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er

다행이다.

친구의 도움으로 작업실의 배치를 바꿨다.
쉽게 버릴 수 있던 것들, 쉽게 버릴 수 없었던 것들, 한편으론 버릴 수 없었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 벽에 붙어 있던 내 사진들을 대부분을 떼어내고 아주 몇장만 남겼다.

예전에 의자로 쓰였던 큰 스피커 – 예전엔 주로 그곳에 여잘 앉히곤 했다. 베이스의 울림이 확실한 음악을 일부러 소리를 크게 해서 틀곤 했는데, 그럴때 변화되어지는 표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관찰하곤 했었다 – 는 언제부터인가 이것저것 쌓이기 시작하더니 잡다한게 쌓이기 시작했었다. 그 위에 있는 물건들 역시 버리고 정리하여 다른곳에 넣어두고, 스피커는 내 키보다 더 높은 곳에 앉아 있게 되었고, 그 자리엔 에이리언에 나오는 페이스 허거와 확대기용 타이머 박스가 올려지게 되었다.

입구쪽에서 들어오는 부분에 정신없던 전선들 신호선들은 뒤쪽으로 보이지 않게 고무 커버를 씌웠다. 그 많고 정신 없는 케이블을 정리 한다는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일이다. 점잖게 인정하고 커버를 씌움으로써 해결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훨씬 정리되어 보인다.

커피메이커는 고장나버렸고, 우퍼 스피커와 전자밥솥이 자기 자리를 찾았다. 예전에 마셨던 맛좋았던 술이 담겼던 빈 병도 모조리 버렸다. 사실 그런거 가지고 있는다고 해도 술이 다시 생긴다던가 하진 않는다. 먼지만 쌓이고 보기 흉할 뿐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그렇게 놔두고 있었던건 단순한 귀찮음 일거라고 생각한다. 정말인진 모르겠지만.

몇일 후,
몇가지 모자라고 부족한게 있어서, 국제시장엘 나갔다. 소음방지용 쿠션 스티커와 4구 콘센트와 30와트 젖빛 백열전구와 110볼트 암, 수 소켓과 전선 2미터, 콜크 보드 두장을 사서 돌아왔다. 돈이 조금 더 있었으면 콜크 보드를 한장 더 사고 싶었다. 커피 메이커를 사려 했지만 생각보다 비쌌다. 대신 천오백원짜리 플라스틱 드립퍼를 샀다. 실은 사기로 된것을 사고 싶었지만 역시나 그따위 것들은 가격이 비싸다. . 돌아와서 파티션에 남아있던 사진들을 때어내고 그 자리에 콜크 보드를 붙였다. 훨씬 깔끔해보인다. 아트핀 따위로 사진을 붙이기에 좋을 것이다.

고치긴 몇달 전에 고쳤지만 테스트만 해보고 다신 전구를 넣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던 스텐드에도 전구를 끼워주었다. 스위치를 넣지도 않았는데 불이 들어왔다. 순간 목이 메이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스위치를 넣지 않았는데 불이 들어올리 없다. 단지 전구를 넣기 전에 스위치기 미리 접속되어있던 것일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들때가 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가만히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떤 때가 되면 급작스럽지만, 침착하게 숨통을 조여가는 일흔살의 남자처럼.

아직 밖의 불빛이 있었다. 확실히 가을인 가을인것이 여름에 비하면 어두웠지만 땅거미가 지기 바로 직전의 붉고 푸른 빛의 냄새가 나는 시간이었다. 작업실의 불을 다 끄고 스텐드로 보여지는 불빛을 봤다. 참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이지만 어딘지 서글프게 느껴진다. 예전에 이 불빛 하나만으로 좋은 사진을 찍었다. 지금 봐도 좋은 사진들 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진들 인 것이다.

