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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을 더 어둡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어둠 사이의 거리를 설계하는 일

전시가 끝난 후, 말 할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런류의 글인것 같습니다. 문득 예기치 못한 바람이 갑자기 불어 나름의 정리라면 정리, 소회라면 소회를 써봤습니다. 길고 지루한 이야기 일수도 있습니다.

  1. 한 전시의 미학적 목표에서 시작된 흑백 프린트 방법론

암실에서 이십여 년 동안 프린트한 뒤 디지털 프린트로 옮겨왔지만, 기술적 관점에서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암실에서는 확대기의 광원 특성, 노광 시간과 필터, 닷징과 버닝, 현상 조건과 인화지의 성질을 조절하고 때론 셀레늄 토닝 등을 하며 네거티브에 담긴 이미지를 물질로 옮겼다. 디지털 프린트에서는 파일의 톤과 색조, 잉크와 종이, 출력 장치와 관찰 환경을 다룬다.

도구와 공정은 달라졌지만 결국 묻는 것은 같다.

이 원고는 종이 위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모니터에서 보이는 원고를 종이에 그대로 전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니터는 스스로 빛을 내지만 프린트는 주변의 빛을 흡수한 뒤 남은 것을 반사한다. 파일에는 물성이 없지만 종이에는 표면과 두께, 광택과 흡수성, 빛의 산란이 있다. 같은 검정도 종이와 잉크, 조명과 관람 거리에 따라 전혀 다른 검정이 된다. 그리고 때론 이것은 전혀 다른 감정이 된다.

따라서 프린트는 전사 혹은 단순한 번역이라기보다, 원고가 다른 물리적 조건 안에서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관계를 설계하는 일에 가깝다.

디지털 프린트로 옮겨온 이후에도 물리적 표현의 한계와 그 경계를 탐색하고 넓혀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더 깊은 검정, 더 넓은 색역, 더 높은 해상도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원고가 요구하는 시각적 상태를 실제 종이 위에서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를 재현할 수 있는지를 계속 확인해 왔다.

이 글은 그 과정 중 하나에 관한 기록이다.

그중에서, 2026년 개인전 《캘리포니아에는 눈이 온다. 라스베가스에는 ,》를 준비하며 세운 미학적 목표와, 그것을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프린트로 구현을 위해 검토하고 만들어간 기술적 접근에 관한 기록이다.

  1. 흑백 프린트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컬러 프린트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색역의 한계와 색채순응, 잉크의 중첩, 종이 고유의 백색 캐릭터, 관찰광의 차이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도 개인적인 체감으로는 흑백 프린트가 컬러 프린트보다 세네 배 정도 더 어렵게 느껴진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측정한 난이도의 비율은 아니지만, 이십여 년 동안 암실과 디지털에서 흑백 프린트를 다뤄오며 느낀 허용오차의 차이에 가깝다.

컬러 프린트는 다루어야 할 변수가 많다.

반면 흑백 프린트는 결과를 구성하는 요소가 적어 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요소에 허용되는 오차의 범위가 좁다.

컬러 이미지에서는 대상과 대상 사이의 차이를 밝기뿐 아니라 색상과 채도가 함께 만든다. 밝기가 비슷한 두 영역도 색이 다르면 서로 구분될 수 있다. 따뜻한 피부와 차가운 배경, 붉은 표면과 푸른 표면은 비슷한 명도를 가지더라도 색채 대비를 통해 분리된다. 여기에 주변 색에 따라 동일한 색도 다르게 지각되는 동시대조(Simultaneous Contrast) 같은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컬러 이미지의 지각은 개별 색값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흑백으로 옮기는 순간 이러한 색채 단서는 대부분 사라진다.

색상과 채도가 담당하던 분리와 깊이, 온도와 거리감 등을 제한된 밝기와 검정, 표면과 질감의 관계 안에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 컬러에서는 서로 다른 색이, 같은 회색으로 합쳐질 수도 있고, 원래는 색상 차이로 구분되던 두 표면이 거의 동일한 밝기로 겹칠 수도 있다.

흑백 변환은 색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다. 색이 담당하던 관계를 새로운 톤의 배치로 재구성하는, 허용오차가 좁은 추상화 과정이다. 컬러 이미지에서는 명도뿐 아니라 색상과 채도, 그리고 주변 색과의 동시대조(Simultaneous Contrast) 같은 지각적 관계가 대상의 분리를 함께 돕는다. 그러나 흑백에서는 이러한 색채 정보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고, 대상의 분리와 깊이, 질감과 거리의 더 많은 부분을 명도 대비와 공간적 구조가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작은 밝기 관계의 변화가 이미지 전체의 구조에 미치는 영향도 상대적으로 커질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중성의 문제도 있다.

CIELAB에서 이론적인 중성 회색은 a*=0, b*=0으로 표현된다. a는 녹색과 적색 사이의 방향을, b는 청색과 황색 사이의 방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실제 흑백 프린트는 완전한 무색 물질이 아니다. 검정과 회색 잉크, 종이 고유의 백색 캐릭터, 형광증백제의 함량과 관찰광에 따른 영향, 표면 코팅과 조명의 분광 특성이 결합해 최종 색조를 만든다.

