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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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5개월을 들여 71861장의 사진을 봤다.

자신에게 축적되고 사라지고 흔적이 남으며 변형되어진 덩어리들의 부스러기를 모아 형태를 가진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여느 형식미를 가진 작업과 크게 다른 점이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사진이라는 재료는 특정한 부분에 있어서 이러한 변형을 용납하지 않는다.

당시 셔터를 누르게 만든 심정적 이유가 무엇이었건 오롯이 물리적으로 새겨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같은 사진을 보고 있더라도 보는 사람의 변화에 따라 사진도 달라진다. 그렇게 명확성과 동시에 불명확성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진들은 세부적인 감정의 감촉이나 온도감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소멸이나 변형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황야에 멀겋게 서 있는 바오밥 나무처럼 시선에서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단순히 개념을 다루는 작업을 넘어 실제로 살이 썩는 냄새와 비린내에 구토감을 삼키며 눈으로 그리고 손으로 직접 재료를 만져 다듬어야 하는 일이다. 작업에 있어 사진이라는 형식미는 때론 잔인하다.
어찌되었든 만들기 위해선 찍은 사진을 정면으로 마주 하고 봐야 한다.

이제 28877장을 더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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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걷다 보니 조금씩 지쳐가는 다리가 느껴졌다. 모처럼 멀리 온 김에, 그리고 현지 교통 시스템 덕분에 자의 반 타의반 하루 단위로 움직이는 것을 반복했다.

그런 하루 중 아무런 사전 인지나 지식 없이, 그저 만나야 할 것들이 결국 만나게 되는 것처럼 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

화려한 이름들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이 그림은 얼마간 조용한 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 눈에 띄이지 않는 무채색의 작품이 벽에 얼마간 흡수 돼버린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도 없이 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는 이 그림을 그린 작가의 이름도 배경도 살아온 삶의 굴곡도 모르지만, 이 무채색의 보름달이 떠 있는 밤에 창가에 나지막이 놓인 권총과 폐허가 그려진 단순한 그림을 보며 욱신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삶 어딘가에서 비슷한 풍경을 봤으며, 앞으로의 삶 어딘가에서 반복 될 풍경이었다.

십 몇분은 지난 것 같았다. 묽고 끈적한 물이 나왔다. 함께 하던 일행이 나를 발견하고 내가 보던 그림을 3초간 보고 다음에 갈 길을 무언으로 재촉했다.

급하게 사진을 찍고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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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뎃살 정도의 꼬마가 자신에게 닥친  상황과 처지를 인식하고 생존을 위해 행동을 흉내 내며, 생활을 견디며 살아왔겠구나 싶은 느낌이 드는 진지한 어른스러움. 그 와중 속에서 묻어나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이 섞여있는 그 모습은 기묘하고도 가슴 아프다.

Walked

 

전시 오픈날 갤러리에 방문 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수년간에 걸쳐진 지속적 어두움에 눌려있는 저의 일신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다시 조금은 앞으로 한걸음 옮기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드는 전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게 가능했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격려를 해주시고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분들 덕 이라고 생각 합니다.

코로나 속에서도 귀중한 시간을 쪼개, 먼 걸음 와주신 분들에게 재차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 올립니다.
오픈식을 하지 못하는 코로나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시간에 묶이지 않고 각자 가능한 시간대에 와주신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듣고 그간 살아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마 별도의 오픈식으로서 식순을 진행한다거나, 갤러리 토크 같은걸 했다면 이런 경험은 힘들었겠지요.

그 중 내가 존경하는 선배가 자신의 아들이랑 같이 찾아와줬습니다. 아들이 이런 종류의 사진들을, 게다가 전시장에서 보는건 예가 태어난 이후 첫번째 경험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는데 그 다음 바로 번뜩 든 생각은, 좋은 기억과 경험 그리고 추억이 된다면 정말이지 무척 기쁠것 같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아이의 눈으로는 무엇이 보았고, 무엇이 보였으며, 어떤 기분이나 마음이 들었을까가 궁금해졌습니다. 눈을 보고 싶어서 아이 옆에 앉은 자리로 물어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런지 어떤진 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이들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표현하여 말하는 것들 중엔 간혹 핵심에 닿아있는 것들을 정말 아무것도 아닌듯 말 할때가 있다는 것을 듣곤 했습니다. 선배도 고마웠지만 아직 꼬맹이인 아이에게도 무척 고마웠습니다. 안아주고 싶었어요.

