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er

프린트

아무래도 내 베셀러 확대기에 콜드 라이트 헤드를 달아줘야만 할 것 같다.

좀더 넓은 토널레인지와 캘리어 이팩트가 발생하지 않는, 부서지지 않고 견고한 하이라이트, 그리고 매끈하며 단단하고 밀도감 있는 쉐도우를 보상 받을 수 있을것이다.

일단 가격도 저렴한 편이니까.

전시회 프린트 준비도 해야하니 좀더 높은 퀄리티의 프린트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인화지는 헝가리에서 제조된 포르테 인화지를 꼭 써보고 싶은데
아직까지 여의치가 못하다.

I\’m not scared

그녀가 대뜸 나에게 말했다.

\”오빠가 꼭 봐야할 영화가 있어요.\”

그녀는 어지간해선 나에게 음악이라던가 영화추천 같은걸 잘 하지 않는다.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고 난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녀가 나에게 꼭 보라고 했었기에 일단 믿었다.

\” 알려줘서 고마워. 여러가지로 궁금한게 많은데… 일단 물어보진 않을께.\” 라고 난 말했다.
\” 지금 물어봐도 괜찮은데 천천히 물어보셔도. 되고요 \”
\” 그럼 한가지만. 뻔한 질문 하나. \” 라고 말한뒤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계속 했다.
\” 내가 이 영화를 봐야만 하는 이유가 궁금해. \”

그녀는 말했다.

빛 냄새가 나거든요.
조용하기도 거세기도 한 빛 냄새가.

내용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정말이지 특별한 거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조용하고 약간 거세고 빛 냄새가 날 뿐이다.
이런 종류랄까 분위기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질리지도 않고 찬찬히 봤다.
영화가 거의 끝나갈때 까지도 그런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드디어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다.
한참인가 멍하니 엔딩 크레딧을 보다 순간 오열에 가까운 울컥거림이 몸은 아주 조용히 가만히 있는체 몸을 뒤흔들었다. 담배 한가치를 물고 의자에 앉아선, 그 동안에도 무념히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에 시선을 돌렸다.

난, 눈물을 흘릴 수 마저 없었다.

이 영화는 구원에 관한 이야기였다.

위스키를 마시다.

카메라가 말썽이다. 이리저리 마음고생한것 치면 솔직히 짜증이 난다.

몇일전 또 문제가 발생해서 서울로 보냈다. 이번에 세번째다. 분명 문제가 발생하여 보냈지만 서울 센터에서는 아무런 에러메세지를 찾질 못했다고 한다. 환장할 노릇이다. 지난주 금요일 물건을 발송하여 토요일 부산에 도착해야 할 물건이지만 받질 못했다. 전화도 오지 않았다. 월요일 오후 4시즈음 되서야 전화도 없이 불쑥 찾아온 택배직원에게 물건을 수령했는데 전화번호를 확인해보니 한자리가 틀렸다. 용케도 위치를 찾는다.

지금은 아주 말끔히 고쳐진 상태다. 아무런 문제도 없고 거슬리던 그립 러버도 제대로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어딘가 변해버렸다. 퍼팩트하게 작동이 잘 되고 있지만 무엇인가 변해버렸다. 도무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필름 한롤 날릴 각오하고 열번 이상 릴리즈 로테이션을 했다. 분명, 무엇인가 변해버렸다. 무엇인가.

퉁명스럽게 테이블 위에 툭. 하고 던지듯 놓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저녁에 잠시 나갈일이 생겼다.
어찌 되었건 무척 오랫만에 카메라와의 동행이다.
새 필름을 놈의 밥통에 넣어주고 길을 나섰다. 약속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전화 한통을 했다. 그 목소리는 무엇인가 변해버린듯 했다. 이런 종류의 예감은 항상 언제나 그렇듯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찌 되었건 주섬주섬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에 무엇인가 눈에 박혀 사진을 몇장 찍었다. 여전히 무엇인가 변해버렸다, 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외부도 내부도 모든게 말짱하고 퍼팩트하게 작동된다. 하지만 무엇인가 소실되어버렸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래도 사진을 찍는다.

파인더를 통한 바깥속에서 나 스스로를 본다. 프레이밍과 초점을 동시에 맞추면서 노출을 결정한다. 이 사진을 프린트할 인화지는 일포드 웜톤 화이버에 2.5호로 프린트가 될 것이고 인화 현상액은 일포드 멀티그레이드 디벨로퍼-IV 일것이다. 또한 현상시간은 1분45초 즈음에서 +,- 15초가 될것이다. 필름 현상액은 D-76 희석비 1:1에 온도는 24도, 아지테이션은 로터리 프로세스를 사용하고 현상은 표준데이터에서 대략 N-0.6이 될 것이다. 확대기는 베셀러 23cII에 확대기 렌즈는 슈나이더 콤포논-S 50mm f2.8렌즈에 조리개는 5.6, 사이즈는 11×14로 확대 할 것임을 이미 몸이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러는 동안 카메라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
어딘가 지금의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불완전하다. 예전같으면 어떻게도 정을 붙일수가 없겠지만, 그렇게 사진을 찍은뒤 자꾸만 카메라가 측은하게 보인다. 불쌍한 녀석… 그렇게 카메라를 연민어린 손길로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래. 팔고 다른걸 산다던가 하는 생각은 접자. 어쩌면 정말 나와 닮은 놈인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시간을 뛰어넘어 그렇게 되어버린건지도 모르니까. 좀더 따뜻하게 대해주자. 라고…

그리고 그날 늦은 밤, 긴 통화후 한 여자와 헤어졌다.
그녀의 무리한 부탁을 난 들어 줄 수 없다.

