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하다 보니 어딘가 쿰쿰한 기분이 든다.
무엇인가와 닮았다는 끈적끈적한 느낌이 엷게 콧구멍 속을 찝쩍거린다.
순간 플리퍼가 멈추었고 마지막 남은 공이 떨어졌다.
최초로 핀볼과 마주한 것은 8살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전자오락을 좋아해서 어린 나이에 용맹하게도 혼자 버스를 타고
켜켜이 굽어있는 산복도로를 지나 부산 남포동 시내까지 원정을 나가서
전자오락실에 가곤 했었다.
시내의 전자오락실은 소위 동네 오락실과는 전혀 분위기가 달라서
덩치가 아주 큰 녀석부터 일반적인 캐비넷 형태의 것들까지 종류도 다양했고
무엇보다 동네 오락실에는 없던 최신 게임들이 있곤 했다.
그렇게 1~2주에 한 번씩 원정 게임을 하러 가곤 했었던 것이
나의 유년 추억 중 하나다.
어느 날 남포동 시내 오락실에 태어나 처음 보는 녀석이 들어왔었는데
익숙하게 보던 CRT의 화면은 전혀 없고 땡기는 레버와 버튼이 하나씩 왼쪽과 오른쪽에 붙어있는
지극히 간단한 그리고 무척이나 거대한 녀석이 들어왔다.
난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몰랐지만 어쩐지 그 크기에 압도되어 주눅 들었다.
어른 한 명이 멋을 부리며 동전을 넣고 레버를 땅기자 공이 튀어나왔다.
무척이나 맑은 스테인레스 공이다. 저걸로 머리를 맞으면 무척 아프겠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눈으로만 봐도 단단한 느낌의 반짝거리는 공이 ’공간’의 좌우를 가른다.
뭔가가 닿으니 튕! 소리가 나면서 요란한 불빛들이 반짝인다.
도대체 이건 뭐지? 딱히 피한다거나 맞춘다는 것도 모르겠고 뭔가를 어떻게 어떻게 하면
또 뭔가 열리는데 도대체 규칙도 모르겠거니와 버튼을 누르면 까닥까닥하는 이 막대기로
단지 공을 튕기고, 구멍 아래로 빠지면 게임 오버. 이런 간단한 규칙으로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담? 싶었지만 그것은 무척 잠시였다.
공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희한하고 아름다웠던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공의 움직임인데도 간혹 보기 좋게 내 예상이 빗나가는 반짝이던 공의 움직임은
변화무쌍한 포물선을 그리며 하염없이 테이블의 공간 속에서 춤췄다.
이것이 나와 핀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홀린 듯, 손에 쥔 땀에 쩔어있는 소중하디 소중한 동전을 겨우 밀어 넣고 처음으로
레버를 당기자, 공들이 튕기면서 화려한 소리와 음성들이 들린다.
벽면을 때리고 타겟을 때리고 알 수 없는 양키 말로 뭐라 뭐라 떠들어대는데
국민학생이 뭘 듣고 알겠는가. 그냥 공이 내려오면 버튼을 눌러 막대기를 튕기고
그렇게 공을 계속 튕기다가 어처구니없게 공이 죽음의 땅으로 떨어지면 심플하게 끝이다.
보는 것에 비해서 직접 해보니 너무나도 어려웠다.
도대체 이렇게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해?
무엇보다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불합리하다.
테이블의 정중앙에서 90도 각도로 내려오면 좌우의 막대기로는 막을 수도, 튕길 수도 없다.
공의 움직임이 예상되는데도 그냥 멀뚱히 바라보며 공 한 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게 참 마음이 좋지 않다.
금방 싫증을 느낀 나는 어쩌다 간혹 장시간 은구슬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20분이고 30분이고 싫증 내지 않고 보는 정도였다.
아무튼 공이 만들어내는 궤적은 굉장히 신기했으니까.
’아저씨 이거 뭐라고 부르는 거예요?’
’핀볼 이라고 해’
’핀볼요? 이름이 이상해요’
’아무튼 이것의 이름은 핀볼이야’
시간이 흘러 다양한 종류의 게임이 나오고 그만큼의 시간 동안
동네 오락실에도 시내 못지않은 최신 게임들이 들어오곤 했었다.
하지만 핀볼 만큼은 동네 오락실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 원정을 나가야 할 수 있는 게임.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핀볼을 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듯싶다.
아무도 하지 않는, 게다가 그 시간 동안 반짝 반짝 거리는 느낌은 전부 사라지고
이미 검은 때가 구석 구석 박혀있던 낡아버린 핀볼 테이블에 동전을 넣자 주르륵 소리가 나오며
내가 공을 튕기길 기다리는 기계를 봤을 때, 내가 공을 튕기지 않으면
기계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런 짧은 순간, 가슴이 허-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또 흘러 대학생이 되고선 아주 가끔 근방 오락실에서 핀볼 게임을 하곤 했다.
희한하게도 핀볼을 하고 있다 보면 이상하게 외로운 기분이 들곤 했다.
자세한 규칙에 대해서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고 재미있게 하는 방법과 몇 가지 사소한 요령도 터득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조금 외로운 기분이 든다.
단지 플리퍼를 까닥거리는 것만으로 많은 것들이 반응한다.
공의 속도와 각도 그리고 제일 중요한 타이밍에 따라서 각도는 변화무쌍하다.
