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er

기준을 만든 후, 기준을 잊기 위한 준비

색과 농도를, 명확한 형태가 있는 것으로서 손에 쥐어 사용 할 수 있는 물감과 붓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2,033개의 컬러 칩세트를 만든다.

대략 16년 전에 컬러 칩 갯수를 800여 개부터 5200여개 까지 다양하게 시험해 본 적이 있다. 예상과 달리 갯수가 너무 많으면 일종의 노이즈 처럼 되어서 특정 구간에서 색이 튀고, 갯수가 작으면 인터폴레이션이 심해져 정확도가 떨어졌다. 그로부터 대략 8년 이후 장비 성능과 프로그램 알고리즘이 개선되면서, 앞에서 했던 것처럼 컬러칩 갯수를 800여개 부터 5200여개 까지 다시 다양하게 시도해 봤는데, 알고리즘이 개선된 덕에 예전보다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역시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결국 돌고 돌아, 시작 하기 좋은 출발점으로서 2033개가 합리적이었다. 여기에 필요에 따라 3~1000개 정도의 컬러 칩을 추가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측정을 위한 컬러칩 세트는 크게 다음 요소에 따라 결과 값이 다르게 나온다.
헤드 이동 속도 / 프린트 렌더링 해상도 / 쉐도우 로컬 콘트라스트 확장 / 스펙트럼에 UV 포함 관능평가용 / 스펙트럼에 UV와 편광을 제거한 관능 평가용에 따른 셋팅 조합은 대략 40가지 정도 되는데 작품 프린트 범위 안에 들어오는 기초 조합은 대략 16가지 정도다.

그 중 기본 특성을 고려하고 경험상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해서 2033개의 컬러칩 세트 6개를 만들었다. 이런 접근을 통하면, 하지 않은 나머지 10개의 조합도 데이터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하다. 설령 드물게 6개 세트의 결과가 전부 기준 이하가 되더라도 최종적으로 2~3개 셋트만 추가로 작업을 더 하면 보통은 기준 범위 안에 들어온다.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최적화용 패치 셋을 만들어 보충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만든 컬러칩 세트는 건조가 매우 중요하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건조 시키는 동안 색상과 농도가 계속 변화한다. 때문에 프린트 하자 마자 나온 것을 손에 들고 곧바로 색상, 농도 판단하는 행위가 적절치 않은 이유다.

암실에서 프린트 할때 트레이의 물 속에서 보는 것, 스퀴즈 하고 나서 바로 보는 것, 완전히 건조되고 나서 보이는 콘트라스트 특성은 확연히 다르다. 드라이 다운 현상 때문이다. 때문에 경험이 풍부한 이는 스퀴즈 하자 마자 바로 보는 톤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퀴즈 할 때는 약간 맞지 않더라도 최종적으로 드라이 다운 되었을때의 변형 정도를 미리 예상하여 작업한다. 경우에 따라선 셀레늄 토닝할때 D-Max 변화를 고려하여 작업 하기도 한다.

같은 이유로 프린트 전반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특히 색상과 농도의 기준을 잡기 위한 측정 작업엔 건조라는 요소는 정말 중요하다. 컬러칩 세트를 만들 때도 되도록 표준 온습도 범위인 습도 40~60%, 온도 15~25도 범위 안에 들도록 환경을 만들고 이를 추적 체크 하기 위해 데이터 로그 기능이 내장된 온습도계로 확인한다. 흑백 프린트의 경우 온습도의 차이에 따라 톤이 제법 달라지기도 한다. 종류 따라 다르지만 통상 3일 가량 건조 과정을 추적 계측 해보면, 색상 이동 평균값은 대체로 허용 범위 안으로 수렴한다. 그렇게 3일을 건조 시켰고 이제 측정이 가능해졌다.

분광광도계로 12,198개의 컬러 칩을 꾸역꾸역 계측 했더니 5시간이 사라졌다.
단순 반복 작업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편이지만, 컬러 칩을 읽고 있을 땐 약간 신경질적으로 멍해진다.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멍한데 신경질적이고, 신경질적인데 멍한 상태라는 것은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 속에서 마시는 것과 비슷 감각이지 싶다.

컬러 칩을 읽을 때 분광광도계의 위치를 제대로 잡으면서, 동시에 읽는 속도가 너무 빨라도 너무 느려도 안 되고, 중간에 튀어도 안 되니까 생각보다 꽤나 신경 쓰인다. 게다가 분광광도계와 컬러칩 사이의 거리가 조금 달라지기라도 하면 측정값이 살짝 튄다. 물론 이런 휴먼 에러에 대비한 몇 가지 절차적 안전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안전장치는 평소엔 꽤나 잘 작동한다.
하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절차적 안전장치는, 그 안전장치를 만든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안전장치를 만들고, 예외 처리를 꼼꼼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상상 이상의 일들이 벌어진다. 때론 이런 일들이 창조와 창의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안전장치를 만드는 사람으로선 그저 재앙일 뿐이다. 프로그램 만들어본 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렇게 측정한 2033개의 컬리칩을 3차원 색 공간 좌표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모델이 깨지거나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잉크 조합 커브에 튀는 영역은 없는지, 톤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선형적으로 증가하는지, 중성 채널에 잡색이 끼어있진 않은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순서상 제일 먼저 하게 되는 3차원 색 공간에 데이터를 올려서 나온 결과가 이거다.