4×5 오메가 D5 확대기의 헤드가 고장났었다. 기타 접속구와 다이크로익 필터의 콘솔부, 램프의 접속구, 메인파워와 타이머의 연결등이 문제가 있었다. 싸그리 다 고쳐버렸다. 전선의 피복을 벗겨내고 암수 콘센트를 달아주고 메인파워와 타이머를 연결해주었다. 확대기는 다시 살아났고 잘 움직여주었다. 아직 다이크로익 필터쪽의 콘솔부와 연결되는 기어쪽은 아직 손을 다 보진 못했지만 흑백 프린트 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필름 케리어에 4×5 필름을 넣고 밑에 깔려있던 20×24 이젤에 상을 투영해봤다. 날카롭고 부드러운 상이 보인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확대기 렌즈가 80미리 밖에 없어서 크기 조절이 자유롭지 못하고 주변부에 심각한 비네팅이 생기기도 한다. 120미리 확대기 렌즈는 비교적 저가의 것이라고 해도 나에겐 여전히 비싼 가격이다.

패드의 Digital Pad 부분의 입력이 똑바로 되지 않아서 평소에 짜증이 많이 났었다. 마음먹은데로 콘트롤이 되지 않으면 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패드를 모조리 분해하여 문제점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애초에 설계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 아마도 타사의 라이센스를 회피하기 위한 설계로 보였다. 설계 개념 자체는 훌륭했지만 입력시의 감촉이 좋도록 만들기 위한 개념은 없어 보였다. D-Pad를 지탱하는 내부 원형판을 잘라내어 십자로 만들고 그에 따라 키 자체의 압력이 흐물해지면서 덜꺽 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사이에 완충제를 붙였다. 너뎃번의 튜닝 끝에 제법 만족스러운 감각을 만들 수 있었다.

요즘 들어 컴퓨터가 자주 다운이 되었다.
램 뱅크쪽의 접촉 불안이 원인이라고 생각했었다. 청소를 하고 다시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문제였다. 한창을 붙들고 있다가 겨우 원인을 알게 되었다. 하드 디스크 접속부의 불안이 문제였다. 게다가 그 채널에 물려있던 하드 디스크는 사진이 담겨있던 것이였다. 지금까지 하드가 망가지지 않고 잘 버텨준것을 정말이지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했다.

최근 기상 온도가 떨어진것을 생각하고 CPU기본 전압에서 오버클럭킹을 했다. 당연히 아무런 이상이 없이 잘 돌아간다. 하지만  보험 삼아 0.05볼트만 올리고 설정을 마무리 했다.

예전에 찍었던 4×5필름 10장을 현상했다. 한번에 이렇게 현상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쉬트 필름을 고정 시킬 클립이 문제였다. 35미리용 필름 클립은 4×5용으로 쓰기엔 문제가 많다. JOBO에서 나온 필름 클립은 여러가지 의미로 이상적인 클립이지만 따로 구입하려면 가격이 녹록하지 못하다. 일단 기존의 클립을 롱로즈 플라이어로 날이 선 부분을 휘게 만들고 양면의 접촉 부분이 평편하게 닫도록 조정해주었다. 일단 아쉬운데로 쓸만은 하지만 장기적으로 쓰기엔 문제가 있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제법 지친상태에서 주전자를 붙잡고 드립을 할 만큼의 기분 따위 전혀 나지 않는다.

현상해야 할 필름은 46롤이 남아있다.
밀린 공과금도 내야 하고 또 얼마후에 집세도 내야 한다.

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

.

무엇을 보았나.

간밤에 필름 정리를 하다가 그대로 졸아버렸다.
얼마나 졸았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느낌상으론 제법 오랫동안 잔것 같은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봤던 것이 밤 열한시 십분, 지금 시각은 밤 열두시 이십오분.

마지막으로 시계를 봤던 이후에 시간이 조금 흐르고 졸았던걸 고려한다면 삼십분 정도 졸았던것 같다. 그대로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자고 싶었지만, 쌓여있는 필름들을 보고 있으니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몇몇인가와 메신져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사람들은 돌아갔다. 그 사이에도 필름을 계속 정리하고 있었다. 다소 피곤한 느낌이 들어 커피를 좀 진하게 타서 마셨더니 확실히 좀 낫다.

음악을 들으면서 혹은 뭔가를 보면서 계속 필름 정리를 해나간다.
정신 차리고 보니 작업실 창문 밖으론 태양이 엉덩이를 내밀고 있다. 이때 즈음의 태양빛은 바로 직광으로 눈을 쏘기 때문에 눈이 많이 피곤해진다. 게다가 체력도 거의 바닥날때 쯤이기 때문에 이럴때 받는 오전의 태양 빛 같은 건 달갑지 못하다.