중성축의 작은 변화가 전체 톤에서 같은 방향으로 나타나면 프린트는 차갑거나 따뜻하게 느껴진다. 밝은 영역과 어두운 영역의 중성축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 톤에 따라 색조가 갈라지는 크로스오버처럼 보일 수 있다.

컬러 이미지에서는 이러한 미세한 색차가 주변의 여러 색에 섞일 수 있다. 하지만 중성을 전제로 바라보는 흑백 프린트에서는 작은 a, b 변화도 이미지 전체의 색조로 인식되기 쉽다.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토닝이나 명암대별로 의도된 스플릿 토닝이라면 그 변화 자체가 하나의 표현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톤 구간마다 a, b의 방향과 크기가 불규칙하게 흔들리면, 일반적으로 그것은 의도된 색조라기보다 시각적 노이즈로 인식되기 쉽다.

색이 사라진다고 미학적 구성요소가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적은 요소로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때문에 각각의 요소에 허용되는 오차의 범위가 좁은 변수 하나하나가 작품 전체를 떠받치게 된다.

  1.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시작된 질문

이번 전시의 프린트에서 필요했던 것은 극단적으로 강한 대비나 화려한 디테일이 아니었다.

이미지 속 검정은 충분히 깊고 무겁게 남아야 했다. 그러나 그 어둠이 하나의 막힌 면이 되어서는 안 됐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하나의 조용한 검정으로 느껴지더라도,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물면 그 안에 있던 표면과 거리, 희미한 구조가 천천히 나타나야 했다.

검정은 존재해야 했지만 이미지를 압도해서는 안 된다.
어두운 부분은 열려 있어야 했지만 가벼워져서는 안 된다.
미세한 질감은 남아 있어야 했지만, 그것이 작품보다 먼저 눈에 들어와서도 안 된다.

말로 표현하면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프린트에서는 이 조건들이 맹렬하게 충돌한다.

검정을 더 진하게 만들면 가장 어두운 부분의 미세한 차이가 뭉개질 수 있다. 반대로 섀도우를 잘 보이게 하려고 밝히면 이미지가 가지고 있던 무게와 침묵이 사라질 수 있다.

선명도를 높이면 작은 질감은 살아나지만, 경계가 과장되거나 프린트 전체가 인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

단순히 검정을 더 어둡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어둠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를 남길 것인가. 그리고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검정의 밀도와 이미지의 물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1. 검정이 깊다는 것과 어둠이 풍부하다는 것

흑백 프린트의 품질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수치는 Dmax다.

Dmax(프린트가 구현한 가장 높은 광학농도)는 종이가 빛을 얼마나 적게 되돌려 보내는지를 로그값으로 표현한다. 수치가 높을수록 더 적은 빛을 반사하고, 일반적으로 더 깊은 검정으로 보인다.

Dmax는 분명 중요한 지표다.

그러나 가장 짙은 검정 하나만으로는 그 검정에 도달하는 과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서로 가까운 어두운 톤이 실제로 구분되는지, 검은 직물이나 검은 바다, 축축한 땅의 구조가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없다.

검정이 깊다는 것과 어둠이 풍부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일상에서는 흔히 대비가 강한 것과 톤이 풍부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콘트라스트가 강하다”는 말로 구분 없이 쓰는 경우를 종종 마주한다. 그러나 Dmax가 높더라도 검정 바로 위의 여러 단계가 하나로 뭉친다면, 프린트에는 깊은 검정은 있을지 몰라도 어둠 사이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방법론에서는 흑백 프린트의 성질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폈다.

첫 번째는 톤 선형성이다. 톤 선형성은 원고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지정한 밝기 단계가 종이 위에서도 일정하고 순차적 변화로 나타나는지를 뜻한다.

두 번째는 국부 대비다. 서로 가까운 두 입력 톤이 실제 프린트에서 어느 정도의 밝기 차이를 만드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공간 아큐탄스다. 공간 아큐탄스(미세한 경계와 질감이 얼마나 분명하게 유지되는가)는 흙, 벽, 직물, 피부 표면 등의 작은 구조가 잉크의 번짐과 종이 내부의 빛 산란을 거친 뒤에도 얼마나 남는지를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는 종이 내부의 빛 산란이 인쇄된 톤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기 위해 Yule–Nielsen 모델도 함께 사용했다.

Yule–Nielsen 모델(율-넬슨 모델:종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빛의 산란 때문에 입력된 톤의 면적 관계와 실제 측정되는 반사율 또는 농도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현상을 경험적인 지수로 보정해 설명하는 인쇄 및 색채과학에서 사용하는 수학 모델 중 하나)은 프린트의 광학적 산란의 복합적인 영향을 비교하는 데 유용했다.