이 짓거리를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럭저럭 20년은 해왔는데 이렇게 선명하고 깊은 구멍이 난 것을 만든 적은 처음이다. 처음 측정 시 허리가 아파서 중간에 살짝 튀었는데 그게 원인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원인이야 워낙 다양할 수 있다. 컴퓨터 접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생한 누설전류가 케이블을 타고 분광광도계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하필 전압이나 전류 변동이 발생해서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접지를 잘 해두었기에 이게 원인일것 같진 않았다. 혹시나 싶어 누설전류 계측기를 꺼내서 케이블을 직접 측정 해보니 문제 없다. 그 밖에 원인을 생각해보면 컬러 칩을 읽을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기에 찌그러진 곳의 하이라이트 옐로우, 하이라이트 마젠타 구역에서 측정 좌표가 어그러진 곳의 좌표를 보고 측정 데이터의 순서를 찾기 위해 데이터를 눈으로 훑어보는데, 에러 난 곳을 찾기 어렵다.

잠시 눈을 감고, 밖에 나가서 숨을 들이 마시고 담배를 한대 태우고 음료수 한 캔을 마신 다음 의자에 눈 감은 채로 잠시 앉아 있다가 해당 컬러칩 셋트를 처음부터 다시 측정했다. 값이 멀쩡하게 잘 나왔다.

이런 상황이 생기기도 하다 보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멍함과 신경질적인 것이 공존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분광광도계의 시그널 케이블이 혹여나 컬러칩 셋에 쓸려서 반사율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기에 이를 방지하며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혀서 하다 보니 허리가 아프다. 멍한데 신경질적이고, 신경질적인데 멍한 이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이것을 총 6회 반복한다.

이렇게 다시 측정한 2033개의 컬러칩을 3차원 색 공간 좌표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모델이 깨지거나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프리머리/세컨드리 컬러 좌표 경로가 지나치게 휘는 곳은 없는지, 잉크 조합 커브에 튀는 영역은 없는지, 톤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선형적으로 증가하는지, 중성 컬러 채널에 잡색이 끼어있진 않은지를 면밀히 살펴본다.

데이터 확인이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각기 적용한 6개의 테스트 프린트 만들고 다시 3일을 건조한다. 현장에서 테스트 프린트를 뽑아서 보더라도, 앞서 말한 드라이 다운 현상 때문에 컬러와 농도를 제대로 판독 할 수 없다. 때문에 3일 건조가 끝나면 표준 뷰잉 부스에서 관능평가를 한다.

너무 극단적으로 표현되진 않았는지 혹은 너무 중성적으로 표현되진 않았는지 다시 말해 용지가 품고 있는 어조와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지,
형광 증백제가 들어 있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용지의 경우 조명에서 나오는 UV 광에 반응 정도에 따라 보이는 어색함이 허용 범위 안에 있는지,
만약 형광 증백제 영향으로 어색함이 허용 범위를 초과할 경우 이를 다소 중화할 방법과 도구로 어떤 식의 접근을 할 것인지,
형광 증백제 무첨가의 고급 용지 경우 페이퍼 화이트와 하이라이트 영역 색상 및 밝기 전환 그라데이션과 선형도가 매끄럽게 잘 연결 되는지,
쉐도우 분리력은 용지 특성을 고려하여 스펙 범위만큼 나오는지,
데이터와 실제 프린트 사이의 괴리는 없는지,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방법과 도구로 더 나은 것을 만들 것인지를 고려한다.

이렇게 6개를 평가하여 용도에 따라 2~3가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나면, 오롯히 자신의 작업에 더욱 순도 높은 매진을 할 수 있게 된다.

때론 아주 엷고 투명한듯 하이라이트의 미묘한 어조는 그냥 볼때는 아주 사소해보이지만, 이 하이라이트의 예민한 어조 차이가 작업 전체를 결정 할때가 있다. 깊고 무거운 쉐도우의 중량감, 맑고 폭신거리는 쉐도우의 찰랑거림이 작업 전체의 어조를 결정 할때가 있다. 종종 어조라는 것은 내용에 한없이 가깝다.

위와 같은 기초 작업을 통하고 나면, 최종 프린트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할 필요 없이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공방에 모니터를 통해 시뮬레이션 결과값을 확인 할 수 있다. 일부 특수 매체를 제외하면 대부분 눈에 본대로 나온다. 건조가 덜된 테스트 프린트를 들고 잘못 판단하여 최종 완성작품의 어조가 다르게 나올 일도, 추가 비용도 들지 않으며 더 정확한 예견이 된다.

이것을 각 용지 종류별로, 기준안에 들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지금까지 컬러 작업만 이야기했다. 흑백 작업 이야기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흑백은 이와는 또 다른 식으로 별도 진행 해야 한다.
컬러 보다는 흑백이 난이도가 더 높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색과 농도를, 명확한 형태가 있는 것으로서 손에 쥐어 사용 할 수 있는 물감과 붓 그리고 캔버스를 만들었다.

이렇게 기준을 만든 후, 기준을 잊기 위한 준비를 하나씩 녹여간다.

 

조금 더 잘

그제 한나절 걸려 설치하고, 기계가 온도 습도에 적응해서 수축 팽창이 잦아들도록 하루 정도 안정화시킨 후에, 9,600개의 노즐이 붙어 있는 헤드의 착탄 포커스와 급지 옵셋 등 기초 셋팅을 맞춘 후, 색상별 농도값 측정 위한 작업 준비 중이다.

기초 작동 및 묘화 최적화를 하면서 조금 더 기간을 두고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이전에 비해 작동이 안정적이다. 길게 봐서 통계를 만들어 봐야 알 수 있는 거겠지만 확률적으로 꼭 발생하는 프린트 불량 Loss도 아직까지 없다. 아마도 이전 보다는 나을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쉐도우의 로컬 콘트라스트 분리력 향상에 더해 광색역 프린트가 가능해졌다.