결국, 완전히 지쳐 필름 정리는 관두었다. 어짜피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을.. 어쩌면 내가 숨이 붙어있는 한 네버 엔딩 스토리 같은 일이다. 조금 필름 정리가 늦어 진다고 해도 큰일 이야 나겠는가.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다가 이렇게 쌓여 버리게 되면 무리 해서라도 일정량 이상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리듬이 흐트리 지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서 필름조각들을 계속 만지고 있다 보면 가끔은 무엇인가 속에서 치밀어 오를때가 있다. 어떤 종류의 분노라던가 안타까움이라던가 슬픔 같은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진 알고 있다.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냥 묵묵히 그것과 마주하며 필름을 정리 할 뿐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것이 나를 아주 못살게 굴때가 아주 드물게 한번씩 있곤 한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나 보다. 그것에 지기 싫어서 이빨 꽉 깨물고 악으로 버텼지만, 지쳐가는 몸뚱아리와 커피만으론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든 머리 덕분에 결국 지고 말았다.

시간은 아침 다섯시 삼십 팔분이었고, 아직 매미가 운다. 몸이 끈적끈적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몸 속에 남아있는 소나무 진액 같은 것들이 스물스물 삐져나와서는 온 몸을 그렇게 굳어버리게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느끼곤 했기에 당황하진 않았다. 하지만 정말이지 여전히 기분 나쁜 감촉이다.

몹시 목욕탕에 가고 싶어졌다.
마침 몇달 동안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목욕탕에 갔던게 몇달 전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그 뜨거운 온탕에 몸을 푹 지져넣고 근육 한올 한올을 전부 풀어헤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검은색 비닐에 샴푸, 린스, 바디소프를 챙겨넣고 MP3플레이어와 헤드폰 그리고 카메라를 챙기곤 바깥으로 나왔다. 아마 여섯시가 넘었으리라 생각한다.

거리로 나서 횡단보고를 건너고 예전부터 제법 좋아했던 목욕탕엘 갔다.
문은 오래 전 부터 닫혀 있었던듯 했다. 입구 쪽에 뭔가 그리스 기둥 같은 것이 뒹굴고 있었다. 태양은 벌써 이 만큼이나 떠 있었고 그 빛은 나의 눈을 바로 찌르고 있었다. 아침 시내 특유의 미끌거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그렇게 문을 닫은 목욕탕을 멍하니 삼 사분 정도 보고 있다가, 가져간 카메라로 셀프를 한장 찍었다. 이 목욕탕 정말 망했나 보다. 라는 말을 중얼 거릴때 갑자기 생각이 났다.

시내로 나갈때 내가 주로 잘 다니는 길이 있었는데, 실은 그 길가에 그 목욕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소엔 목욕탕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같은건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눈으로 보고 있었을 런지는 몰라도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던가 인지하고 있었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간은 그 당시, 그 순간의 자신과 어떤 종류의 관련이 없다면 이다지도 무관심 해질 수 있는 것인가 싶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나의 문제도 크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자 문을 닫는 목욕탕에 대한 불만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을 닫았다 라는 느낌보다는 망해버렸다 혹은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았다. 라는 느낌에 훨씬 가깝다.

어쩔 수 없이 길을 돌아서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던 목욕탕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가격은 올랐고 목욕탕이 아닌 사우나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속에 뭔가 바뀐거라도 있었던가 싶었는데 알맹이는 전혀 바뀐게 없다.

옷을 다 벗고 카메라도, MP3 플레이어도 모두 로커에 넣어두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탕에 들어갔다. 물은 가득 차 있지 않았고 뜨겁지도 않았다. 순간 지금까지 쌓여있던 것이 한꺼번에 폭발할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별 수 없다. 폭발한다고 한들.

관의 벨브를 열어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적당히 섞이도록 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탕에 몸을 맡겼다. 이제 조금 기분이 좋은듯 하지만 이미 중요한 무엇인가는 지나가 버린 이후라는 느낌이다. 살다 보면 당연하게도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비록 이런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뭔가 맥이 빠지고 기운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뜨거운 탕 덕분에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다. 찬물을 마시고 다시 탕에 들어가고 다시 머리를 감고 몸에 비누칠을 하고 샤워하고 탕에 들어가고 다시 찬물을 마신다.