당연히 전략도 필요하다.
그리고 정말 아주 약간의 차이에 의해서 마치 나비효과처럼 예상치도 못한 형태가 생기곤 한다.
운이 따라주는 것도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플리퍼를 치는 그 한순간마다
이후에 일어날 모든 일은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득 그것이 난 소름 끼쳤다.
그 뒤로 오랜 세월 동안 핀볼 게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에 들어 정교한 물리엔진으로 만들어진 컴퓨터로 하는 핀볼이 아닌
핀볼 기계 관리자가 와서 나사를 다시 조이고 각도를 맞추고 램프의 상태와
플리퍼의 각도와 고무줄을 체크해야 하는 진짜 핀볼 게임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진짜 핀볼 게임을 할 수 있는 날은 다시 오지 않았고
지금은 컴퓨터로 간혹 핀볼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지나갔다.
삶과 무척 닮았구나. 라고.
그리고 위의 글을 쓴 11년 후, PC용 핀볼 게임 제작사에게 이런 글을 썼다.
때론 인생은 핀볼이랑 어딘가 약간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전체적인 규칙이 있고 그에 따른 달성해야 할 스테이지가 있다. 마치 우리가 태어나 나이에 따른 달성 해야 할 목표처럼. 하지만 제대로 노린다고 해서 항상 그렇게 달성되는 것도 아니며, 무조건 노력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때론 행운의 실수로 잘 풀릴 때도 있다. 또한 흐름을 잘 타서 진행이 잘 되는 중에도, 예상 밖의 연쇄 작용으로 어쩔 도리 없이 어두운 구멍에 빨려가는 경우도 흔하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론 결정론적 물리 세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다.
수천 년 전의 인간과 지금 인간의 삶이 가지는 형태는 많이 다르지만, 근본적인 행동 원리는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럼에도 역사의 더께가 쌓여가며 조금씩 발전 해나가는 것과 같이, 핀볼 또한 거듭해 가며 쌓인 경험에 따른 노련미로 전체적인 흐름이나 리듬을 읽어가게 되는 과정들을, 단지 버튼 두 개만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핀볼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오랜 핀볼 팬으로서 실제 핀볼을 플레이하기 어려워진 세상 때문에 결국 PC로 핀볼을 하면서 대리만족했었으나 항상 마음이 허전했었다. 그렇게 점점 핀볼과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 취미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이 핀볼을 처음 봤을 때, Zen Studios의 오래된 IP를 단지 재활용해서 VR로 껍데기만 바꾼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경우 VR로 하는 핀볼은 이번이 첫 경험인데 아직까지도 물리 엔진의 미묘한 아쉬움 같은 게 있었지만, 플레이를 거듭하는 동안 결국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훌륭한 경험을 했다. 바로 이것이 아날로그를 넘어 디지털 시대의 핀볼이 가져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자 경험이다.
덕분에 십수 년 동안 죽어있던 나의 핀볼 취미가 다시 살아났다. Zen Studios에게 진심의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아케이드 모드에서 에피소드 4 테이블의 세계 랭킹 1위가 될 때까지 플레이 하면서 느낀 아쉬운 점을 이야기 하자면 Quest 2의 하드웨어 연산 능력에 따른 한계인지 모르겠지만 게임 내부 설정에서 고해상도 모드로 진행을 해도 여전히 해상도가 아쉬웠다. 테이블의 플레이 필드 아트워크는 스토리, 지시성, 플리퍼 동작 타이밍의 힌트와 더불어 아름다움 또한 핀볼의 매우 중요한 점이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Zen Studios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타협을 한 결과겠지만 플레이를 거듭해 갈 수록 이 부분이 계속 아쉽게 느껴진다. 또한 간혹 초당 프레임이 순간적으로 렉이 걸리는 경우가 있었다. 좀 더 최적화를 진행하여 네이티브 렌더링 지원된다면다면 핀볼 팬으로서 너무나 기쁠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역시 하드웨어 연산 능력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Zen Studios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광원 처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핀볼의 정서적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시시각각 변하는 불빛으로 물드는 테이블의 광원과 볼에 반사된 주변 시야에 따른 정서적 고양감인데 과거 Zen Studios에서 만들었던 테이블의 매력적인 광원 처리가 빠지고 Baked Lighting으로 대체 한 것이 쓸쓸했다.
이것 만큼은 VR 하드웨어 성능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쓸쓸한 건 쓸쓸한 거다.
멀리 한국에 있는 핀볼 팬 중 한 명으로서 Zen Studios에게 감사와 찬사를 보내며,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핀볼 팬이면서 VR를 가지고 있다면 플레이 하지 않을 이유 따윈 하나도 없다. 이건 꼭 경험해야 한다.
그렇게 위의 글을 쓴 날로부터 다시 몇 달 후 나는 총 11개의 테이블 중 4개의 아케이드 테이블에서 세계 랭킹 1위를 했다.
계속하다 보니 어딘가 쿰쿰한 기분이 든다.
무엇인가와 닮았다는 끈적끈적한 느낌이 엷게 콧구멍 속을 찝쩍거린다.
순간 플리퍼가 멈추었고 마지막 남은 공이 떨어졌다.
그로 부터 2년이 지나 지났지만, 내가 다시 핀볼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올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 봐야 핀볼, 고작 핀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