여름이 끝난 가을 초입의 어느날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조우한, 세상에 모든 오렌지색을 졸여낸 듯 처연한 붉음이 가득한 속에서, 나직히 숨 쉬는 창백한 살결의 그 사람이 투명하게 웃던 모습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른 겨울, 상처 처럼 돋아난 싱그러운 녹색의 생물이 아스팔트를 깨고 일어나는 모습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깊은 물 속 검푸른 울렁임 위에 한오라기 실 같은 빛이 누워 있는 새벽, 미지근한 체온속 오래도록 스민 단단한 고독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뽀얀 복숭아 빛 같은 그 사람의 볼살에서 나던 향기를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하늘에 박힌 별들도, 검녹색의 바탕에서 빛나는 초록과 분홍의 오로라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오후 2시에 무겁게 내린 회색 비들 속에서 각양각색의 무심히 가라앉은 듯한 색깔의 우산들과 그림자처럼 씌어 있는 사람들과 투명하게 비치는 물빛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두껍고 텁텁한 회색 나무들과 설득에 실패한 현재 같은 보도블럭 위에 하얀 나비가 앉아 있는 모습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의 조그만 항구 마을에 사람들과 함께 자유롭게 살고 있는 하얀 숫컷 고양이의 분방함과 천진난만과 요염함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다 표현하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넓힌다는 것은, 그보다 안에 있는 것들은 더욱 정제된 표현에 도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소중한 작업 원고를 품고, 이 공방에 오는 그리고 올 작가들도, 그리고 나의 작업들도 새로 함께할 이 친구와 함께 만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몽글몽글해진다.

이와 관련해서 현실적으로 남은 문제는 생산성과 품질의 밸런스다. 나의 오래된 나쁜 버릇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

6 과 6 그리고 Z

또 하나의 역사가 마무리 되었다. Nikon의 플래그쉽 디지털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 D6가 2025년 5월 13일 공식적으로 단종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새로운 DSLR 플래그 쉽 카메라는 나오지 않았다.

Nikon 최초의 SLR 카메라는 1959년에 발매된 Nikon F였다. 그로부터 40년 후, 최초의 상업 DSLR 카메라인 Nikon D1이 1999년 6월 15일 발매 되었다. 다시 그로부터 26년 후 Nikon의 SLR 형식 카메라는 66년 역사를 거쳐 종결 되었다.

Nikon의 마지막 플래그쉽 필름 카메라인 F6, Nikon의 마지막 플래그쉽 디지털 카메라인 D6. 그리고 Nikon SLR 역사 66년. 셋 다 6으로 끝났다는 게 우연일 수도 있지만 Nikon F5와 8년을 함께 하고, F6도 8년간 함께한 이후, Nikon DSLR과 13년간 함께한 Nikon 팬으로서 이런 사소한 우연에도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지점이 있다.

소니의 a, 니콘의 Z.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 혹은 완결이자 완성이라는 포부를 담고 있을 것 같은, F와 D를 이어 Nikon 최초 미러리스 풀 프레임 카메라의 이름인 Z는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8년 여름에 공개 되었다. 이후 기간을 거쳐 202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Nikon 플래그쉽 풀프레임 미러리스 카메라인 Z9이 발매 되었다. 첫 인상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서적 영향을 주었던 Nikon F5와 얼마간 닮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본능에 가깝게 바로 가슴이 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요구 기준에 부족한 4600만 화소가 안타깝게도 문제였다.

Nikon SLR의 역사가 끝난 오늘, 언젠가 다시 Nikon으로 돌아갈 날이 오길 여전히 내심 기대하고 있다.

자그마한 봄

근처 편의점엘 다닌 지 이럭저럭 3년이 되었다. 그 사이 주인이 한두 번인가 바뀌는 듯했지만, 그것이 주인이 바뀐 것인지 어떤지 사실을 알 길은 없다. 단지 그렇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아주머니와 할머니의 그 어딘가 길목 즈음인것 같은 편의점 점주는 언제부턴가 내가 카운터 근처에 가면,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항상 내가 피우는 담배를 먼저 집는 짧은 동작과 함께, 짧게 인삿말 같은 안부를 나누게 되었다.

도대체 언제 쉬는지 모르겠지만 낮에 가도, 한밤에도 있었다. 때론 검은 새벽녘 밀어닥친 물건들이 정리되지 못한 체 모진 피로에 밀려 카운터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볼 때가 많았다.
담배 한 갑 사려 굳이 사람을 깨우는 게 맞나, 담배 한 갑 마진이 얼마 안 된다고 들은 기억이 있는데 그냥 다른 편의점엘 갈까, 그래도 매출이 나오니 여기서 사는 게 더 좋을까, 아니 그 이전에 한 겨울 강원도에 쌓인 눈 더께 처럼 쌓인 피로를 조금씩 녹이고 있는 단잠의 가치와 담배의 매출을 애초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소심하고 시시한 생각이 들 땐, 나도 피곤한 상태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그랬던 것 아니었지만, 때때론 혹여 깰까 싶어 조용히 그 자리를 나와 에둘러 다른 편의점엘 가곤 했다. 어느 게 더 좋은 건지 나로선 판단이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하는게 간혹 내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라는 이기적 이유일 것이다.

계절이 한 바퀴 도는 동안 새로 머리핀을 한 모습이 잘 어울리신다던가 같은 말도 건넬 정도가 되었다. 새벽 담배 사러 갈 때 잠들어 있는 점주를 조심스럽게 부르니 선잠에서 번뜩 깨어나 담배를 바로 꺼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듣기론 마진도 얼마 안 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깨워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저 오시는 것으로도 감사하다고 화답을 해주기에, 고맙다고 화답하며 괜히 옆에 있던 빵도 하나 더 샀다.