쉽게 말하면 잉크가 물리적으로 퍼진 정도만이 아니라, 종이 안으로 들어간 빛이 주변으로 산란한 뒤 다시 나오면서 인쇄된 톤이 시각적으로 달라지는 현상을 수치로 살펴보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번 실험에서는 율-넬슨 모델과의 오차가 가장 작은 결과가 실제 PCS L*의 톤 분리나 반복 시각평가에서 가장 좋은 결과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것은 중요한 증거였다.
종이 내부의 광학적 산란을 잘 설명하는 것과 작품에 필요한 어둠의 간격을 잘 재현하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즉 톤 선형성, 국부 대비와 공간 아큐탄스 역시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같은 문제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이 결과는 톤 선형성, 국부 대비와 공간 아큐탄스를 하나의 지표로 대신할 수 없다는 증거가 되었다.

따라서 율-넬슨 모델은 용지와 출력의 광학적 성질을 이해하기 위한 진단 지표로 사용하되, 최종 프린트의 우열을 결정하는 목적함수로 사용하지 않았다.

섀도우 전체를 밝히면 어두운 톤 사이의 수치적 차이는 커질 수 있다. 하지만 미묘한 경계나 검은 천의 직조감, 젖은 땅의 습기감이 반드시 더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출력 선명도를 높이면 경계는 강조될 수 있지만 톤의 연결이 더 자연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처리는 경계 주변에 밝거나 어두운 테두리를 만들고, 원래 없던 질감과 노이즈를 강조할 수도 있다.

무엇을 개선하려는 것인지 구분하지 않으면,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훼손했는지조차 알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각각의 문제를 서로 다른 평가축으로 분리하는 일이 중요했다.

  1. 사용할 수 있는 밝기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검정에서 종이의 흰색까지 사용할 수 있는 밝기 범위는 무한하지 않다.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사용 가능한 명도 범위 = 종이 백색의 L* − 가장 짙은 검정의 L*

L*(사람이 느끼는 밝기를 0에서 100 사이의 값으로 표현한 지표)의 전체 범위는 종이와 잉크 특성, 미디어 설정, 잉크 최대 토출량 설정(단순히 더 깊은 검정을 만들려고 잉크를 한정 없이 부어버리면 오히려 더 뿌옇게 된다), 헤드 렌더링 해상도, 스크리닝 알고리즘, 출력 조건에 의해 제한된다.

따라서 가장 어두운 구간에 더 많은 밝기 간격을 배분하면 다른 구간에서는 그만큼의 간격을 줄여야 한다. 가장 깊은 검정과 모든 구간의 완벽한 선형성, 최대의 섀도우 분리와 단단한 중간톤 대비를 하나의 톤 커브로 동시에 끝없이 높이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두운 부분을 무조건 많이 보여주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최대화할 것인지가 아니라, 작품 원고가 필요로 하는 성질을 먼저 정하고 제한된 밝기 범위를 어디에, 어떻게 배분할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번 전시의 경우 검정은 넓고 묵직하게 남아야 했다. 동시에 가장 어두운 부분에 존재하는 낮은 대비의 표면과 구조가 완전히 닫혀서는 안 된다.

관람자가 처음에는 하나의 어두운 덩어리로 받아들이고, 조금 더 오래 바라보았을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거리와 표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했다.

기술은 이 시각적 순서를 방해하지 않아야 했다.

  1. 결과를 만드는 측정과 결과를 확인하는 측정

이 과정에서 재차 중요하게 확인한 사실 중 하나는, 하나의 측정 조건이 모든 역할을 담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프린트의 톤 변환을 설계할 때에는 M3 측정을 사용했다.

M3(편광을 이용해 종이 표면에서 직접 반사되는 빛을 줄이는 측정 조건)는 정반사 성분과 표면 텍스처의 광택 차이에서 생기는 측정 변동을 줄여, 잉크층이 만드는 톤의 관계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필 수 있게 한다.

광택 계열에서는 같은 패치를 반복 측정하더라도 표면 반사의 미세한 차이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변동이 톤 모델에 그대로 들어가면 실제 잉크의 농도 차이보다 측정 당시의 표면 상태가 과도하게 반영될 수 있다.

반면 최종 출력물이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를 확인할 때에는 M0 측정을 사용했다.

M0(편광 없이 프린트의 일반적인 반사 특성을 측정하는 조건)는 기존 출력 평가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최종 프린트의 외관을 확인하는 기준으로 사용했다.

쉽게 말하면 프린트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데 유리한 데이터와, 완성된 프린트의 모습을 판단하는 데 적합한 데이터를 분리한 것이다.

ICC 색관리의 내부 구조로 표현하면 B2A(PCS의 값을 실제 출력 장치의 값으로 변환하는 출력 방향)와 A2B(출력 장치의 값을 PCS로 기술하는 측정·외관 방향)가 반드시 같은 측정 조건만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PCS(Profile Connection Space)는 서로 다른 장치 사이에서 색과 밝기를 전달하기 위해 ICC 색관리 시스템이 사용하는 공통 기준 공간이다.