작업실 중앙에 있는 흰색 테이블 위에 뒷모습만 보이는 카메라 만이 나와 함께 있다.

항상, 언제나 그런 식이다. 마치 저주 같다.

예전 \’그 일\’ 후에 선물 받았던 발렌타인 17년산을 난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두명이서 속닥하게 마시기에 조금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라는 느낌 정도로 남아있었다. 그만큼 남아있었다, 라는 것도 난 좋았다.
함께 마시기 위에 아껴두고 아껴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그럴필요가 없으니,

맛있는 위스키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괜찮아 질 것이다. 괜찮아 질 것이다. 괜찮아 질 것이다.

2박 3일.

동원예비군 2박 3일을 다녀왔다. 하필 말년차에 동원지정인원으로 되어서 툴툴거리며 짜증을 냈지만, 한편으론 차라리 마지막 년차에 걸려서 다행이다 싶다. 보통 한번 지정된 후엔 잘 안바뀌기 때문인데 지금까지 안걸렸던 것을 상대적으로 고마워 하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체 군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더부룩한 수염다발과 긴 머리칼을 날리며 새벽 바람을 맞으며 사십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철을 타보니 사람이 그다지 없다. 내가 찻간에 들어서는 순간 일제히 (정말 일제히) 나를 봤다. 군복은 군복인데 머리길고 수염난 군인이니 일반적인 예비군이라고 하더라도 특이하게 보였는가 싶다. 아무런 동요없이 자리에 앉아 CDP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꾸벅 꾸벅 졸았다. 중간에 몇가지 성가신 일들이 있었지만 실력좋은 택시 아저씨 덕에 잘 도착 할 수 있었다.

훈련이 시작되었다.
중간 중간에 비는 시간을 타면서 들고간 책 두권중 하나를 읽었다.
사이즈는 내 손바닥만한 정도보다 약간 큰 크기의 문고본이라고 하기엔 비교적 큰 크기지만 다행스럽게도 군복바지의 건빵주머니엔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는 크기다. 이럴땐 군복도 쓸만할때가 있다.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시간이 빌때마다 짬짬히 읽어나갔다.  

오랫만에 읽는 위대한 게츠비는 예-전에 읽었을때와는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정말 이런 소설이었던가?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가? 이렇게 무미스러운 끈적거림과 전혀 디테일하게 보이지 않는 번뜩이는 디테일들, 읽다보면 천천히 숨이 가파오는 답답함. 결국 전체 스토리를 따져보면 아무것도 아닐, 비교적 소설치곤 내용이 전혀 파격적이지 못한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그 쓴맛이라는 건 마치 한쪽도 맞추지 못한 큐빅퍼즐을 입속에 쳐박아놓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모조리 싹 읽어치우고 기분도 전환하고 머리도 식힐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리포트 (원제 : Design, Writing, Research)을 읽어치워 나갔다. 지금은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고들 하는 후기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 입문용 디자인(을 위장한 철학서에 가까운) 책이다. 쭈욱 읽어치우면서 마음과 몸이 안정이 되는듯한 기분이다. 이 책은 크리스마스 선물 비슷하게 받은 책이었는데 쓱싹 계속 읽어치우다가, 순간 속이 울컥하여 책을 집어던졌다.

2박 3일동안 내가 기억나는 일은 그게 전부다.

지리하게 긴 휴가 – 혹은 동원훈련 을 마치고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참을 수 없이 듣고 싶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차분함, 무표정. 정말 지독스럽다.

이야기를 하자면 길고 그다지 하고싶지 않은 부분에 관해서 걸리는 느낌이 있는 이야기 이다.

어버이의 날. 생각하지 않은것은 아니다. 어제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꽃을 봤을때 1분 정도 서서 물끄러미 봤었다. 눈길을 돌리고 지하철을 탔다. 다음날 한통의 전화속에 꽃은 드렸냐 라는 이야기였던듯 싶다. 한참을 아무말 하지 못한체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알고는 있다. 분명 좋아할것이라는 것을.