다시 시간이 흐른다. 특별할 일은 없다. 편의점과 나와의 특별할 일이 생긴다면 어떤 형식이 될까 상상해도 쉽게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단조롭고 평화적이며 조용하다. 이 사사로운 짧은 틈새의 고요함 그리고 변화하지 않음에 나는 감사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습니다. 라고 인삿말을 건넸다. 뭔 일로 기분이 좋습니까? 라기에 그냥 좀 기분이 좋습니다 라고 대답한 지 1초도 안 되어, 난 기분이 나쁩니다. 라고 화답이 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라고 물으니,

이게 틀린 일인 것 같은데 와 그리됐는지 그래서 영 기분이 벨롭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이게 무슨 말인지 해석이 안되어, 상대방의 눈을 봤는데도 2초 정도 걸린 것 같다. 아아… 이런.. 평소와 다르게 고맙습니다라는 말 없이 조용히 담뱃값을 계산하고 편의점을 나왔고, 내 어깨 뒤에서 늘 들리던 감사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2025년 4월 4일 14:43분의 일이었다.

딱히 의미는 없다

몇 년을 함께 했을까, 되돌아 생각해 봐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이나마 더 정제된 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몇 가지 겹쳐진 어느 날 끝에 문득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어느 시간에, 어느 곳을, 어느 누군가를, 어느 이유가 되었다 한들 그 어떠한 순간에도 예외 없이 붙박이처럼 들러붙어 있다. 드라마틱한 사진적 과장과 작화시 레이어 분리를 통해 메세지를 선명하게 전하기 좋은 광각도 아니요, 원근감 압축에서 오는 꽉 채워진 긴장감이나 대상을 추상화 하기 좋은 망원 렌즈도 아니다. 그렇다고 줌이 되어서 여러 상황에 유연히 빠르게 대응 되는 줌 렌즈도 아니다.

우리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사용하는 눈동자와 뇌가 인지하는 세상의 전부이자 단 하나의 원근감. 세상 흔해빠진 수 없이 다양한 50mm 초점거리를 가진 렌즈 중 하나. 생경미 같은 것은 없다. 인간이라는 종이 눈으로 인지하는 원근감과 같기에 익숙하고 그렇기에 사진적 구성에 있어 화려함 없는 흥미롭지 못한 그런 초점거리.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의 일신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어떠한 때라도 몸에 일부처럼 있는, 이 50mm 초점 거리가 참 좋았다. 이유라면 몇 가지가 있지만 지금은 그것을 굳이 하나 하나 말하고 싶진 않다. 그저 이 렌즈를 통해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한다. 정신이 나가버린 때에도 이 렌즈는 무감하게 나를 통한다. 내가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인지, 이 렌즈가 나를 찍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엷고 기묘한 감각이 항상 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렌즈를 통해 나의 망막에 맺혔던 수많은 것 중 어떤 것은, 내 몸에 맺혀져 버린 것들이 있다. 언제부턴가 문득 이 렌즈를 보면 몸이 소리 없이 우우웅 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은 괜찮았다기 어느 날은 하루 전체를 망쳐버릴 정도로 소리를 낸다. 딱히 어떤 조건이나 패턴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어디를 가던 나의 어깨와 손과 마음과 함께했다.

개인적으로도 이웃들에게도 험난했던 2024년이 끝났다. 부디 이 렌즈가 좋은 것 따뜻한 것 아름답고 행복한 것을 많이 봤으면 한다. 나는 2025년 1월 1일 이 렌즈를 다른 이에게 양도 했다.

사랑이 할 수 있는 것이 아직 있을까

현재, 미래, 마음.

자신을 방구석에서 조용하게 덕질을 하고 있는 오타쿠라고 소개한 이가 나와선, 이런 오타쿠마저도 나오게 한 윤석열과 국힘당에 때문에 조용한 덕질을 방해받은 분노로 시작해서

대학생, 고등학생 언니들이 나와서 자신도 나왔다는 중학생이 있다. 이윽고 초등학생까지 나왔다.

백발 성성한 할머니, 할아버지도 보였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수 많은 이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젊은 친구들이 내 예상과 다르게 정말 많이 나왔다는것이 가슴 벅차다. 중년이 이 나라의 현재라고 한다면 이들은 이 나라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산에서도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이 광경에 총과 칼 머리를 개머리 판에 맞아 길바닥에 구르는 광경이 겹치고 대공방첩실 지하 의자에 묶여 고문당하는 그림이 겹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다들 생업에 바쁘신 분들도, 먼저 마음만이라도 더 보태 주셨으면 한다.

2024. 12. 3 PM 10:27

제목 :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합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 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 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2024.12.3.(화)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박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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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재적 과반수 찬성하면 계엄령은 그 즉시 해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국회 앞은 들어가지 못하게 막혔고
그 사이 방금 전 무장 군인이 국회 정문에 등장했다.
총과 칼이 우리 눈 앞에 있다.

45년만에 되살아 난 망령

오전 1시 1분 계엄 해제 요구 결의 가결, 재석 190명 전원 찬성.
2시간 48분 만에 계엄령 무효

살아생전

살아생전 생부와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다. 지금껏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당신도 예외 없이 언젠가 죽음이 찾아올 텐데, 그날 풍경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그로부터 다시 수년이 흐른 어느 날, 어머니도 생부도 나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어느 날 이렇게 말을 했다.