출력 방향에서는 표면 변동이 억제된 안정적인 톤 관계를 사용하고, 외관과 소프트프루프에서는 사람이 실제로 보게 될 프린트의 종이 백색과 반사 특성을 사용한다.
이것은 특정한 측정 조건이 언제나 다른 조건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데이터가 어느 역할에 적합한지를 구분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두 역할을 하나의 데이터에 모두 맡기면 실제 출력의 톤은 좋아졌지만 소프트프루프가 맞지 않거나, 화면과 프린트의 외관은 비슷해졌지만 출력 변환의 반복성이 불안정해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번 방법은 출력 변환과 최종 외관의 기술을 분리함으로써 표면 특성 때문에 발생하던 측정 변동을 줄이면서도, 실제 관찰 상태에서의 검정과 톤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1. 수치가 말해준 것

대표적인 광택 계열 용지와 제조사 정품 잉크, 전용 흑백 출력 조건을 기준으로 최종 방법을 반복 검증했다.

가장 짙은 검정은 L*=1.543, Dmax는 2.767이었다.

Dmax 2.767을 광학농도의 정의로 단순 환산하면 입사광의 약 0.17%에 해당하는 반사율이다.

그러나 이번 검증의 목적은 가장 낮은 반사율 하나를 얻는 데 있지 않았다.

그 검정을 유지한 채, 검정 바로 위에 놓인 여러 어두운 단계가 실제로 서로 구분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원고에서 요구한 전체 톤과 실제 출력 사이의 L* MAE는 0.211이었다.

MAE(평균절대오차)는 각 단계에서 요구한 밝기와 실제로 측정된 밝기의 차이를 절댓값으로 바꾼 뒤 평균한 수치다. 양의 오차와 음의 오차가 서로 상쇄되지 않기 때문에, 출력이 목표 톤을 얼마나 정확하게 따라갔는지를 비교하는 데 유용하다.

가장 민감한 L=0~20의 깊은 섀도우 구간에서도 MAE는 0.366이었으며, 전체 검증에서 나타난 최대 절대 오차는 0.999 L 이내에 머물렀다.

PCS L=0~10으로 지정한 가장 어두운 검증 구간은 실제 프린트에서 9.163 L의 범위로 재현되었다.

이 결과는 가장 어두운 10 L의 요구 범위가 검정 부근에서 지나치게 압축되지 않고, 실제 출력에서도 대부분의 폭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그 구간에서 가장 분리하기 어려웠던 두 인접 단계의 차이도 0.953 L였다.

ΔL(두 톤 사이의 밝기 차이)가 모든 구간에서 정확히 같았다는 뜻은 아니다. 가장 불리한 지점에서도 인접한 두 어둠이 거의 1 L에 가까운 간격을 유지했다는 의미다.

검정에서 흰색으로 진행하는 동안 다음 단계가 이전 단계보다 어두워지는 단조성 위반은 0회였으며 또한 세 차례 반복 측정에서 가장 큰 표준편차는 0.064 L*였다.

표준편차는 반복 측정값이 평균 주변에서 얼마나 흩어졌는지를 나타낸다. 이 값이 작다는 것은 좋은 결과가 한 번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동일한 조건에서 반복해도 측정 결과가 매우 좁은 범위에 안정적으로 모였다는 뜻이다.

이전의 M0 RAW 기준과 비교하면 전체 L* MAE는 69.6%, L=0–20 섀도우 MAE는 75.9% 감소한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가장 약했던 깊은 섀도우의 인접 단계 분리는 95.9% 증가한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 과정에서도 Dmax와 검정 L는 손상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결과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오차가 작아졌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검정을 밝게 들어 올려 어두운 정보를 드러낸 것이 아니라, 가장 짙은 검정의 끝점을 유지한 상태에서 그 위에 놓인 여러 어둠의 간격을 더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배분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검정을 더 어둡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어둠 사이의 거리를 다시 설계한 것이다.

  1. 수치가 좋다고 바로 채택하지 않는다

측정값이 좋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방법을 최종 기준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수치가 설명하는 것은 프린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용지와 건조 조건에서 출력을 반복하고, 출력물의 위치와 순서를 바꾸어 비교했다. 어떤 방식으로 출력했는지 알 수 없도록 블라인드 테스트 환경에서 검정의 무게, 가장 깊은 섀도우의 분리, 저대비 표면의 입체감, 중간톤으로 이어지는 연결성, 경계의 과장과 표면 광택의 차이를 나누어 살폈다.

특히 검은 직물, 젖은 흙, 어두운 피부와 매끄러운 저대비 표면처럼 수치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사용했다.

섀도우가 더 많이 보이는지 하나만을 평가하지 않았다. 검정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는지, 어두운 구간을 연 대가로 중간톤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워지지는 않았는지, 질감이 살아난 대신 경계가 과장되지는 않았는지를 함께 확인했다.

새로운 방식이 더 좋아 보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출력 시점에서도 같은 경향의 차이가 반복되어야 했다. 개선되지 않은 항목과 악화된 항목이 있다면 그것 역시 함께 기록했다. 새로운 기술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존 기준을 교체하지 않는다.
판단의 기준은 새로움이 아니라, 더 나은 결과를 반복해서 만들 수 있는가이다.