아무말 하지 못한체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했다. 그뿐이면 나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그 이후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 그리고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부터 답답함이 가득 차오르는 촉촉한 눈동자를 본다는 것은, 그리고 \’어떠한\’ 감정이 섞여있는, 공기를 진동하는 목소리 속에서 분노의 감촉이 느껴지는 연민의 감정이 올라오는 그런 종류의 것은, 나 스스로도 그나마 겉으로 나마 부드럽게 포근하게 대처하기엔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다.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니?\’ 라고 그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역시 아무말 하지 못하고 잠시 – 느낌으론 아주 한참동안 있다가 결국 가기로 맘 먹었다.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흰색의 윈드브레이커 자켓을 입었다. 가는 길에 꽃집에 들려 꽃을 사고 지하철을 타고 계단을 내려갔다. 터벅.터벅.터벅. 손에는 카네이션 꽃 바구니(그것도 아주 이쁘게 만들어진)를 들고 말이다.

자리가 생겨 의자에 앉는데 순간 고민이 된다. 과연 이 꽃바구니를 바닥에 놓을것인가 말것인가. 그렇게 두 정거장쯤 고민하고 있던 중에 연한 구리빛의 피부를 지니고 있는 눈썹이 짙고 흰색의 얇은 자켓을 입고 있고 얼굴이 어두워보이는 남자가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카네이션 바구니가 있었다.

허리와 고개를 수그리고 양 팔꿈치는 무릎에 놓았다. 바구니를 손에 든체.
여러가지 상념에 젖어있는 듯 하다. 다섯 정거장이 지나갈때까지 난 그 남자를 봤다. 약간씩 움직이긴 하지만 그 남자를 붙들고 있는 표정은 여전히 한가지 였다. 약간은 무거워보이는 바구니를 바닥에 놓지 않고 계속 손에 들고있는 그 남자를 왠지 이해 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지하철 게이트를 빠져나와 걷고 걸어서 도착했다.

그 후, 처음 내가 신경쓰였고 걱정했던 일이 빠짐없이 그대로 벌어졌다. 이런 종류의 예감은 어지간해선 거의 들어맞기 나름인가 보다. 좀더 넓은 가슴을 가지고 그것을 부드럽게 품어안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까진 아니더라도 정말 있는 힘껏 노력했지만, 내 목소리가 조금씩 상기되어 가는 기운이 느껴진다. 이래선 안된다라고 수십 수백번이고 되뇌었지만 그것이 안되자 결국,

무표정과 함께 차분한 목소리로 되어버렸다…..

어쩌면…

난 진짜 악마 인지도….

그것도 아주 불쌍한…

윗 입술과 아랫입술이 미적지근 하게 붙어버렸다.

5월이 시작한지 벌써 닷새째가 되었다.

여전히, 언제나 그렇듯 침착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쉽게 녹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미미하게 끈적거리는 두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다지 고통스럽다던가 괴롭다하는건 아니고, 마치 괄태충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그런 끈적함 같은 감촉이 나의 왼쪽뇌에 느껴진다. 그래. 딱히 고통스럽진 않다. 견딜만 하다던가 하는 종류의 문제와는 다르다.

매화도 목련도 벚꽃도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것 빼곤 사라진게 별로 없는듯 싶다.
이젠 슬프다던가 아프다던가 고통스럽다던가 하는 감각도 조금씩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내 얼굴만이 괄태충 처럼 내 몸을 기어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 5월 5일 어린이 날이다.
이십년 전 5월 5일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할까…

여름이 되면…

무려 회전도 안되고, 타이머도 없다. 있는건 풍량 조절 외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선풍기 있으면 좋겠다.
어짜피 놓을 장소도 마땅치 않지만.

Aqua

지옥 같던 4월이 끝났다.

온세계가 자욱한 안개에 묻혀버린 몇일이었다.
어딘가 미지근하게 덥고. 미지근하게 싸늘하다. 작업실 창문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마치 고딕양식의 그것처럼 분위기가 바뀌어 있다. 이쑤시게 처럼 올라온 공중 크레인들이 진흙처럼 하늘하늘 녹아있다. 라디오헤드 라던가 포티쉐드 같은것이 스무개쯤 생겼다! 라고 해도 난 믿을 수 있다.

몇가지의 일들이 있었고, 몇가지의 상황들이 있었고, 몇가지의 두려움과 몇가지의 씁쓸함과 몇가지의 아픔이 있었다.

무겁고 밀도가 높은 아주 깊은 물속을 겨우 겨우 한걸음.한걸음.한걸음 걸어갔다. 멈춰있을순 없었다.

오늘도 여전히 안개가 끼어있다. 작업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고딕건물들 처마에 가고일 석상 몇개라도 놓아주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할때 너무나 희극적으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물끄러니 그 건물들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지옥같던 4월이 끝났다. 5월은 더 잔인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조금 더 소중히 해주고 싶다.

.

얼마전 길을 걸어가다 (항상 언제나 그렇듯 얼마전의 이야기다) 무엇인가 스쳐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종체 감을 잡을 수 없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몸을 간지럽히는 고통때문에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돌아보기 전에 예상했듯 \’ 아무것도 \’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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