향은 하나 피워 올려드릴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벼리고 벼려 겨우 만들어낸 끈에 찌그러진 식물의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끈은 하나의 풍경 혹은 죄의식 혹은 복수 혹은 용서와 나의 흔적으로 이루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구성이 뭐가 되었던 어쩌면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 끈이 무슨 재료로 어떤 색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세세하게 따질 만큼의 사치스러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매듭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가기 위한 매듭을 묶어가는 끝은 거의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 찌그러진 식물의 섬 전시는 중반을 지나 대략 일주일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 생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시를 마치고 이후 매듭을 묶기 위한 최종 국면에 계획들도, 문자 그대로 사라졌다. 몇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멈췄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인연을 끊은 생부의 혈육들에게 소식은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최소한의 할 만큼은 했다는 마음이 들 때까지 계속 연락을 취해 봤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혼자서 향을 피웠다.

오늘로 생부가 사망한 지 1년 되었다.

여전히 이날이 되도록 목과 심장에 박혀있는 굵게 녹슨 못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다. 이미 일어난 일로서 확정된 일이다. 이미 확정이기에 어떻게 노력한다고 해도 그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계속 아플 뿐이다. 계속 아프면 사람은 언젠가 결국 망가진다. 나는 아직 마음속에 끈질기게 남겨진 작업이 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라도, 생각해 봐야 별수 없는 일을 계속 생각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 매듭을 만들기 위한 끈을 만들었고, 매듭을 묶기도 전에 끈이 사라졌다. 별수 없다. 이 자체를 받아들이기로 하자. 달리 선택 할 수 있는 것도 나에겐 없다.
찢겨나가 사방에 튄 육편이 길바닥에 토사물 찌꺼기처럼 되어 버린 페르소나의 잔해물을 손바닥으로 대충 쓸고 주섬주섬 주워 담아 다시 바늘과 실로 잇고 기워갔다. 시간이 꽤나 걸리는 일이다. 묵묵히 계속하다 보니 겨우 손바닥 하나 가릴만한 정도의 프랑켄슈타인처럼 기워진 천 쪼가리 하나가 만들어졌다. 어찌 되었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그것을 눈앞 둬서 하늘을 가리는 것이 나에겐 필요했다. 하늘을 가린 덕분에 멈춰 있던 일상은 어떻게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돌아간다. 나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예상보다도 꽤나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요 몇 달 전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여기저기서 쇠가 비틀릴 때 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생부 사망일이 되기 3주 전, 누더기 같은 페르소나를 쓴 것에 대한 청구서가 내 앞에 착착 쌓여갔다. 나는 지불 능력이 없었다.

81억 명의 세계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개인의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세상은 그대로 흘러간다. 세상이 그렇듯 나 또한 어찌 되었든 1/8,100,000,000 정도의 Life goes on 이다. 성질 더러운 놈이랑 영영 헤어질 수도 없으며, 죽을 때까지 같이 있어야 한다면 어찌 되었든 조금씩 어르고 달래가며 함께 가야 할 일이다. 이것이 삶을 너무나 끔찍하게 만들어 고통스럽다면 담백하게 삶을 마감해도 그리 나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침 창문 커튼 사이로 던져진 엷은 빛 조각이 무심히 입구에 드리누워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 내쉬고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딱히 의미는 없다.

새끼 손톱 1/8

필름 스캔할 일이 생겨 작업 들어가기 전, 어쩐지 스캐너 컨디션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광원의 밝기, 점멸 타이밍, 서보 모터, 샤프트 그리고 광학 반사거울의 오염 등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컴포넌트들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만 스캐너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광학 반사 거울에 먼지가 쌓이기 마련인데, 함께한 시간에 비해 쌓인 먼지가 예상보다 많지 않아 보여 잠시 고민 했다. 스캐너에 장착된 광학 반사 거울은 매우 민감하다. 거기에 더해 스캐너는 기본적으로 확대기 구조를 차용했기에 광학 반사 거울을 통한 빛의 이동 경로와 센서의 빛 이동 경로에 있어서 +-0.02도 단위로 조금만 틀어져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광학 반사 거울과 센서가 설치된 구조물은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며칠 고민하다가 레이저 광학 장비에 장착된 렌즈를 닦을 때 쓰는 광학용 스왑을 주문했다.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 센서 클리닝 등급의 클리닝 액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이걸 그대로 쓰기로 했다. 스캐너를 다시 뜯고 클리닝 액을 스왑에 두 방울을 적시고 나서 광학 반사 유리에 접근해서 스왑이 표면에 닿을 듯 말 듯 숨을 멈추고 매우 조심스럽게 표면을 닦아냈다. 이후 다시 클리닝 액을 한 방울만 적신 스왑으로 전체를 닦아낸 이후에 마지막으로 마른 스왑으로 마무리했다. 클리닝이 된 스캐너의 반사 광학 유리는 살짝 미안해질 정도로 반짝 거렸다. 일상에선 접할 일이 거의 없는, 육안의 한계 안에서 기하학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그 자체로도 예술품처럼 보이는 기괴한 3차원 단순 평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 아름다움에 기분이 좋아졌다. 클리닝 이후 예상으론 데이터상 D-Max에선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나, 콘트라스트가 강하게 분기되는 부분과 소위 미약한 블룸 현상에 있어선 조그만 개선이 있을 것이다.

