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오직 단 한 장의 사진만을 가져가게 되었을 때
나는 무엇을 고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어도 나의 얼굴은
아니라는 것이다.
죽기 전,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오직 단 한 장의 사진만을 가져가게 되었을 때
나는 무엇을 고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어도 나의 얼굴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달 들어 가장 맛있는 커피가 만들어졌다. 원두도 싸구려에 에스프레소 머신도 소형의 것으로 사용량도 많고 나이가 들어 간단한 수리까지 했던 녀석인데다 일정한 맛을 유지한다는 것은 반쯤 포기하며 나름 즐겁게 마셨는데, 일정하지 않음에서 오는 이런 우연의 맛이 내가 마셔도 맛있는 한잔을 뜬금없이 선물해줄때가 있다.
세상살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지만 때론 이와 같이 자그만 선물이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싶다.
마태복음 10장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오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방학 동안 학교 강의가 없으므로 No work, No money의 상태가 풀리는 날인 개강일이 되었다.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목엔 나에게 있어 한가지 작은 위로가 있는데 단골 돼지국밥집에서 뜨끈한 돼지국밥 한 그릇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다. 맛으로 말할것 같으면 약간 엄격하게 기준으로 볼때 전혀 대단한 맛이 아니다. 게다가 소위 정통 (돼지국밥이라는 음식의 유래를 볼때 정통이라는 단어도 웃기지만) 돼지국밥에서 살짝 벗어난 형태로 돼지의 잡내를 잡기 위해 애초 국물 자체에 잡내제거용 된장을 아주 살짝 풀어 놓고 또한 그
위에 다진마늘을 약간 넉넉하게 넣은 꼼수를 부린, 원리주의자 입장에선 조잡하다고 할 만한 구성이다.
정면승부가 아닌 약간 비열한 능청스러움이 느껴지지만, 희안하게도 거슬리거나 기분이 섭섭해지는 느낌이 없는 그런 고만고만한 돼지국밥 집이다. 다대기는 넣지 않고 소금으로만 간을 맞춰서 먹는데 아주 약하게 된장이 풀어진 덕분인지 국물의 맛이 두껍고 감칠맛이 난다. 물론 익숙한 미원의 맛 또한 빠질 수 없다. 하지만 무엇 보다 토렴을 제대로 한, 다시 말해 돼지 국밥으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기본을 지킨 맛이 난다.
강의가 좀 지칠때가 있더라도 돌아가는 길에 돼지국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일때도 있으니, 이 돼지국밥집을 제법 좋아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런 곳이 올해 여름 1학기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역시나 돼지 국밥을 먹으러 갔을때, 8월 중순을 마지막으로 폐업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 대단한 맛이 아니였음에도 무척이나 큰 섭섭함을 느꼈는데, 이 집 특유의 비열한 방식으로 만들어낸 비 정통적인 돼지국밥 만이 가지는 고유의 맛과 동시에 최소한의 당연한 기본이 지켜져있는 것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예의 그 국밥집 자리는 어떻게 되었나 싶어 살펴보니 그 자리엔 다른 돼지 국밥집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이럴것 같으면 왜 폐업은 하고 지랄이람… 싶은 마음에 짜증이 확 솟구쳤지만 혹여나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고 사장은 그대로여서 예의 국밥 맛이 그대로라던가 익숙한 얼굴들의 매우 노련한 홀 이모들이라던가는 그대로 있는건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홀린듯이 국밥집 앞으로 걸어갔다.
일단 바뀐 이름이며 간판이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이름.
내부를 흘깃 살펴보니 구조와 완전히 바뀌었다. 이모들도 전부 처음 보는 분들. 사장 역시 처음 보는 사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확 사라졌지만, 어짜피 매주 봐야 할 것이니 이 참에 확실히 확인을 해두고 신경쓰이지 않도록 치워버리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뉴를 보니 구성도 많이 달라졌고 가격도 더 비싸졌다. 하지만 그것 보다 더 아쉬운건 돼지우동 메뉴가 사라졌다. 아니 이럴수가..