이렇게, 또 조금씩 한걸음을 옮겨보게 됩니다.

와주신 모든 분, 그리고 축하와 격려 그리고 감상을 전해준 보내준 모든 분께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모든 분께

재차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Butterfly Walked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짧막한 소식이 있어 전합니다.

다음주 금요일 (8월 13일) 전시 오픈 합니다.

장소는 부산 서동 예술 창작 공간 갤러리이며
개관 시간은 오전 10 ~ 오후 6시 입니다. 일요일 및 공유일은 휴관 입니다.

8월 13일 오픈날 (저녁 7시 30분까지) 방문 해주시면 삭아있는 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전시 기간은 9월 10일 까지 입니다.
무겁지 않은 전시이므로, 시간 괜찮으실때 바로 옆 에 있는 시장에서 밥 한끼 하는 김에 겸사 겸사 전시장에 들려 주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팬더 짬뽕이 전 괜찮더라구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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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할수 있는 조치는 모두 했지만 결국 우주선의 모든 연료는 바닥나고, 그저 목성 중력에 하루 하루 빨려들어가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때, 목성의 소리가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는 것을. 이 영상을 처음 봤을때 상상한 적이 있었다.

출발하는 순간 심플한 백터 방정식으로 죽음은 이미 결정되어진 감각.

(사실은 보이저 1호가 1979년에 한 달 동안 접근하며 촬영한 것. 현재는 태양과 지구의 거리에 약 142배 정도 먼곳인 성간공간에 들어갔다. 그리고 2025년~2030년 즈음에는 모든 전력이 끊어진다)

첫 기일

어머니는 생전 나의 생일 전날과 당일엔 항상 아프셨다.

나를 낳을때 하마터면 돌아가실뻔 했다던 과정과 산통이 무척 컸었던것이 몸과 마음에 강렬하게 새겨진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시간 속에서 초침이 짤각 거리는 기점이 되었기 때문인진, 나는 모른다.

어려서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만, 매번 나의 생일이 있을때마다 몸이 부어오르거나 진짜로 아프셨다. 그래서 나의 생일은 내가 태어난 것을 새기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 보다는 어머니가 고생하신 날로 나에겐 새겨져있다. 그리고 그게 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매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부턴가 그게 어떠한 것인지 어슴푸레한 정도로나마 알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가 태어난 날 마다 매년 어머니는 아프셨다.

그리고 나는 매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마다 아플것이라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죽음을 당하고 몇개월 뒤에 쓴 글.

어느날 이런 기사를 봤다.

‘행복한 가정은 다 고만고만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다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톨스토이의 문장에 딴죽을 걸고 싶다. 한국의 불행한 가정을 멀리서 보면 다 고만고만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고. 매일 밤 술에 취하는 아버지, 죽겠다고 혹은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아버지, 도박하는 아버지, 외도하는 아버지,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아버지, 가정을 버린 아버지, 자신의 삶만이 강렬하다고 믿는 아버지, 아내를 혹은 자식을 때리는 아버지….

가부장의 폭력은 세대를 넘어 지속되기 쉽다. 엄마는 피해자이지만, 가부장제를 스스로 내면화하며 그것의 수호자가 되기도 한다. 가정의 모든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을 담당했던 엄마와, 그런 엄마의 고통에 의해 끝없이 같은 이유와 내용의 넋두리에 갈려나가는 자식들.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는 자식들. 아빠의 모든 면을 증오하면서도 이를 반복하는 자식들. 그가 결혼해 또다시 자신의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언제나) 뒤늦게 눈물을 흘리며 참회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상투적인 한국 가족 서사의 완성이다.