스캐너를 다시 조립하고 기왕 테스트하는 김에 농도 분해능을 살펴보고자, 물리적으로 정상 범위 농도를 매우 초과하여 스캔할 일 자체가 있기 어려운 은염 농도의 차이가 매우 극단적인 흑백 필름을 일부러 고르고 그에 따른 데이터를 살펴봤다. 그런데 화면에서 이상한 지그재그 노이즈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여러 차례 테스트했는데 패턴을 보아하니 외부의 노이즈가 끼어들어온 패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좁은 범위 안에서만 보더라도 원인은 정말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떠오른 것은 전원과 인터페이스 케이블이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유사 사례를 찾고 찾다가 국내엔 정보가 전무하여 외국 쪽 포럼의 다양한 말들을 들었다. 단순한 기계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더라도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들, 자신이 말하면서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들, 자신의 말이 틀린 것인 조차 모르는 이들, 틀린 것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 이들, 애초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의 치명적 불순물들은 언제나 일정 비율 섞여 있기 마련이지만, 그건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 생각, 논리에 따라 걸러내고 취사 선택해야 할 일이다.
어찌 되었건 외국 쪽 포럼을 찾아보니 마침 케이블 노후화로 인해 노이즈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전원 케이블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디지털 전송 케이블에서 심지어 전원 공급과는 거리가 있는 녀석인데 전송 패킷 블럭이 깨지고, 교정 비트도 깨지고, 패킷 재전송 요청도 무시 되는 단계까지 가서야만 이미지가 깨지면 깨지고, 전송 실패가 뜨면 전송 실패가 뜨지 이런식의 연속적 패턴을 가진 노이즈가 끼어든다는 게 이론적으로 있기 어렵다. 그 와중 포럼 스레드에 참가한 몇몇이 센서 노이즈와 필름 그레인을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극단적 농도의 필름을 억지로 노출 보정할 때 발생하는 그레인이나 톤이 깨진 출력 결과를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설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발생한 촌극이 언제나 몇 번이고 일어나는 곳이다. 틀린 것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 이들의 말도 언제나 비슷한 패턴이다.

이 말을 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결국 마음이 답답해져 버렸고, 혹시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 가정을 한다. 어쨌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하니 선재가 굵고 쉴드 처리된 꽤나 비싼 신품 케이블과 전원 케이블 그리고 페라이트 코어를 몇 갠가 주문했다. 도착한 전원, 인터페이스 케이블 각각에 페라이트 코어를 루프식으로 한 번씩 감아서 전부 교체했다. 테스트해 보니 역시나 노이즈가 보인다.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전기 공급 문제부터 보기 시작했다. 부산 중구엔 지역 특성상 새로 건축한 지 몇 안되는되는 건물을 제외하곤 아직까지도 접지가 없는 건물이 대부분이다. 없는 접지를 만들 순 없어서 이사 할 때 별도로 접지 공사도 같이하려 했지만, 꽤 큰 비용 문제와 추가로 발생할지도 모를 몇 가지 문제로 접지 공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전 앰프에 쓰던 전기 노이즈 필터를 달아봤지만,

역시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AVR 기능이 들어있는 액티브 타입 UPS 같은 게 떠올랐지만, 이 정도의 스펙을 지닌 물건의 목적을 생각했을 때 나의 필요에 비해 너무 지나친 오버 스펙에 가격 또한 그에 걸맞다 보니 애초 논외다.
여러모로 수소문 중 내가 배웠던 기초 전기 이론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물건이 세간에 팔리고 있었다. 이른바 접지가 없는 곳에서 접지를 만들어준다는 멀티탭이라는 물건이다. 마치 게르마늄 팔지를 차면 건강이 좋아진다는 정도 수준의 약팔이 느낌이라 말이 되나 싶긴 한데 조금 더 찾아보니 효과가 있다는 사람, 없다는 사람도 있어서 결국 안 되면 하는 수 없지, 싶은 마음으로 이 말도 안 되는 물건을 구입했다. 물건이 도착하자마자 일단 다른 건 둘째 치고 샤머니즘에 가까운 이 물건을 검증해야 했다.
메뉴얼을 읽고 사용법을 익힌 후 멀티 테스터를 가지고 핫 라인을 찾아서 접지 테스트를 해보니 어? 이게 왜 접지가 되지? 진짜 되네? 그런데 특정 상황에서 또 접지가 안 된다. 조건을 찾기 위해 시간을 들여 하나씩 살펴보니 전자기장이 강한 물건이 근처에 있거나 특정 기기의 콘센트가 물려 있으면 접지가 풀리는 이상한 물건이다. 아.. 이래서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된다고 했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아무튼 이 물건을 통해 접지가 된다는 것이 오래전 배웠었던 기초 전기 이론으론 원리가 짐작도 안 간다. 내가 모르는 부분은 언제나 상상한 것 이상으로 당연히 훨씬 더 많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르는 것이 거의 전부다. 하물며 기초 이론을 알고 있는 정도론 실제로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나는 설명하지 못한다. 아무튼 이런저런 상황을 소거법으로 하나씩 정리해서 접지가 작동(?)되는 상황을 찾고 이를 고정하여 스캐너를 다시 테스트해 봤다.

역시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리플 노이즈 비슷한 모양이니 분명 노이즈가 센서에 타고 들어가거나, 신호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을 텐데 어찌 되었건 기본적으로 전원부 쪽을 의심해 보는 것이 순서상 타당할 것이라 생각 했다. 전원 공급단 부터 시작하기 위해 파워서플라이를 찾아보니 기적적으로 형식 번호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신품 부품이 아랍 에미리트의 한 셀러가 팔고 있었다. 판매자의 품목들을 보니 패턴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쓰는 무슨 물건인지 판매자도 모르지만, 지구 어딘가서 언젠가 필요한 사람이 한두 명은 있을 테니 적당히 뭐든 사들이고 팔릴 때 결국 팔리겠지 싶은 느낌이다. 제조사의 부품 의무 보유 기간을 넘은 지 꽤나 된 마이너한 기계의 특정 신품 부품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아랍 에미리트까지 가서 있는지 그 여정이 나로선 쉬이 상상이 안 된다. 그래서인지 부품 가격도 그렇지만 배송료도 비쌌는데 별수 없다. 신품 부품이 지금도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다시 며칠인가 지나 부품이 도착하여 교체하고 테스트를 했다.