진정하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과 차려진 형태를 훑어봤다. 예감이 좋지 않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할터, 가장 기본인 돼지 국밥을 주문하고 국밥이 나오는 시간을 살펴봤다. 이전 보다 나오는 시간이 좀 걸리는 걸 보니 제대로 토렴까지 해서 나오는건가? 하는 마음에 느긋하게 기다렸지만 나온 것은 따로 국밥이다. 게다가 쓸때없이 커다래서 찢어 먹어야할 마치 칼국수에 어울릴법한 거대한 김치 세줄기의 모습은 아연실색하게 했다. 국의 향기를 느껴보고 국물에 담겨진 고기를 한점 먹어봤는데 의외로 고기 질은 이전에 비해 조금 더 신경 쓴 흔적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집의 돼지 국밥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당황하고 있었다. 그야 토렴까지 제대로 해서 나오는 돼지 국밥 집이 많이 줄어들었고, 때문에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지금과 같은 따로 국밥 형태의 것이 익숙하기도 할터인데 심정적 이유 때문인지 젓가락과 숫가락의 손놀림이 불편하다. 분명 다른 의미로 나쁘지 않은 돼지국밥이지만, 마음이 놓이는 맛이 아니다. 무엇보다 다 먹고 나서 오늘 하루가 잘 마무리 되었다는 심정적 포만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건 익숙함의 차이 때문이라고 치자. 하지만 돼지국밥에 있어서 정서적으로 따라와야 할 응당의 것 중 하나는 국물까지 싹 비운 다음, 허무하게 텅빈 검은색 뚝배기 그릇을 보면서 하루 종일 흐트러진 몸과 마음이 느릿느릿 자기 자리로 찾아가는 듯한 감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토록 거친 음식인 돼지 국밥의 미덕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오늘 먹은 돼지 국밥은 비워진 위를 수술용 메스로 가른 뒤에 국물과 돼지고기와 밥을 넣고 봉합사로 위를 꿰어놓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먹은 뒤에 마음을 추스릴 수 있는, 어딘가 비열한 맛이 나지만 최소한의 지켜야 할 것을 지킨 그저 그런 맛의 국밥집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에 분노까진 아니었지만 무척 섭섭한 기분을 가누기 힘들었다. 그래 이런 건 흔히 있는 일이다. 심지어 내가 사랑했던 그 바다도 통째로 사라지는 것이다.
흔한 일이다.
심각한 가정 불화, 폭력, 이혼 그리고 양육권 문제와 금전적인 이유로 부모 없는 시골에서 자랐던 나는 아주 어릴때 부터 여름을 무척 좋아했다.
맑고 한 점 얼룩 없는 하늘과 땅의 투명한 열기에 세계 전체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야트막한 뒷산을 외삼촌의 크고 굵은 손을 잡고 걸으며 봤던 풍경은, 이름 모를 수많은 억센 풀들과 커다란 나무 밑의 그늘과 끝이 보이지 않는것 같은 호수에서의 낚시와 태어나 처음으로 잡은 물고기가 있었다. 밖에서 한참 놀다가 집에 돌아오자 마자 옷을 집어 던지며 지붕 그늘에 시원하게 식혀진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툇마루에 팬티만 입은체 뒹굴거리며 몸을 식히다가 누워있던 몸의 모양따라 땀으로 그림이 그려진 툇마루를 보면서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보면 때론 수박화채라던가 설탕과 소금이 약간 그리고 얼음을 넣은 토마토 같은 것을 먹고나서 파란색의 고무호스가 물려 있는 수도 꼭지를 틀어서 몸 전체가 충분히 들어가는 큰 고무 다라이에 물을 채워서 놀다가 그것도 질리면 밖에 나가선 친구를 불러선 오늘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 까지 가보자며 저 멀리 보이던 산을 가리키고 걷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한참 만에 겨우 동네 입구에 다시 돌아왔을 즈음에 저녁 놀이 보여주면 하늘의 색이라던가, 간혹 비라도 많이 오면 뒤에서 들리는 잔소리를 뒷등으로 흘리고 밖으로 뛰어나가 부드럽고 따뜻한 비의 온기를 느끼면서 몇시간이고 참방거리면서 고인 물웅덩이 속에 나무가지를 찔러 넣으면서 뭔가 튀어나오길 기대한다던가 바위 사이로 물이 흐르는 것을 멍하게 보고 있다던가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 아래로 가서 나뭇잎에서 들리는 빗소리를 듣는다던가 마침 주머니에 동전이 있는게 기억나서 젖은 그대로 근처 코딱지만한 크기의 오락실 문을 열었을때의 항상 사람들이 있어야 할 그곳에 횡하니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느껴지는 젖은 공기와 눅눅하게 퍼지는 너구리 게임의 단색 음악이 나에게 줬던, 당시로서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 없던 기묘한 감정이라던가, 태풍이라도 온다치면 다들 긴장감이 가득한 몸동작으로 뭔가를 준비하고 대비하던 분주함이라던가, 태풍 올때 밖에 나가고 싶은데 못나가게 해서 엄청 울며 때를 쓰다가 외삼촌이 함께 나가줘서 겨우 밖에 나갔을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던 종류의 공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쁨이라던가.
