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프린트를 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을 몇장 셀렉트 해서 암실에 들어갔다.
막상 프린트를 하려고 하니까 8×10 인화지는 남아 있는게 없었다. 덕분에 16×20의 일포드 화이버 베이스 프린트를 했다. 기왕하는거면 20×24를
해도 좋았을테지만, 그것 역시 없었다. 간만이니까 화이버 프린트도 나쁘진 않겠지.
비교적 오랫동안 사진 정리 목적을 위하여 필름스캔만 했었던 터이기 때문에, 오랫만의 암실작업은 좋았다.
모든것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암실 특유의 미묘한 공기냄새, 확대기의 질감, 어둠속에서 인화지로 뿌려지는 빛덩이들의 모습. 그리고 그 덩어리들이 인화지를 새겨내는 그런 공기감.
그리고 이젠 제법 아무렇지 않을때도 되었건만, 현상액에 인화지를 담그고 천천히 상이 뜰때의 그 묘한 마취감은 여전히 같은것이다.
물론 태어나서 처음으로 현상했을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감정이지만, 여전히 그 미묘한 마취감은 날 암실에서 나가질 못하게 한다.
이리저리 프린트를 8장 정도하고나서, 인화지 수세기에 물을 채워넣고
한장씩 한장씩 넣는다.
기분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수세기 속에 들어있는 인화지를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든다. 유치스러운 과장법이겠지만, 어떠한 영혼이 그 공간속에서 알을 꺠고 나오기 직전의 그 신선한 느낌, 그런 알싸한 공기냄새가 느껴진다.
수세가 끝나고 나면 스퀴지 플레이트에 인화지를 올려놓고, 유제면을 밑으로 하고 베이스면을 힘껏 스퀴지 한다. 물을 잔뜩 먹은 화이버에서 물이 쭉쭉 빠져나간다. 다시 뒤집어 유제면을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애인의 목덜미를 햛듯 그렇게 물기를 빼내고, 건조대에 인화지를 말린다.
지루하다면 정말 지루한 과정이고, 힘들다면 정말 힘든 과정이다.
때에 따라선 정말 하기 싫을때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암실의 낮은 붉은 불빛, 약품냄새가 떠돌아 다니는 공기냄새, 신뢰감 가득한 튼튼한 확대기와 그곳에서 뿜어져나오는 빛덩어리들이 인화지를 새겨낼때, 그리고 약품속에 천천히 상이 떠오르는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암실에서 작업할때 아무말 하지 않고 입을 다문체 이 모든것들을 오롯히 느껴낼 수 있을때.
이러한 것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난 암실에서 프린트 하는것이 싫을수가 없는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