역시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면 이제부터는 문제가 갑자기 복잡해진다. 모든 곳을 의심해 봐야 한다. 광원, 광원 콘트롤러, 로직보드, 차폐형 리본 케이블, 센서 모듈부, 서보모터, A/D 컨버터 그리고 이 모든 곳에 각자 들어가는 전원 공급단 등 다양한 부분이 대상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 남는 건 모든 유닛들을 하나씩 따로 구해서 테세우스의 배 처럼 부품들을 교체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최후의 과정엔 센서 유닛을 교체하는 상황까지 가버린다면 제조사의 센터 전용 도구, 전용 캘리브레이션 타겟, 전용 교정 프로그램 이 3가지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같은 중고 스캐너를 찾아보거나 다른 스캐너를 입수해야 한다.

타사에서 아직 발매하고 있는 필름 스캐너는 수치 스팩이 더 좋아 기대감을 가지고 실기를 잠시 받아 테스트해 본 적이 있다. 데이터를 뽑아 보니 실제 출력 품질은 제조사에서 표기한 수치 스펙만큼 되지 못했고, 필름 입자의 아큐탄스도 살짝 뭉개져서 나왔다. 스캐너 내부의 확대 렌즈 품질이 센서 해상도를 전부 받아 주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름의 평활도를 잡아줄 안티 뉴턴링 캐리어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논외다.
선택지에서 유일하게 남는 건 이마콘 플랙스 타이트 정도인데 대형 필름은 최대 2040dpi, 중형은 최대 3200dpi로 스캔되니까, 내가 사용하는 스캐너의 중형 필름이 최대 4000dpi가 되니 오히려 해상도는 이마콘이 더 떨어진다. 남는 장점은 35mm 필름 스캔할 때 더 높은 dpi, 가상 드럼을 통한 필름 평활도와 기분 (암실의 필름 확대기를 스캐너 버전으로 축소한 구조와 거의 같기에 이를 기본으로 한 아이디어와 내부 설계의 발상이 간결하고 아름답다. 게다가 필름을 스캐너에 장착할 때 쓰는 필름 트레이 라이트 박스의 구조물 위에 필름을 올리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이 좋아짐 정도인데 여기에 더해 이마콘의 스캔 프로그램인 플랙스 컬러는 정말 수백 번을 써도 쓸 때마다 최악이라고 느꼈다. 플랙스 컬러의 의미라고 한다면 어쨌던 스캐너를 구동하게 하고 필름의 데이터를 긁어오는 정도로만 봐야 할 것이고, 네가티브 필름의 컬러 렌더링 품질도 정말 좋지 못했다. 하다못해 SilverFast 프로그램에서 이마콘을 지원만 했더라도 좋은 기분을 위해 어쩌면 이마콘을 썼을지도 모른다.

결국 개선이라 할만한 선택은 있지 않았다.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쓸 수도 없다. 궁여지책으로 스캔된 이미지를 고속 푸리에 변환을 한 이후에 노이즈 패턴의 주파수를 따서 마스킹하고 이걸 다시 고속 푸리에 역변환을 하는 정도가 최선일 테지만, 그야말로 궁여지책일 뿐이고 한장 한장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효율도 너무 떨어지는 데다 이렇게 품을 들인다 하더라도 이미지의 품질이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다. 정말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쓸 수도 없다. 신품 스캐너는 있지도 않으니, 중고로 구입해야 하는데 잘 사용되어 온 중고품과 인연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운의 영역이다. 설령 운이 좋게 따라왔다 하더라도 물건 자체가 시간이 꽤나 지난 물건이고 그에 따른 부품의 내구년한이라는게 있으니, 중고품을 입수하더라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시간은 흐르고 낡아가고 늙어가며 결국 죽는다.

아마도… 비교적 높은 확률로 캐피시터가 문제겠지. 쌀알들 마냥 깨알 같이 박혀 있는 캐피시터를 하나 하나 전부 다 들여다 본다 하더라도 하나씩 추적하려면 적절한 도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어쨌던 스캔이 필요할 땐 외주로 돌리면서 틈이 날 때마다 관련 정보가 없는지 찾아보며, 제조사의 내부 엔지니어용 수리 메뉴얼도 어떻게 입수해서 찾아봤지만 내가 겪는 증상 관련으로는 나와 있지 않는 내용이라 시간만 흐르고 있다.
전원 관련은 문제가 없을 듯 하고, 센서에서 A/D 컨버터로 넘어갈 때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잖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어찌 검증할 방도도 지식도 기술도 도구도 나에겐 없었다.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A/D 컨버터의 데이터 시트와 관련 문서를 살펴보던 중 레퍼런스에서 노이즈 발생의 밴드 리미트에 대한걸 발견하고 이를 조율하기 위한 디커플링 네트워크까지 닿았다. 캐피시터 문제가 아닐까 싶은 막연한 생각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바뀌었다. A/D 컨버터의 핀 번호를 따라서 회로 추적을 하면 될까 싶었지만 여기서 멈춰졌다.