나는 ‘상투적’ 이라는 단어가 아팠다. 저 거친 상투적 이라는 단어 속에 나도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은 4살 부터 시작되어졌다. 손바닥만한 방에서 얼굴이 반쯤 뭉개져있는 엄마의 얼굴은 마치 뭍에서 죽은 금붕어 처럼 되어 있었다. 반들반들 닦여 있던 나무 문지방, 항상 깨끗히 잘 닦여 있던 노란색 모노륨 고무 바닥 장판엔 피보라가 흩뿌려지듯, 엄마 몸에서 터져나간 붉은 피가 사방에 뿌려져있었다.

주인집의 불이 켜졌다. 어른이 나와 도와줄것이다 라는 기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주인집의 불이 다시 꺼졌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은 가재 기구들을 닥치는대로 부수던 중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본능적으로 압도적인 공포를 느꼈다. 이대로 나는 죽는다는 본능적인 감촉에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그런 나를 보고 그냥 밖으로 다시 나가는 아버지가 있었고 뒤이어 몇 십분이나 지났을까, 어머니는 몸을 추스리고 걸레를 들고와서는 자신의 피가 뿌려진 모노륨 장판을 닦고 있었다.

노란색 모노륨, 반쯤 뭉개진 엄마의 얼굴과 사방에 뿌려진 피, 죽음에 대한 압도적 공포 그리고 바닥에 뿌려진 자신의 피를 닦는 어머니. 그리고 불이 켜졌다 꺼진 주인집 창문 이였다. 세상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이제 갓 4살이 된 아이가 가진 최초의 기억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이와 같은 일은 형태를 달리하며 반복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이 되었던해 아버지는 때론 술에 취해 새벽에 돌아와선 난대 없이 주먹으로 나를 때리려할때 엄마가 날 감싸 안아서 얼굴에 검붉은 멍이 들거나 때론 뼈가 부러진적도 있었다.

이것도 반복 되다 보니 자기 전에 항상 다음 등교에 필요한 책을 미리 가방에 넣어두고 잠을 자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난 그게 너무나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매일 밤 잠을 자기 전엔 다음날 필요한 책들을 미리 가방에 넣어두었다.

그러기를 며칠이 지난 어느날 아버지는 또 술을 먹고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새벽 3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각에 어머니는 나의 책가방과 나를 챙겨 급히 밖으로 도망 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서 파란색 새벽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물냄새 가득한 새벽이었다. 그리고 여인숙 같은 모텔에 함께 들어가서 나를 껴안으며 어머니는 울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어둡고 축축한 방에 목메인 말만 되풀이 하며 어머니는 하염없이 울었다.

아침이 되자 도망쳐 나올때 엄마가 챙겨나온 책가방을 올려 맸다. 그리고 미안하다며 나를 안아주셨다. 그리고 나는 국민학교에 등교 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보니 어머니는 또 바닥을 닦고 있었다. 돌아온 나를 보고 어머니는 또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라며 울었다.