언제 부터인가 여름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기분이 들면 내 마음엔 슬금슬금 안심감이 들어온다. 딱히 돈이 없어도 무엇을 꼭 해야하지 않더라도 땀이 몸을 끈적끈적하게 해도 밤의 열대아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단지 여름이기 때문에 좋았다. 눈을 뜨면 몸이 땀으로 끈적거렸지만 선풍기에서 들리는 바람과 소리가 좋았고 귀찮지만 않으면 물 한바가지 몸에 뿌리면 그걸로 충분했다.
온 세계의 풀이 비명 지르듯 악을 쓰며 자라는 자리의 색은 검은색 같은 녹색이 가득차있고 아랑곳 하지 않는 해바라기가 있으며 교미를 위해 비명을 지르는 매미, 차비 몇 천원으로 충분한 바닷가의 수영, 시원한 맥주, 나른하게 있어도 아무런 문제 없을것 같은 여름 밤의 푹신함, 기묘한 느낌을 주는 다대포, 강가의 시원한 바람, 태풍.
오늘 침대에서 눈을 뜨자 여름이 끝난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우울했다. 쓸쓸했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커피와 담배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닥에 누운 햇빛을 오랫동안 봤다.
사랑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시가 끝난 후 갤러리 오피스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 비추어진 통계 수치 중, 일일 평균 관람객 수 200여 명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매일 200여 명이 내 작업을 보고 나서 어떤 기분으로 갤러리 문을 나섰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갤러리에 있는 동안 많은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어설픈 일본어로도 무척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또한 갤러리 관련에 업무를 하고 있는 분과의 식사와 술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던 나의 작업 그리고 일본과 그 외의 나라에 대한 전개와 현실에 관한 것을 나눈 것 또한 의미가 있었다. 또한 당신의 작업이 마음에 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이름, 주소, 이메일 혹은 감상이 쓰여진 방명 카드가 내 생각 이상으로 많아서 놀랬다.
그리고 나의 작업을 갤러리에서 직접 보기 위해 일부러 시간과 적지 않은 여비까지 써서 한국에서 일본까지 와주신 분들에겐 격려 이상의 큰 힘을 받았다.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재차 전하고 싶다. 또한 직접 방문해 주신 분 중에 아주 오래전 부터 나의 작업을 봐주시고 힘을 얻었으며 영향을 받았다고 말씀해주셨던 분들의 말씀을 들으며 그간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었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해볼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또한 작품을 구입 해주신 분들에게 재차 감사의 마음 올린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수많은 생각 들이 있었으며 수많은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다음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또한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현실에 대한 인식의 결을 조금 더 넓힌 경험이기도 했다. 전시를 하게 되어 기뻤고 또한 마음이 가벼워졌으며, 전시가 끝난 지금에는 앞으로 내가 걸어야 할 현실적 상황 인식에 따른 행동 결정과 그에 따른 필요한 댓가의 무거움이 더 커지기도 했다.
내가 일본에서 개인전을 함으로 인해 주위의 수 많은 분에게 민폐 끼친 것과 그리고 그 민폐를,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의 마음, 나를 도와주고 있는 분들의 마음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인간으로서 지난한 삶이나 현실과는 별개로 나는 제법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실감을 느끼기도 했다.
전시가 결정된 수개월 전, 나의 가슴속에는 이미 끝난 전시였다. 하지만 실제 전시를 하여 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가슴의 그것과는 다르다. 많은 것들이 정리되어 가벼워졌으며, 이번 전시로 얻은 것들에 의해 더 무거워진 것도 있다. 다음 걸음 앞에 펼쳐진 현실은 나에게 현실적 행동을 종용한다. 나는 그것이 그리 틀린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작업을 한다는 것, 그것을 펼쳐나간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다만 그것을 구체화할 큰 그림은 그려졌지만 그것을 구체화 현실화하는 지평의 풍광은 칠흑같이 캄캄하다. 하지만 멈추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칠흑에 녹아버릴 것이다. 사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삶의 결말 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 어떤 누구에게도 공평한 것 중 하나는 끝이 온다는 것이다.
의식적이였던 무의식적이였던 한 패로서 당신이 어쩌면 나에게 종용 한 것인지도 모른다. 새삼스럽지만, 걸을 수 있을 때 까지 힘을 내어 더 걸어보려 한다. 그것이 이번 전시를 통해 얻은 것 중 가장 큰 것일지도 모른다. 그 뒤에 끝을 생각해도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 생각하려 한다.
전시장에 와주신 분과 작품을 구입 해주신 분과 저의 작업을 꾸준히 보아주신 분들에게 깊이 고개 숙여 감사한 마음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어떤 노래의 가사가 생각난다.
