소리의 폭풍에 광풍의 폭풍이 그랬는데 그랬더니 꽃이 꽃이 울었어요
꿈 같은 건 없어 더는 바람 같은 것도 없어 물론 구름도 움직이질 않는데 그런데 그런데도 꽃이여 그것은 꽃은 어둠을 고른 어둠을 사랑하여 꽃은 어둠에 노래하고 사랑하며 그렇기에 흐느끼며 어둠에 울며 그런데 그랬는데 꽃은 어둠에 울음이며 선택받고 노래하고 사랑받으며 빛을 본 적도 없는 꽃은 선택받고 울고 사랑받으며 그럼에도 어둠을 사랑하는 것 같다
꽃이여 꽃의 꿋꿋한 마음에 빛이 웃음 지어 주는 것처럼 굴하지 않는 마음의 꽃이 바람에 흔들려지는 것처럼 어둠에 눈물 흘려지는 것처럼 가위가 갈려 나가는 것들처럼 잘려 나간 것처럼 흔들려지는 것처럼 울려지는 것처럼 잘려 나간 것처럼 꽃은 달을 봐 별은 안돼 어둠이여 달은 진짜 빛이야 아니 별도 아름다워 달빛 같은 것이 진짜 별빛 같은 어둠이다 아니야 어두운 달이 진짜 빛이야
진정한 빛이여 진정한 빛이여 그렇다면 그렇다면은 어둠의 눈물을 두고 돌아갈지어다 어둠은 달을 읽는 자이다 꽃에 빛을 꽃에 빛을 꽃에 빛을
‘찌그러진 식물의 섬’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이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이를 엮은 작품집이 책으로 현재 발매 중입니다.
책으로 먼저 접하고 전시장을 찾아주신 분도 있으시고, 전시장에서 작업을 보고 책을 손에 든 분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먼저 접했는가에 따라 느껴지는 결의 차이는 저마다 다르겠고, 전시장의 마지막 장소 혹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은 후 느끼는 마음, 감정, 생각.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감에 따른 다름이 있음에도, 특정 영역대에 길게 수렴하는 부분 또한 있었지 싶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 모든 이를 위한 전시이자 책은 아니겠으나, 그렇기에 닿았으면 하는 사람에겐 닿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즐거운 추석 명절과 연휴 보내시고, 가족과 함께 화목하고 소중한 시간 되시길 염원 합니다.
더불어 추석 연휴 및 평시 갤러리 개관 일자 안내 드립니다. 추석 당일 29일은 휴무입니다.
전시 기간은 9월 15일 (금) ~ 10월 13일(금)까지이며 개관 시간은 오전 11시 ~ 오후 6시까지입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 입니다.
갤러리 토크(작가와의 대화)는 2회 중 1회 진행 하였고 다음 갤러리 토크는 10월 7일 (토) 오후 4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