  1. 선명도는 톤 커브만으로 만들 수 없다

이번 검토를 통해 현재의 톤 재현 방식은 내 기준에서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전체 톤과 깊은 섀도우의 오차가 충분히 작아진 만큼, 남아 있는 디테일의 문제를 계속 톤 커브 안에서만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재차 도달했다.

지금까지는 검정의 밀도, 섀도우 분리와 미세한 질감의 선명도가 하나의 문제처럼 얽혀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결과를 기준점으로 삼으면서 평균적인 톤의 재현과 실제 이미지 경계의 전달을 개념적으로, 그리고 절차적으로 서로 분리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용지와 출력 크기, 관람 거리에 따른 공간 전달 특성을 별도의 축으로 두고, 공간주파수별 출력 전용 샤프닝을 적용해 검증했다.

종이 위에 인쇄된 미세한 경계는 잉크의 확산, 코팅층의 구조, 종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빛의 산란에 영향을 받는다. 같은 파일을 출력하더라도 고광택, 바리타 계열, 코튼 렉 계열, 매트 코팅지와 흡수성이 높은 비코팅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계와 질감을 재현한다.

이를 살피는 대표적인 개념이 MTF다.

MTF(변조전달함수)는 원본의 미세한 명암 변화가 출력물에서도 얼마나 유지되는지를 공간적 크기별로 나타내는 지표다. 단순히 해상도가 몇 dpi인지를 말하는 수치가 아니라, 작은 무늬와 경계의 대비가 프린트 과정에서 얼마나 약해지는지를 살피는 방법이다.

중성 패치에서 두 단계가 잘 구분된다고 해서 실제 이미지 속 젖은 땅이나 어두운 직물의 결이 반드시 잘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패치는 평균적인 밝기의 차이를 측정하지만, 실제 디테일은 서로 맞닿은 경계와 공간주파수에서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간주파수는 이미지 안의 구조가 얼마나 크고 성긴지, 또는 얼마나 작고 촘촘한지를 나타낸다. 넓고 완만하게 변하는 톤과 촘촘한 머리카락의 결은 같은 밝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다르게 전달된다.

톤 커브를 열어 섀도우 전체를 밝히면 평균적인 패치 차이는 커질 수 있다. 그러나 미세한 경계 자체가 종이 위에서 흐려졌다면 질감은 살아나지 않는다.

반대로 샤프닝으로 경계만 강하게 만들면 헤일로와 노이즈가 생기거나, 검정의 고요한 덩어리가 잘게 부서질 수 있다.

앞서 평균적인 톤의 재현과 실제 이미지 경계의 전달을 개념적으로, 그리고 절차적으로 서로 분리할 수 있었기에, 프린트 전용 샤프닝 역시 원고와 용지에 따른 적응형 방식을 재검토 할 수 있게 되었다.

용지의 전달 특성과 최종 출력 크기, 관람 거리를 함께 고려했다. 가까이에서 보는 소형 프린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는 대형 프린트는 같은 선명도 처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접근의 목적은 검정을 가볍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공간주파수별 프린트 전용 샤프닝을 필요한 범위 안에서 되도록 최소한으로 적용하여 그 안의 경계와 질감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검정의 무게를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공간주파수 대역의 경계와 질감을 별도로 보완할 수 있었다.

묵직한 검정과 높은 섀도우 아큐탄스를 하나의 톤 커브 안에서 경쟁시키지 않고, 서로 다른 단계에서 따로 다룬 것이다. 단순화 해서 말하자면 검정의 농도와 톤의 연결은 출력 변환에서 설계하고, 미세한 경계와 질감은 용지와 크기, 관람 조건에 맞춘 별도의 공간적 처리로 보완했다.

  1. 하나의 기법을 반복 가능한 공정으로 바꾸는 일

《캘리포니아에는 눈이 온다. 라스베가스에는 ,》의 프린트는 기술적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술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기술이 필요했다.

검정은 존재해야 했지만 화면을 압도해서는 안 됐다. 어두운 표면의 정보는 남아 있어야 했지만 설명적으로 드러나서는 안 됐다.

프린트는 이미지에 없는 것을 새로 추가하는 대신, 이미지 안에 이미 존재하던 침묵과 거리, 낮은 대비의 차이가 종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 목표를 따라 측정 타겟을 만들고 출력 조건을 바꾸며 반복 측정과 시각평가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하나의 전시에 사용할 프린트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실험이 이어지면서 특정 이미지와 특정 출력에만 적용되는 요령을 넘어, 이후의 작업에서도 검증하고 반복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확장되었다.

어떤 물리적 출력 조건을 기준으로 고정할 것인가.

어떤 측정값을 출력 변환에 사용하고, 어떤 측정값으로 최종 외관을 평가할 것인가.

새로운 방식이 등장했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기존 방식을 유지하거나 교체할 것인가.