\’아지랑이에 몸을 빌려 길을 가리키는 처녀를 쫓아
높은 곳에 나타난 이름모를 광야는 그립게도 그립게도,
그것이 꿈속에서 보였던 거리라고 그림자가 속삭였다
다가올 날도 그리 다가올 날도 몇천의 분기를 넘을때
어두운 곳의 현인이 버려진 날들을 모아서
바닷가에 바닷가에 이름 모를 불꽃을 피웠다\’
전시를 위해 도쿄에 온 이후에도 계속 작업을 했다. 어쩌다 보니 삶을 충분히 돌아 볼만한 연령인 사람들의 촬영이 많았던것 같다. 마침 내일은 갤러리에 나가는 날이 아니였기에 그간 몇가지 생각을 정리하여 하라주쿠에 가기로 했다. 마침 3일 단위로 숙소를 옮겨 다니는 나름의 원칙으로 다음 숙소는 신주쿠에 있는 저렴한 숙소로 가야하기도 했고 신주쿠와 하라주쿠는 가깝기도 했으며 익숙까진 아니더라도 몇번 가본 적이 있었기도 했고, 제일 중요한 점은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바로 카메라 가방과 카메라, 담배를 챙겨서 하라주쿠로 향했다. 도착하는 순간 왠진 모르겠지만 느낌이 기묘하게 싸-한 느낌이 든다. 일단 역 바로 앞에 있는 흡연 스팟에서 한모금 하며 주변 분위기가 몸에 익도록 한다. 하라주쿠 역에서 전차가 도착할때마다 문자 그대로 많은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들이 쏟아져나왔다. 두가지 사람들이 있었다. 끊임없이 사람들은 어디론가 분주하게 이동중인 사람들. 멈춰있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고개를 숙여 핸드폰만 바라보는 부류. 아마도 여기서 촬영은 결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근처를 돌며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사진을 찍으려 할때마다 어찌된 일인지 대단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야 나의 행색이라고 한다면 하라주쿠에 어울리는 차림이 전혀 아니고 때꾹물이 줄줄 흐를것 같은 낡고 볼품 없는 갈색 캔버스 가방에 (원래 그런 컨셉으로 나온 카메라 가방이지만) 머리도 길고 수염까지 덕지 덕지 붙어 있으니, 경계심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평소의 감각과 다르게 유난히 경계심이 높은 느낌이다.
두 시간 정도 돌면서 촬영을 했지만 촬영은 노력과 시간을 들인것 보다 못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촬영하는데 있어서 거절 당하는 경험이야 당연한것이고 심지어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엄청난 인파가 움직이는 속에서는 촬영은 커녕 말을 거는 것 조차 힘들기 때문에 하라주쿠 메인 스트릿으로 내려가는 것은 작업 진행에 전혀 도움이 안될 것이다. 또한 목을 길게 늘인체 핸드폰을 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또한 쉽지 않았다. 다들 여기엔 명확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온 것이다. 나는 계속 말을 걸고, 거절의 다양한 형태를 경험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그리고 때론 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일본에 살고 있는 동생과 합류했다. 그 사이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고 답답한 마음에, 하라주쿠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 왜이리도 경계심의 수위가 높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 중엔 하라주쿠 일대에서, 길거리 AV 배우 캐스팅을 일컷는 ‘카라스’ 라는 것이 제법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카메라를 들고 말을 걸면 매우 높은 확률로 그쪽 사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경계심의 수위가 높을지도 모른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나의 행색도 문제였겠지만..
하라주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메이지 신궁으로 천천히 걸었다. 경내에 들어서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촬영했다. 그 중에서 그늘 자리에 앉아서 쉬고 있는 젊은 여자 두 명에게 말을 걸어 촬영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혹은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정도로 보였다. 순서대로 촬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촬영 하는 동안 한사람은 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막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귀를 막아주었다. 그 모습이 참 귀여웠다. 준비가 끝나고 먼저 첫번째 사람의 촬영을 시작했다. 지금은 여기서 촬영의 내용을 말 할 순 없지만, 상대가 나의 말을 들었을때
순간 나의 가슴이 새파랗게 시릴정도로, 따뜻하고 밝고 활기차며 꾸밈없고 그늘 없는 웃음속에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경황없이 이어갔다. 나는 그 웃음이 너무나도 아팠지만 나도 같이 웃으며 촬영을 계속 했다.
두번째 사람에게도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촬영을 했다.
역시나 같았다. 휴식시간도 없이 한번에 두번 연속으로 이런 데미지를 받고나니 순간 뭐라 어떻게 할 수 없는 기분이 꿈틀거렸다. 어쩌면 분노였을 수도, 연민이였을 수도, 슬픔이였을 수도, 희망이였을 수도, 절망이였을 수도, 어쩌면 본질에 가까운 어떤 것 이였을지도 모른다.
울고 싶었다.
촬영을 마치고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깊이 인사를 하고 길을 돌아 왔다. 동생과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를 나눴다. 그게 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