바깥엔 목욕탕에 들어갔을때 부터 나를 흘깃 흘깃 보던 30대 말 즈음으로 보이는 가운데만 대머리인 남자가 지겹다는 듯 TV채널을 느릿느릿 돌리고 있었다.
커다란 아디아스 로고가 등에 박힌 검은 티셔츠와 그의 머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물기를 모두 닦아내고 머리를 말릴때 거울을 봤다. 콧등 주위로 부터 주름이 가기 시작했다. 콧등에 난 주름은 왼쪽눈을 따라 그 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군.. 왼쪽 눈이군.. 오른쪽 눈에는 주름이 거의 없는데 왼쪽 눈으로 주름이 많이 졌구나..
그렇구나.. 작업실엔 거울이 없기 때문에(없는거나 마찬가지) 본적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뭔가 순간 확 하고 늙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옷을 입고 카메라와 MP3플레이어를 챙기고 길을 나섰다. 오전 아홉시가 넘었다. 작업실에 돌아오는 길에 뭔가를 찍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찍기 싫었다. 그럴때가 간혹 있다. 뭔가를 찍고 싶지만 아무것도 찍기 싫을때 말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무엇인가를 찍었다. 보였기에, 어쩔 수 없다. 찍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검은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샴푸니 뭐니 하는 것들을 다시 제자리로 놓고 봉지는 쓰레기 통에 버렸다.

돌아와서.

몇일간 작업실을 비운체 일을 보고나서 돌아와보니, 수백마리의 하루살이 주검과 창문을 거의 닫아놓은 상태 특유의 감도는 답답하고 텁텁한 공기와 한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덕에 보이는 검은 때가 끼어있는 바닥이 날 맞이해주었다.
짐을 풀고 한동안 말 없이 의자에 앉아 담배를 연속으로 3개피를 피우고, 차가운 물을 컵에 가득 채워 마시는 것을 3번 반복했다.

바닥에 검은 모래가 뿌려져 있는듯한 광경을 말 없이 한 동안 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담배를 피우고 물 한컵을 한번에 들이마셨다.

컴퓨터의 전원을 올리고 여행 중에 고장이 나버린 MP3 플레이어를 연결해서 증상을 살펴본 후에, 방법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플레이어 안에 내용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기계 자체는 다행스럽게도 작동이 된다.
음악을 다시 집어넣도록 하는 동안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모니터에 비춰진 나의 윤곽이 얼핏 보인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무척 피곤해 보인다. 도대체 난 뭘 하고 있는거지? 라는 혼잣말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듯 하다.

옷을 다 벗었다. 알몸으로 빗자루를 들었다. 바닥을 쓸어 굴곡이 갸름하게 깔린 검은 모레 같은 하루살이 시체를  모아서 쓰레받이에 담았다.
찌든때를 지우는데 쓰는 독한 약품을 들고 바닥에 뿌리고 걸레질을 했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약품을 뿌려놓고 시간을 조금 보내다가 다시 걸레질을 한다. 그렇게 계속 반복한다. 몸 전체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것저것 묻어있던 테이블도 싹 닦아내고 담배연기와 세월로 인해 노랗게 되어버린 냉장고도 닦았다. 가득차 있던 쓰레기 통도 비워내고 군데군데 쌓여있던 쓰레기도 전부 정리 했다.

어느정도 끝 마치고 난 뒤의 광경을 보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어딘가 눅눅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차가운 물을 두컵 마셨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대강 닦아내고 선풍기 앞에 서서 나머지 물기를 말렸다.

간단한 몇가지 볼일이 있어 시내로 나갔다. 여전히 덥다. 여름의 마지막을 악착같이 잡아 뜯어데는 듯한 매미소리와 귀에서 들리는 차갑고 부드러운 음악과, 한때는 선명한 네이비 블루였던 카메라 가방과 무거운 F6를 옭아매듯 거리를 걸었다.