출력 당시의 장비와 용지, 잉크와 측정 데이터를 어떻게 기록해야 수년 뒤에도 같은 결과를 다시 만들 수 있는가.

좋은 결과를 한 번 만드는 것과, 같은 결과를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작품 프린트에서는 두 번째 문제까지 해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출력 조건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하나의 장치 상태로 관리한다.

용지와 잉크, 출력 해상도와 드라이버 설정, 건조 시간, 계측 조건, 온습도와 관찰 환경을 함께 기록한다. 측정값뿐 아니라 당시 사용한 원시 분광 데이터와 반복 출력의 편차, 시각평가의 조건도 보관한다.

현재의 방식은 완성된 정답이라기보다 이후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기준점으로 남긴다.

복잡한 방법이 반드시 더 좋은 방법은 아니다. 앞으로 새로운 프로파일, 이론, 출력 방식이 등장하더라도 단순히 더 최신이라는 이유로 교체하지 않는다. 기존보다 톤 오차가 작아야 하고, 검정의 농도와 섀도우 분리를 유지해야 하며, 실제 이미지의 경계와 질감이 개선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시점에 다시 제작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하고, 몇 년 뒤에도 동일한 과정과 판단 기준을 복원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에 실제로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를 반복할 수 있을 때만 새로운 방법이 된다.

  1. 기술이 작품보다 먼저 나오지 않도록

공방에서 작업 의뢰받았을 때 모든 이미지를 하나의 이상적인 흑백으로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은 검정이 넓고 무겁게 남아야 한다. 어떤 작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암부의 간격이 중요하다. 또 어떤 작품은 완전한 중성보다 아주 미세한 차가움이나 따뜻함이 이미지의 시간과 장소를 결정한다.
이것은 어조가 되고, 어조는 내용이 된다.

따라서 “섀도우 디테일을 살린다”는 말도 작품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숨어 있던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검정의 밀도는 그대로 둔 채 어둠 속 표면과 사물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단순히 프린트를 밝게 만들거나 대비를 낮추는 방식으로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프린트를 의뢰하는 작가가 L*, Dmax, MTF와 같은 기술적 개념을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다.

“검정이 떠 보인다.”

“어두운 부분이 답답하다.”

“디테일은 보이지만 사진이 가벼워졌다.”

“화면에서는 보였던 표면이 종이에서는 사라진다.”

이러한 말은 계측 용어가 아니지만 프린트의 문제를 정확하게 가리킬 수 있다.

작가가 감각의 언어로 말한 문제를 톤의 배분, 검정의 끝점, 중성축, 표면 반사, 공간 아큐탄스와 관찰 조건 같은 기술적 문제로 번역하고, 그 결과를 다시 작품의 언어로 되돌리는 것이 프린트 공방의 역할이다. 먼저 확인하려는 것은 사용하는 장비나 프로파일의 이름이 아니라, 완성된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보여야 하는가이다.

검정은 어떤 무게로 남아야 하는가.

어두운 부분은 어디까지 보여야 하는가.

중성이 작품에 필요한가, 아니면 미세한 색조가 이미지의 시간과 장소를 만드는 어조 역할을 하는가.

작품은 어느 크기로 출력되고, 어느 거리와 조명에서 관람되는가.

이러한 미학적 요구를 각각의 기술적 조건으로 나눈 뒤 출력과 측정, 시각평가를 반복한다.

기술은 작품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방향을 설명하고 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뒤따른다. 모든 프린트 의뢰에 논문이나 수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익숙한 출력 방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면, 현상을 추측으로 덮지 않고 측정과 비교가 가능한 지점까지 내려가 원인을 확인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의 복잡성이 아니라, 그 복잡성이 실제 작품에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내는가이다.

《캘리포니아에는 눈이 온다. 라스베가스에는 ,》 작업의 프린트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미지 속 어둠을 없애지 않으면서, 그 안에 시선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남기는 것.

흑의 무게를 유지하면서도 그 내부의 표면과 거리, 희미한 구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술적 목표였다.

이번에 정리한 방법론은 하나의 전시를 위해 시작된 기술적 해법을, 이후의 다른 작업에서도 검증하고 반복할 수 있는 공정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좋은 프린트는 파일 안의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종이에 옮긴 결과만은 아니다.

작품이 요구하는 시각적 맥락이 적절한 물성을 얻고, 그 맥락이 다음 프린트에서도 다시 성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작품을 기술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작품의 뒤를 따르도록 하는 것.
기술의 한계가 작품의 한계로 되지 않도록 궁리 하는 것.
기술이 작품의 표현을 확장하되, 작품보다 먼저 표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
기술의 목적은 작품이라는 당연함을, 현실에서도 당연한 결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프린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기준을 만든 후, 기준을 잊기 위한 준비

색과 농도를, 명확한 형태가 있는 것으로서 손에 쥐어 사용 할 수 있는 물감과 붓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2,033개의 컬러 칩세트를 만든다.

