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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구름

차이밍량 감독 – 흔들리는 구름 中

호흡

프린트가 끝나고 화이버 베이스 건조대에 잘 말려놓은 사진들을 정리해서 톤을 다시 확인한 후에 남은것은 찢어버렸다.

아카이브 처리를 위한 약품을 조제하며 떠오를 톤들이 제대로 스며들 사진들의 준비가 끝나고  프린트를 미온수에 넣고 유제를 충분히 부풀려,
빨아들일 준비가 된 사진들을 보았다.

프린트의 마지막 공정인 아카이브 처리를 할때마다 항상 심장 언저리가 따끔한 느낌이 든다. 매우 날카롭고 조그만 유리조각이 혈관을 따라 흐르다가 심장 속으로 들어와선 사방을 긁어놓은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계속 될것 같은 베어짐을 만들곤 한다.

호흡을 잠시 멈추어 빨아들일 준비가 된 그것을 보고, 최초로 약품에 담그는 순간 날카롭던 베어짐이 인화지 속에 스며드는것만 같다. 프린트는 드디어 빛을 발하고 어둠을 삼키고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그 무엇이 된다. 마지막 프린트를 처리하고 인화지 수세기 속에서 조금 더 눈을 감게 하고 나면 하나의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그리곤 유리조각에 베어진 듯한 따끔거림이 사라진다. 겨우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듯한 느낌이 돌아온다.

칠흙같은 어둠속에 한줄기 빛이 있길,
흘러넘치는 빛 속에 한줄기 포근한 어둠이 있길..

아기

인간은 외롭다.
이것은 양수가 채 씻겨나지도 않은, 벌겋게 달아오른 아기들도 안다.

자신을 채울 무엇인가를 욕구하고 욕망하고 때론 만족에 겨워 다시 돌아가기도 하며 때론 채워지지 못함에 가슴 아파하기도 한다. 단순한 이야기고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요 그게 우리네 삶의 이야기 중 대부분의 소제가 아닐까 한다. 그것이 에베레스트 6000미터 지점에서 되었던 길을 지나며 사람의 웅성거림이 들리지 않을때가 되었건 누군가 술을 같이 마시고 있을때던 제법 아가씨들의 몸매와 다리와 가슴이 빼어난 바에서가 되었던 이성에게 진심으로 다 바칠 만큼 사랑을 했다고 느꼈음에도 혹은 그러한 시작을 만들려 했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응답이 되었던 혹은 무엇인가를 만들던.

나를 제외한 외계의 것이 자신의 존재 증명이라는 시시껍절한 이야기 같은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외계로 부터 만들어진 것이기에 구분 자체가 모호해질 뿐이다. 단지 나 라고 하는 기억이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근거일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마져 자기 좋을대로 만들어 버리니 남아 있는 것은 자기 좋을대로 라는 것 정도가 남는데, 이것 또한 기실 정체성이라고 불리는 허울속에 적당히 밀봉되고 만다. 삶의 관성이란 이토록 관통하고 만다.

자신이 외롭다고 느낄때를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단순히 할짓이 없고 배부른 자의 팔자 좋은 노란 한숨 이라고만 치부하진 말자. 그것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는 명확하지만 흐릿한 그 무엇이다. 자신이 살아있음에 아픔을 혹은 증오를 느끼는것에도 감사하자. 그것은 자신의 생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그리고 외로울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타인의 아픔을 고통을 우린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타인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똑같이 느낀다면 위로와 다정함 따위 가능치 못하지 않겠는가. 당신과 나와의 삶의 궤적이 다름에 감사하자.

아직, 살아 있음에 찬사를..

차가운 바나나를 입에 넣고 씹은체, 냉기 잔뜩 머금은 커피를 둘이마시는 기분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을 기분이다.

몸이 축축해지지가 않는다. 눈가도 건조하다.

기분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체 지구는 빠르게 자전 하고 달은 반쪽만 보여준다.

인간은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지.

 

노인은 그림자를 보자, 곧 그게 상어라는 걸 알았다.
놈이야말로 이 바다에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존재.
이제 노인의 머리 속은 맑았다.
전신에 결의가 넘쳐흘렀다.

하지만, 희망은 거의 없었다.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상어가 다가오는것을 바라보며 잡은 큰 고기를 슬쩍 바라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꿈이였으면 좋았을 것을.
저녀석을 포기 할 수는 없어. 아무렴.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라며, 그는 소리를 높였다.

사실 인간은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질 수는 없는거다.
이제 쓸데없는 생각 말자. 늙은이.
노인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배를 곧장 가게만 하면 되는거다.
놈들이 오면 올때 생각하면 돼.

– 노인과 바다 中

귀머거리.

숨을 쉬니 귓구멍으로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고막이 파열되어 그 구멍으로 숨이 나오는 느낌은 외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히 알려주었다.