가는 길에 항상 보이던 카우보이 마네킹이 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해서 왼손에 붙어있던 손가락 4개가 사라지고 얼굴에 구멍이 나기 시작하고 나중엔 혼자 똑바로 설수도 없어서 끈으로 몸통을 파이프에 묶어놨던, 그 카우보이 아저씨 이다. 웃는듯 울고 우는듯 웃는 그 아저씨였다. 결국은 사라졌다. 그 사라진 자리에서 1분 정도 그 빈공간을 응시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인화지를 샀다.
또 가격이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반가운 사람을 만났고,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우체국에 들려 보낼 것을 보냈다. 이전부터 봐왔던 익숙한 우체국 직원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싸그리 물갈이라도 된걸까, 익숙하지 않다. 작업실 바로 앞에 있는 슈퍼에서 담배를 한갑 샀다. 계단을 올라와 작업실의 검은 문을 열고 차가운 물을 한컵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무척 졸음이 왔지만, 잘 수 없었다.
익숙한 것은 담배만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매우 목이 말랐다.

날씨가 좋더라.

그래서, 괜히 서럽더라.
하지만 이렇게 서러운것도 잠시일 뿐.
땀이 흘러 옷을 검게 적시고 끈적거리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흐르는 시간을
슬그머니 목을 조르듯 흘려보내고 있을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면 그나마 좀 괜찮아 진다. 발가벗은체로 선풍기 앞에서 미지근한 바람과 마주하면 나름 시원해진다. 제법 기분도 좋아진다.

하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것도 잠시일 뿐.
기실 변한건 아무것도 없다.
변한것이라곤 30분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 뿐이다.

기린을 보고 싶다.

새삼 느끼는 것 이지만.

세계라는 것은

그 사람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 진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하나마나한 세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말이다.

이것이 나에겐 희망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가끔은 절망스럽게
느껴질때가 있다. 그리고 피곤하게 느껴질때가 있다.

물론 그렇게 느껴질때마다 난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여름과 겨울은 달라서 나에겐 여름이 좋게 느껴진다. 바흐와 헨델은 달라서 나에겐 바흐가 좋게 느껴진다. 조용함과 시끄러움은 달라서 나에겐 조용함이 좋게 느껴진다.

한편으론
해와 달은 달라서 나에겐 좋게 느껴진다. 해바라기와 안개꽃은 달라서 나에겐 좋게 느껴진다. 사진과 음악은 달라서 나에겐 좋게 느껴진다. 낮과 밤은 달라서 나에겐 좋게 느껴진다. 맑은날과 비오는 날은 달라서 나에겐 좋게 느껴진다.

창세기에 이런 말이 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해서 빛이 생긴 이후, 천지를 창조하는 일을 모두 끝낸 후 그는 이렇게 말 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좋아 보이더라\’

10일. 밤 10시.

2006년 7월 10일. 밤 10시.
서울 동쪽 약 80Km 부근 육상.

3호 태풍 위니아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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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제 핸드폰의 문자 메세지로 알려주셨습니다.
위니아가 아니라, 에위니아, 태풍의 신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익명의 제보자께 감사합니다.

그렇다.

경멸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 니체

無無. 無

이미 알고 있는거다.
이미 겪었던 일이다.

딱히 슬퍼할 여력같은 사치도 부리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사실 아무것도 난 모른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다지 다르지 않다.

여름의 일본이라는 것을 가보고 싶어졌다.
간다 한들 아무것도 없겠지만.

딱히 마쯔리 라던가 흔해빠진 부채를 들고 있는
유타카 아가씨라던가 그런걸 보고 싶다기 보다는.

그렇게 아무도 날 기다리지 않는 거리라는 곳에서의
혼자 여름을 \’걷고싶다\’라는 느낌이다.
미치도록 더운 도쿄의 어딘가에 있던 몇평 안되는 놀이터에
목을 땅에 쳐박아놓고 죽어있는 기린동상과 그 뒤에 있던 매정한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그렇게 정지된 듯한 그곳을.
매미는 죽을려고 악을 쓰는것 처럼 울고 있는 그 거리를.

물론, 오다이바 따위는 다시 가고 싶지 않다.

결국. 어느 곳이든, 날 기다리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겠지.

어쩌면. 난,
절대적으로 날 기다려주는
그 무엇을 원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르겠다.
\’절대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절대적으로 날 기다려주는
그렇게 날 맞이해주는
그 무엇 말이다.

사진따위가 아닌.

아마. 내가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조금은 지쳤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아까 마신 술때문이 아닐까 라고 자위한다.

그래서 아주 약간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붉은 밤, 홀로 암실에서 프린트를 하는것도,
길을 걷는것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누군가 옆에 있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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