갑자기 모든 게 다 상그럽고 짜증나고 귀찮아진 것이다. 정신적으로 지친것도 있지만 몸 상태도 좋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나도 인지하지 못한 체 상대방에게 짜증내고 나선 나중에 앗차 싶어 사과하는 일이 요즘 들어 간간히 있었다.
언제나 항상 잘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을 기울여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짜증이라면 발산하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에 따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인지 하지 못한 가속, 감속, 브레이크 없이 발산되는 짜증은 문제다.

문득 댐이 터진 것처럼 감정이 소리 없이 쏟아졌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도대체 나는 왜 여기 있는가. 그저 모든 게 허망하며 의미 없다. 가치의 편린조차도 없다. 아니 애초 가치의 정의를 생각하면 이 말조차도 우습다. 애초 의미나 가치 같은 건 존재한 적도 없었으며 삶의 궤적을 만든 수많은 것들과 환경 압력, 동조 압력 등에 의해 백터화 된 관성으로 움튼 일시적 현재 상태의 중첩을 이어갈 뿐이라는 것은 아주 예전 부터 인지 했었고 겪기도 했지만,
역으로 일시적 현재 상태의 연속일 뿐이기에 그 안에서 자신이 만족하는 형태의 유희를 걸어가면 될 일 아닌가. 삶의 본질과 장난감은 닮아 있지 않은가. 라는 식으로 간간히 독려해 왔었지만, 배터리가 다 빠지고 내가 지니고 있는 그나마 몇 개 되지도 않는 페르소나 조차도 멈춰버리고, 껍질만 분리되서 왠 알 수 없는 자동인형이 말하고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괴로워하고 간혹 미소 짓는 이런 섬찟한 감각은 꽤나 간만이라 반가우면서도 괴로웠다. 언제부턴가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이후로 음악도 거의 듣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이후에서야 스피커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여차저차 해서 스피커를 고치고 다시 귀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음악을 듣지는 못했다.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숨통은 조금 트이는 느낌이다. 좋아하는 곡을 조금 더 소중히 듣는 기분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여전히 좋지 않지만, 스피커를 고치는 행위를 통해 약간의 회복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한 줌 조금 안 되는 에너지를 받아서 스캐너를 다시 바라봤다. 참으로 얄팍한 일이다.

다시 한참을 찾고 찾아 운까지 따라준 덕에 기종은 달랐지만, 마침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공유해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거도 같이 공유해줬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결정적인 상황에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어 도움을 나누는 이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의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며, 동시에 얼마나 적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기본적인 원인도 파악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초 개념도 조금 알게 되었다. 남은 건 기종이 달라 회로가 다르게 구성된 부분을 해결하면 된다. 그래서 해결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추가로 여러 포럼을 온종일 뒤적이며 다양한 말들을 목도 했다.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들, 자신이 말하면서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들, 자신의 말이 틀린 것인 조차 모르는 이들, 틀린 것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 이들, 애초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의 치명적 불순물들은 언제나 일정 비율 섞여 있기 마련이지만, 그건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 생각, 논리에 따라 걸러내고 취사선택해야 할 일이다. 애초, 이들은 각자 나름의 경험자 일순 있지만, 진짜 전문가가 아니다. 또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도 아니다. 짜증 낼 일이 아니다.

잠시 마음을 정리하고,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지를 궁리 했다. 작업의 편의성을 위해 리드를 뽑아서 쓰는 게 편하겠지만, 나는 왠지 정확히 크기가 맞는 표면실장형 캐피시터를 쓰고 싶었다. 다만 국내에선 찾기 어려워 같은 스펙에 크기가 조금 더 큰 캐피시터와 솔더윅을 주문했다. 주문 후 도착까지 4일 정도 지나 도착했다. 스캐너를 다시 뜯고 커다란 센서가 장착된 보드에 접근해서 해당 부품을 살펴봤다.

겉보기엔 이게 문제가 있다고 상상하는 게 불가능 할 정도로 세상 멀쩡해 보인다. 조심스럽게 부품을 떼어냈다. 캐피시터에 열을 오랫동안 가해서 좋을 일이 별로 없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열로 작업하고 싶었지만 표면실장형 타입을 인두로 작업하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그냥 리드선 타입으로 할껄…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이지 않는다 한들 내가 알고 있기에 결국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위로하며 새끼 손톱 1/8 정도 크기의 부품 1개를 새로 달았다.

간단하게 정리하고 스캐너에 전원을 올리고 초기화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이후 필름을 넣어 스캔했다.

이 조그맣고 거대한 세계의 안에, 겉보기엔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 고작 새끼 손톱 1/8 정도 크기의 50원 짜리 부품 1개 였다.

결국 증상은 개선 되었다.
아니 완벽하게 고쳐졌다.

원인을 찾고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과정을 치러오는 동안 적지 않은 시간, 생각, 과정, 정신적 에너지 그리고 돈이 들었다. 심지어 겉으로 보기엔 세상 멀쩡해 보이기에 이것이 원인일 거라 판단하기 쉽지도 않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도착한 장소엔 새끼 손톱 1/8 정도 크기의 50원 짜리의 것이, 이 전체를 쓸 수도 버릴 수도 없게 만들며, 전체를 고치게도 하고 전체를 망가지기도 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을 길게 목도 했다.

문득, 인간의 복잡한 마음이나 격류에 휩싸여버린 감정의 원초적 시발점도 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 터이다. 그러나 나의 망가진 부분을 길게, 깊게, 파고 들어간 끝에 마침대 찾아 낸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렇게나 작은 것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기원전

지혜 없는 힘은 결국엔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 기원전 로마 제국 시인,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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