이 장면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반복 되었다. 왠지 오늘은 느낌이 좋지 않아서 그대로 밖에 나가도 될 만한 옷을 입고 잠드는 날도 있었다. 이런 익숙함이 잉태한 자리엔, 마땅히 있어야 할 눈물은 사라지고 냄새나던 여인숙의 조그만 방에서 그저 말 없이 나를 품어주던 엄마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나마 도망칠때 여관 숙박비라도 있으면 그랬고 그렇지 못할땐 엄마의 비명 소리와 곱디 고운 엄마의 머리카락이 뜯겨져 나간 자국 그리고 때론 엄마 몸에서 터져나간 검붉은 피가 사방에 뿌려졌다. 이것이 내가 가족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국민학교때 일상적 기억이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폭력의 강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다양해졌다. 이미 가족 붕괴는 오래전 일이며 일상이였다. 다행스럽게도 조그만 나의 방이 있었다. 그것 만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성이였다. 항상 문을 걸어잠그고 가족과는 일체 소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내가 이 가족과 연결되면 내가 산산히 부서질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폭력의 밤과 새벽은 질긴 무좀 처럼 일상에 스며 들어 있었다. 내 방의 문 너머 어머니가 토해내는 비명 또한 그랬다. 그런 어느날 갑자기 돼지멱따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소리였다. 인간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도무지 가만 있을 수 없어서 방문을 열어 보니 내가 4살때 처음 가졌던 기억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대로 가다간 비유가 아니라 정말 어머니는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를 보호 하기 위해 굳게 잠가두었던 문 밖에서, 어머니가 보낸 고통의 나날을 외면한 나 자신을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저 괴물로 부터 어머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찼다. 부엌으로 달려가 커다란 식칼을 꺼내어 저 괴물의 배를 향했다. 한발짝만 더 가까이오면 너를 죽이고 나도 죽는다. 라고 조그만 까까마리 중학생이 말했다.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였다. 조금이라도 더 들어오면 바로 튀어나가 찌를 수 있도록 칼을 꽈악 쥐고 괴물의 배에 정조준 했다. 그러자 그 괴물은 무슨 생각이였는지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갔다. 사는 집은 내가 4살때 보다 커졌고 나의 방도 생겼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며, 이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엔 생각 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부부싸움이라는게 다 그런거다라는 주위 어른들의 말을 계속 들어왔기에 이것이 보통인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가. 다들 이런 지옥을 살아가는게 일반적이고 보통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그간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다 적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활속에서 43년 동안 같은 사람과 이혼을 3번, 재혼을 3번, 이사를 22번 하는 동안, 어머니는 23살에서 66살이 되었다. 그런 가족의 마지막은 사하구였다.

여기 까지 오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둘다 나이가 많이 들어버렸다. 간혹 수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로 울려퍼지는 내용은 아버지가 또 폭력을 행사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전 부터 오랜 세월 동안 이 지옥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수 많은 노력과 시도는 전부 허사로 끝났다. 그 어떤 기대도 희망도 태어날 수 없는 장소가 나에겐 가족이다. 울리는 전화 밸소리에 눈을 돌려 화면에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이름이 보이면 그 순간 부터 심장이 빨리 뛰면서 극도의 스트레스와 함께 주위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도 이젠 너무나 만성이 되어버렸다. 폭력 그 자체에 무감각 해진 것이다. 어머니가 폭력을 당했다 하더라도 최대한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거기엔 마치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절망만 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어머니 만큼은 꼭 구하고 싶었다. 그저 어머니를 구할 수 없는 나의 능력에 대한 고통이 더 쌓여갔다.

어느날 갑자기 \’병원이다.\’ 라는 엄마의 전화 목소리에 쉬이 짐작은 되었지만 확인차 무슨일로 이렇게 되었냐?라고 물어보니 아빠가 폭력을 썼다고 담담히 말했다. 병실에 가보니 몸에 멍이 들어있고 머리에 피가 고여있었다. 사십여년 동안 빈번하게 일어난 폭력 중에 하나 였다.

엄마가 이 나이가 되어서 까지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머니를 구하고 싶다는 이 오랜 생각은 지난 십수년간 몇번이나 수면 밖으로 나왔다. 이런 생활을 끊어내자고. 그러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들어앉은 학습된 무기력과 내면화 된 가정폭력 때문에 매번 끊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 둘 순 없는 일이다.

