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er

봄.

수염을 잘랐다.

진심의 모습.

진짜같은 것이 거짓말로 된다.
거짓말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거짓말 처럼.
거짓말 처럼 일어난 일은 실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한 명의 남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남자인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
내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혹은 소중하다고, 사랑한다고 느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인생을 사는것이 나의 정체성.

진심의 형태는 마치 물과 같아
향기나 맛은 시각마다 모습을 달리한다.

만우절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소름끼치는 이야기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자신이 결정 할 일이다.

물소리

어느날엔가
조용한 불의 이글거림 속에
떨어지는 물 한방울이 타버려
물먼지가 날릴때

낮게 떠 있던
뜨거운 붉은 달

.

진실로 중요한 것은 배워 얻은 내용이 아니라 배워서 얻는 방법, 그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나를 그토록 서럽게 만들었는지, 당시엔 알지 못했었다.
왜 내가 그토록 흉폭했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주 먼 땅에서
싸구려 여관 방바닥에 혼자 누워, 싸구려 위스키 한병을 두숨에 나누어 통채로 들이붓고 그렇게 짐승새끼처럼 울부짖어야 하는 이유를 난 몰랐다.
내가 할 수 있었던건 단지 손에 거머리 처럼 붙어있던 검은 카메라로 베어나가는 것 뿐이였다.
어째서 내가 이런일을 당해야만 했었는지 난 알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지만, 알 수 있다. 아니 알 수 있게 되어졌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아주 오랜시간이 흐른 뒤에도 난 여전히 알 수 없는게 남아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봄이 오면, 오실런지.

오후께에 미술관에 작품 반입을 하기 위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겨울의 시려움을 막아주고 걷던 거리를 좀더 잘 듣게 해주던 검회색의 코트를 벗어놓고 조금은 가벼운 옷을 입었다. 오전과 저녁엔 약간 쌀쌀하지만, 햇살이 동공을 관통하는 느낌이 드는 오후께에는 제법 따사롭다.

12시가 넘은 밤시간에 암실에서 현상을 하는 동안 문득 미묘스럽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스물스물한 느낌이 들었다. 불쾌함까진 아니더라도 좀체 안정되지 못한 불투명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은 항상 나로 하여금 입을 굳게 다물도록 강요한다.

암실은 추위 때문에 석유 팬 히터를 틀지 않아도 될 만큼 따뜻했다. 묵묵히 현상을 끝내고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음악을 들으며 했던 생각은, \’ 이제 봄을 증오하는 것도 그만둘때가 되지 않았는가.\’ 라는게 고작이였다.

올해 봄은 조금 정도는 행복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뜨거운 욕탕에 콧구멍만 내민체 숨을 쉬는것 처럼 답답하다.

마음엔 온통 봄이, 봄이 흐드러지고
들녘은 활짝 피어나는, 봄 맞으러 갈 수 있을까..

가벼움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은 꼭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 같은건 나에게 있어선 의미 없는 이야기 이다. 꼭 이루어 질 것이기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지 노력 하는 것 뿐이다.

때론, 내 마음을 파악하기 힘들어 차라리 그것을 폐기처분 하거나 짐짓 모르느척 자신을 속여넘기거나 혹은 자신에게 속았다는 인식마져 하지 못한체 너무나도 완벽히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도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서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다행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것 마져도 압력을 완충시키려는 얇팍한 속임수는 아니였는지.

.

돌아오는 전철안에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부산 시립미술관 학예 연구실에서 온 전화였고 긴듯 짧고 짧은듯 긴 통화를 했다. 미디움에 관한 간단한 질의와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외 구체적 사항 및 자료는 이메일을 통해 받기로 했다.