대략 16년 전에 컬러 칩 갯수를 800여 개부터 5200여개 까지 다양하게 시험해 본 적이 있다. 예상과 달리 갯수가 너무 많으면 일종의 노이즈 처럼 되어서 특정 구간에서 색이 튀고, 갯수가 작으면 인터폴레이션이 심해져 정확도가 떨어졌다. 그로부터 대략 8년 이후 장비 성능과 프로그램 알고리즘이 개선되면서, 앞에서 했던 것처럼 컬러칩 갯수를 800여개 부터 5200여개 까지 다시 다양하게 시도해 봤는데, 알고리즘이 개선된 덕에 예전보다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역시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결국 돌고 돌아, 시작 하기 좋은 출발점으로서 2033개가 합리적이었다. 여기에 필요에 따라 3~1000개 정도의 컬러 칩을 추가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측정을 위한 컬러칩 세트는 크게 다음 요소에 따라 결과 값이 다르게 나온다.
헤드 이동 속도 / 프린트 렌더링 해상도 / 쉐도우 로컬 콘트라스트 확장 / 스펙트럼에 UV 포함 관능평가용 / 스펙트럼에 UV와 편광을 제거한 관능 평가용에 따른 셋팅 조합은 대략 40가지 정도 되는데 작품 프린트 범위 안에 들어오는 기초 조합은 대략 16가지 정도다.

그 중 기본 특성을 고려하고 경험상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해서 2033개의 컬러칩 세트 6개를 만들었다. 이런 접근을 통하면, 하지 않은 나머지 10개의 조합도 데이터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하다. 설령 드물게 6개 세트의 결과가 전부 기준 이하가 되더라도 최종적으로 2~3개 셋트만 추가로 작업을 더 하면 보통은 기준 범위 안에 들어온다.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최적화용 패치 셋을 만들어 보충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만든 컬러칩 세트는 건조가 매우 중요하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건조 시키는 동안 색상과 농도가 계속 변화한다. 때문에 프린트 하자 마자 나온 것을 손에 들고 곧바로 색상, 농도 판단하는 행위가 적절치 않은 이유다.

암실에서 프린트 할때 트레이의 물 속에서 보는 것, 스퀴즈 하고 나서 바로 보는 것, 완전히 건조되고 나서 보이는 콘트라스트 특성은 확연히 다르다. 드라이 다운 현상 때문이다. 때문에 경험이 풍부한 이는 스퀴즈 하자 마자 바로 보는 톤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퀴즈 할 때는 약간 맞지 않더라도 최종적으로 드라이 다운 되었을때의 변형 정도를 미리 예상하여 작업한다. 경우에 따라선 셀레늄 토닝할때 D-Max 변화를 고려하여 작업 하기도 한다.

같은 이유로 프린트 전반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특히 색상과 농도의 기준을 잡기 위한 측정 작업엔 건조라는 요소는 정말 중요하다. 컬러칩 세트를 만들 때도 되도록 표준 온습도 범위인 습도 40~60%, 온도 15~25도 범위 안에 들도록 환경을 만들고 이를 추적 체크 하기 위해 데이터 로그 기능이 내장된 온습도계로 확인한다. 흑백 프린트의 경우 온습도의 차이에 따라 톤이 제법 달라지기도 한다. 종류 따라 다르지만 통상 3일 가량 건조 과정을 추적 계측 해보면, 색상 이동 평균값은 대체로 허용 범위 안으로 수렴한다. 그렇게 3일을 건조 시켰고 이제 측정이 가능해졌다.

분광광도계로 12,198개의 컬러 칩을 꾸역꾸역 계측 했더니 5시간이 사라졌다.
단순 반복 작업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편이지만, 컬러 칩을 읽고 있을 땐 약간 신경질적으로 멍해진다.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멍한데 신경질적이고, 신경질적인데 멍한 상태라는 것은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 속에서 마시는 것과 비슷 감각이지 싶다.

컬러 칩을 읽을 때 분광광도계의 위치를 제대로 잡으면서, 동시에 읽는 속도가 너무 빨라도 너무 느려도 안 되고, 중간에 튀어도 안 되니까 생각보다 꽤나 신경 쓰인다. 게다가 분광광도계와 컬러칩 사이의 거리가 조금 달라지기라도 하면 측정값이 살짝 튄다. 물론 이런 휴먼 에러에 대비한 몇 가지 절차적 안전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안전장치는 평소엔 꽤나 잘 작동한다.
하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절차적 안전장치는, 그 안전장치를 만든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안전장치를 만들고, 예외 처리를 꼼꼼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상상 이상의 일들이 벌어진다. 때론 이런 일들이 창조와 창의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안전장치를 만드는 사람으로선 그저 재앙일 뿐이다. 프로그램 만들어본 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렇게 측정한 2033개의 컬리칩을 3차원 색 공간 좌표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모델이 깨지거나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잉크 조합 커브에 튀는 영역은 없는지, 톤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선형적으로 증가하는지, 중성 채널에 잡색이 끼어있진 않은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순서상 제일 먼저 하게 되는 3차원 색 공간에 데이터를 올려서 나온 결과가 이거다.