사십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도 조금 변했다. 국가와 법과 제도와 인력이 엄마를 지켜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며 그에 따른 채널과 연락처 그리고 실제로 도움 및 조치를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항목들을 정리한 서류들을 준비했다. 이 서류들을 봐라. 대한민국 그래도 많이 발전했다. 그러니 당신께서 살고 있는 나라를 믿어달라. 사람이 하는 일이니 중간 중간에 미온적인 부분이 있을수도 있고 돈이 드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볼테니, 이 나라를 믿어보고 그래도 영 믿지 못하겠으면 나를 믿어달라고 설득을 했었다. 그리고 그 일보로 진단서 부터를 끊자. 그건 지금 바로 시작 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생각해볼께\’ 였다. 열심히 설득하고 있는 아들에게 하는 엄마식의 사실상 거절 의사였다. 여기서 물러설순 없었다. 서류는 버리지 말고 꼭꼭 읽어주셨으면 한다. 언제든 연락을 주시라. 본인의 결심이 가장 중요하다. 여생이 앞으로 몇년이 될지 모를 일이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건 행복한 삶 이전의 문제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움받기로 했다.’

40년간 가정 폭력과 남편에 의한 학습된 무기력을 넘어서려는 엄마의 말은, 나는 죽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살아가겠다는 4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인간 선언’ 이었다.

그녀에겐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권리, 지금보다 더 나은 스스로를 발견할 권리가 있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이를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남편과 분리되는것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폭력이 재생산되는 것을 막는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해방은 그녀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식인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 40년을 관통한 인간 선언의 날 당일,
엄마는 지체 없이 바로 도움 받을 수 있는 채널에 연락을 하였다.
경찰이 왔고, 형사가 왔다. 조사를 하고 사건 접수를 했으며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배려하여 조서를 만들기 위한 약속 날짜도 잡았다. 모든게 순조로운 듯 했다.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뭔가 시작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진작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는 기묘한 안심감도 들었다.

그 40년을 관통한 어머니의 인간 선언의 날 당일,
바로 몇 시간 지난 저녁에 돌아가셨다.
뇌사된 엄마의 눈에서 눈물 흐른 자국이 굵게 남아 있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생부에 대한 증오를 발산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보여진 상투적 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 폭력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평범한 우리네의 일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결로 옳은 것이 아닐터이다. 내가 어렸을때 부부싸움은 원래 그런것이라는 말을 한 어른들에 대해선 난 지금도 원망한다.

하지만 동시에 왜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또한 지금의 나이가 되어선 이해 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비정상이 일상으로 둔갑해서는 안될 일이다.

비정상적인 일상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여서는 안될 일이다. 주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당신이 들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라던가, 너만 힘드냐? 다들 비슷하게 산다 라던가, 그래도 견뎌야지 어쩌겠어 라던가, 부부라는게 결혼 생활이라는게 그런거다 라던가 (잘도 결혼 하겠다), 그런 말은 잠시 넣어 두자.

무엇보다 이런 경우 당사자의 결심이 대단히 중요하다. 따라서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독려 하자. 내 경험으로는 유관 부서, 부처끼리의 세련된 업무 협조가 되는지 까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떻게든 사건을 파악하려고 무척 노력한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현장에서의 일까진 일반 시민인 내가 알 수 있을리가 없지만, 쉽지 않은 환경에서도 진심을 다해서 사건을 대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소한 적어도 어미를 잃은 자식의 눈으로 봐도 그랬다.

사건은 아직 진행 중이기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진 모른다. 판단은 법이 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법에 대해 무지한 일반 시민일 뿐이다. 그래서 상황상 참고인 혹은 증인으로 법원에 설지도 모를 일이다. 동시에 ‘법은 도덕의 최소한’ 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는 말을 믿고 싶은 일반 시민이다.

내가 겪은 일이 타인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적어도 완전히 없을순 없다면 최소한 적게 일어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만에 하나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꼭 도움을 요청하길 바란다. 관련 부처던 경찰이던 어떤식으로든 도움을 요청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에 관련한 홍보도 적극적으로 했으면 한다.
관련 법규, 지원 제도, 일선 현장에 대한 지원등이 보다 잘 되었으면 하고 깊이 바란다. 이러한 기초 사회 안정망의 확충과 기능이 보다 충실할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에 대한 의미와 가치, 사랑 그리고 현실에서 맞닿은 부분의 갈등, 결혼, 경제들이 보다 밝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재차, 이 세상에 있는 수 많은 ‘상투적’ 가정들이 줄어들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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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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