그리고 부산 시립미술관 개관 10주년 특별 기념 전시회에 초청 되었다. 단 한점의 작품이지만 사진부분 섹션에 한명으로써 참가하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일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덜 나쁜 일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설령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더 심한 일이 생기지 않음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고 있다. 삶속에서 그런 최소한의 희망 정도는 품어도 용납 할 수 있을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한 시간을 걸어감에 때론 이런 시간이 오기도 하는가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에게 있어 모든 필요 조건이 갖추어지는 호사스러운 때는 아니다. 이런 경우, 항상 시간이 모자르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금껏 내가 했던 작업을 단 한장의 사진으로 응축해야 한다는 마음이 일순 들기도 했지만, 이내 그런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을 버리고 찬찬한 마음으로 보내면 될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

나는 믿는다.

과음.

일주일간의 전시가 끝났고, 그 사이 잊었던 혹은 잊어버릴뻔 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을 보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났다.

예상치 못했고, 더군다나 예상 할 수 있는 범위 아득한 바깥 범위의 다양한 얼굴과 느낌과 공기와 체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진들을 보고, 터덕터덕 한걸음씩 환승역을 넘어가는 시간들을 가늠하면서 내가 느낀것은 일종의 그 무엇이였다.

길고 긴 환승역을 밟으며 지나가는 시간 사이, 전시 외에 따로 진행했던 일이 문제가 생긴덕분에 내가 원하지 않은 정리가 되었고, 많은 생각을 하고 평소에 마시던 주량에 비해 조금 마셨을 뿐인데도 취하기도 했으며, 평소보다 훨씬 많이 마셨음에도 전혀 취하지 않았던 자신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새벽 5시 친구집에서 들었던 가브리엘의 오보에는 너무나도 훌륭해서 몸의 진액이 빠질 정도였고, 그로부터 바로 나선 버스길 그리고 순환선 지하철에서 천근같은 몸을 끌고 던져놓은 출근 시간의 축복같았던 전철 의자에서, 몇바퀴를 돌았는지 모를 정도로 목뼈가 시큼할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겨우 돌아 올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여기가 되었던, 저기가 되었던 난 계속 걸었고 셔터를 누르고 다시 마음을 쓸어담아 한걸음 걸어 나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물론 이런것은 필시 스스로에 대한 최면이자 보상심리에 따른 사사롭고도 달짝지근한 맛에 다름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 겨우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로 부터 열 몇시간 뒤시간 후에 나라고 하는 인간은 지독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자정이 되었을 즈음,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것은 흔히 말하듯 내가 선택 할 수 없는, 일종의 붉은실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가지 내가 느낀것은 나는 지독한 인간이라는 것과, 나라고 하는 인간의 그릇이라는 것은 이런 것일까 라는 것과, 그 무엇보다 앞서 이야기 한것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짐짓 사랑스러운 느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닥치고, 찍으라고 하기엔 마음의 방점은 너무나도 깊숙히 박혀있는것은 아닐까.
그래서 되려 놓치고 마는 것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것이 나에게 거슬리는 아픔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을때, 이것은 자기 위안과 합리화는 아니였던가? 를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때.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던 술이, 갑자기 취하게 되고 왜 그렇게 되었던건지를 깨닫게 되었을때, 무력한 나 자신을  보며 검었던 빈 공간과 그 너머의 풍경과 나 자신을 놓아둔 그 시간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가볍고 너무나도 무거운 셔터의 시간이였다.

이제 남은 것은 곧 바로 잠을 자고, 오늘 아침 일어나 내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다.

그 정도가 가장 편안한 길이겠지.

누구나 알고 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쁩니다.

오프닝과 갤러리 토크때 와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전시회에 오시진 못했지만, 저의 사진을 꾸준히 봐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합니다.
이제 전시가 실질적으로 이틀 남았습니다.(일요일은 갤러리 휴관일 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무탈하게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전시 자체도 물론 의미 있는 일입니다만, 전시함으로 인해 느끼고 얻을 수 있었던 소중한 것에 닿았습니다.
부족한 인간이라 오신분들에게 행여나 아쉬움을 남긴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행복한 나날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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