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의 전시가 끝났고, 그 사이 잊었던 혹은 잊어버릴뻔 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을 보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났다.
예상치 못했고, 더군다나 예상 할 수 있는 범위 아득한 바깥 범위의 다양한 얼굴과 느낌과 공기와 체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진들을 보고, 터덕터덕 한걸음씩 환승역을 넘어가는 시간들을 가늠하면서 내가 느낀것은 일종의 그 무엇이였다.
길고 긴 환승역을 밟으며 지나가는 시간 사이, 전시 외에 따로 진행했던 일이 문제가 생긴덕분에 내가 원하지 않은 정리가 되었고, 많은 생각을 하고 평소에 마시던 주량에 비해 조금 마셨을 뿐인데도 취하기도 했으며, 평소보다 훨씬 많이 마셨음에도 전혀 취하지 않았던 자신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새벽 5시 친구집에서 들었던 가브리엘의 오보에는 너무나도 훌륭해서 몸의 진액이 빠질 정도였고, 그로부터 바로 나선 버스길 그리고 순환선 지하철에서 천근같은 몸을 끌고 던져놓은 출근 시간의 축복같았던 전철 의자에서, 몇바퀴를 돌았는지 모를 정도로 목뼈가 시큼할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겨우 돌아 올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여기가 되었던, 저기가 되었던 난 계속 걸었고 셔터를 누르고 다시 마음을 쓸어담아 한걸음 걸어 나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물론 이런것은 필시 스스로에 대한 최면이자 보상심리에 따른 사사롭고도 달짝지근한 맛에 다름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 겨우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로 부터 열 몇시간 뒤시간 후에 나라고 하는 인간은 지독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자정이 되었을 즈음,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것은 흔히 말하듯 내가 선택 할 수 없는, 일종의 붉은실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가지 내가 느낀것은 나는 지독한 인간이라는 것과, 나라고 하는 인간의 그릇이라는 것은 이런 것일까 라는 것과, 그 무엇보다 앞서 이야기 한것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짐짓 사랑스러운 느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닥치고, 찍으라고 하기엔 마음의 방점은 너무나도 깊숙히 박혀있는것은 아닐까.
그래서 되려 놓치고 마는 것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것이 나에게 거슬리는 아픔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을때, 이것은 자기 위안과 합리화는 아니였던가? 를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때.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던 술이, 갑자기 취하게 되고 왜 그렇게 되었던건지를 깨닫게 되었을때, 무력한 나 자신을 보며 검었던 빈 공간과 그 너머의 풍경과 나 자신을 놓아둔 그 시간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가볍고 너무나도 무거운 셔터의 시간이였다.
이제 남은 것은 곧 바로 잠을 자고, 오늘 아침 일어나 내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다.
그 정도가 가장 편안한 길이겠지.
누구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