이 짓거리를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럭저럭 20년은 해왔는데 이렇게 선명하고 깊은 구멍이 난 것을 만든 적은 처음이다. 처음 측정 시 허리가 아파서 중간에 살짝 튀었는데 그게 원인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원인이야 워낙 다양할 수 있다. 컴퓨터 접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생한 누설전류가 케이블을 타고 분광광도계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하필 전압이나 전류 변동이 발생해서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접지를 잘 해두었기에 이게 원인일것 같진 않았다. 혹시나 싶어 누설전류 계측기를 꺼내서 케이블을 직접 측정 해보니 문제 없다. 그 밖에 원인을 생각해보면 컬러 칩을 읽을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기에 찌그러진 곳의 하이라이트 옐로우, 하이라이트 마젠타 구역에서 측정 좌표가 어그러진 곳의 좌표를 보고 측정 데이터의 순서를 찾기 위해 데이터를 눈으로 훑어보는데, 에러 난 곳을 찾기 어렵다.

잠시 눈을 감고, 밖에 나가서 숨을 들이 마시고 담배를 한대 태우고 음료수 한 캔을 마신 다음 의자에 눈 감은 채로 잠시 앉아 있다가 해당 컬러칩 셋트를 처음부터 다시 측정했다. 값이 멀쩡하게 잘 나왔다.

이런 상황이 생기기도 하다 보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멍함과 신경질적인 것이 공존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분광광도계의 시그널 케이블이 혹여나 컬러칩 셋에 쓸려서 반사율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기에 이를 방지하며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혀서 하다 보니 허리가 아프다. 멍한데 신경질적이고, 신경질적인데 멍한 이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이것을 총 6회 반복한다.

이렇게 다시 측정한 2033개의 컬러칩을 3차원 색 공간 좌표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모델이 깨지거나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프리머리/세컨드리 컬러 좌표 경로가 지나치게 휘는 곳은 없는지, 잉크 조합 커브에 튀는 영역은 없는지, 톤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선형적으로 증가하는지, 중성 컬러 채널에 잡색이 끼어있진 않은지를 면밀히 살펴본다.

데이터 확인이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각기 적용한 6개의 테스트 프린트 만들고 다시 3일을 건조한다. 현장에서 테스트 프린트를 뽑아서 보더라도, 앞서 말한 드라이 다운 현상 때문에 컬러와 농도를 제대로 판독 할 수 없다. 때문에 3일 건조가 끝나면 표준 뷰잉 부스에서 관능평가를 한다.

너무 극단적으로 표현되진 않았는지 혹은 너무 중성적으로 표현되진 않았는지 다시 말해 용지가 품고 있는 어조와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지,
형광 증백제가 들어 있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용지의 경우 조명에서 나오는 UV 광에 반응 정도에 따라 보이는 어색함이 허용 범위 안에 있는지,
만약 형광 증백제 영향으로 어색함이 허용 범위를 초과할 경우 이를 다소 중화할 방법과 도구로 어떤 식의 접근을 할 것인지,
형광 증백제 무첨가의 고급 용지 경우 페이퍼 화이트와 하이라이트 영역 색상 및 밝기 전환 그라데이션과 선형도가 매끄럽게 잘 연결 되는지,
쉐도우 분리력은 용지 특성을 고려하여 스펙 범위만큼 나오는지,
데이터와 실제 프린트 사이의 괴리는 없는지,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방법과 도구로 더 나은 것을 만들 것인지를 고려한다.

이렇게 6개를 평가하여 용도에 따라 2~3가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나면, 오롯히 자신의 작업에 더욱 순도 높은 매진을 할 수 있게 된다.

때론 아주 엷고 투명한듯 하이라이트의 미묘한 어조는 그냥 볼때는 아주 사소해보이지만, 이 하이라이트의 예민한 어조 차이가 작업 전체를 결정 할때가 있다. 깊고 무거운 쉐도우의 중량감, 맑고 폭신거리는 쉐도우의 찰랑거림이 작업 전체의 어조를 결정 할때가 있다. 종종 어조라는 것은 내용에 한없이 가깝다.

위와 같은 기초 작업을 통하고 나면, 최종 프린트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할 필요 없이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공방에 모니터를 통해 시뮬레이션 결과값을 확인 할 수 있다. 일부 특수 매체를 제외하면 대부분 눈에 본대로 나온다. 건조가 덜된 테스트 프린트를 들고 잘못 판단하여 최종 완성작품의 어조가 다르게 나올 일도, 추가 비용도 들지 않으며 더 정확한 예견이 된다.

이것을 각 용지 종류별로, 기준안에 들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지금까지 컬러 작업만 이야기했다. 흑백 작업 이야기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흑백은 이와는 또 다른 식으로 별도 진행 해야 한다.
컬러 보다는 흑백이 난이도가 더 높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색과 농도를, 명확한 형태가 있는 것으로서 손에 쥐어 사용 할 수 있는 물감과 붓 그리고 캔버스를 만들었다.

이렇게 기준을 만든 후, 기준을 잊기 위한 준비를 하나씩 녹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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