거리를 걸으며 들리는 것들은 예전과 다른 것들이였다.
익숙한 시간에 걷던 익숙한 거리는 처음 보는것 처럼 이상했다.
전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들리는 것을 잠자코 들으며 지금껏 내가 전혀 듣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책망하듯 그 소리들은 나의 목구멍 깊숙히 들어와선 사라졌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곤 하지만 어쩐지 무섭다던가 두렵다던가 하는 느낌은 없었다. 설령 완치되지 못한다 한들 평소보다 더 많은 종류의 소리가 들리었기에. 그리고 처음 듣던 소리들이 들렸기에 그 호기심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이런 많은 소리가 들리는 걸까.
양쪽 귀가 멀쩡했을땐 왜 전혀 들을 수 없었던 걸까.
처음 생각으론 고막이 파열되며 생긴 통로에 의해 소리가 진동된다던가 공명되는 것에 의한 착각이라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착각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간사할 진데,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내 몸에 맞는 것을 들었을 뿐은 아니였던가.

몇일이 지나고 치료 받을 결심을 했다.
병원에 가서 인공고막을 부착했다. 치료를 받고 얇고 긴 바늘같은 것들이 몇번이고 귓구멍을 찌르는 것을 몇일이고 계속 반복 했다. 이주 정도 지났을때 귓구멍으로 나오던 미적지근한 숨결이 멎고 점차 소리들은 사라져 갔다. 삼주째 되던달 인공고막을 때어내고 살을 에어내는듯한 수압으로 약물을 분사하여 귓구멍을 훑어내고 다시금 소리가 울렁거리게 되었다.

부착했던 인공고막을 버리지 말고 꼭 나에게 달라는 이야기를 치료받던 첫날 부터 몇번이고 이야기를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말을 잊지 않았는지, 때어낸 고막조각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단지 동그랗고 희고 얇은 조각이였다.

그로부터 삼일이 지난 후 그 소리들은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의사는 완치되었다고 말해주었지만, 난 어느 쪽이 완치라고 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의사 선생님에게 깊숙히 머리와 허리를 숙이고 감사의 예를 표했다.

수개월이 지난 지금.
가끔씩 귓구멍의 안쪽 그득한 부분이 아려올때가 있다. 의사의 말로는 완치되었다고 했고 시간이 제법 흘렀기에 완치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겠지만 희안스럽게도 혼자 오랫동안 있을때 아려오곤 한다.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엷은 그림자 처럼 외로워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떼어낸 인공고막의 조각은 그 이후로 부터 계속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언젠가 이것을 스스로 버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의도.

그런 의도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좋은 감정 혹은 마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 우리네 삶의 있어서 이런 경우와 마주쳤을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기껏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둘러 따라 내려가 이름을 부르며 찾았으나, 황망할 정도로 붉은색의 아스팔트와 텅빈 거리만을 만났을 뿐이였다.

분명, 그것이 본래 의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때론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데, 오늘 든 생각은 나의 커뮤니케이션이 너무나도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며 자만스러움에 가득 가 있진 않았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만 것이다.

의도가 어쨌던 상대방에게 그렇게 들려진다면 그것은 아픈 일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속상한 것은 상대방이 끝까지 들어 주었거나 혹은 자신이 느꼈던 점을 나에게 말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겐 속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다양함이라고 나 스스로에게 말하여 넘길 부분 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중간에 나가버렸다는 것은 이미 나는 무엇인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코 그런 의도가 아니였음에 마음이 아프고, 그런 속에 성숙하지 못한 나의 안스러움이 속상하다.

사기 범인이 잡히다.

수개월 전, 지인이 필름 스캐너를 구하고 싶다고 했으나 원하는 모델이 중고시장에 잘 나오지 않았다. 제법 시간이 흘러 적당한 가격으로 매물이 나온것을 발견했고, 이 모델은 비교적 거래가 활발한 물건이였기에 마음이 급했다. 지인과 통화를 하고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입금을 했었다. 그리고 사기를 당했다.

근처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조서를 꾸몄던 약 두달 후에 잡힌것은 대포통장을 만들어 줬던 사람이였다. 경찰의 말로는 이래선 본 범인을 잡기 거의 힘들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마음을 고쳤다. 이것 때문에 신경 쓰인걸 생각하면 그게 답이였다.

그로부터 다시 두달 후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본 범인을 잡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바로 하는 말이 피해 회복은 힘들것 같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범인은 합의고 뭐고 없이 그냥 몸으로 때우겠다고 했고 이에 대한 피해 보상을 하려면, 어딘가로 가서 뭔가를 신청하고 무슨 변상 신청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범인이 이래선 거의 가망성이 없다는 뜻의 이야기를 들었다.

순간 황망 스러워서 이런 말을 했다.

\” 그 사람 뭐하는 사람 입니까? \”

그러자 경관은 웃기지도 않는 다는 듯 \” 사기꾼이죠 \” 라며 오히려 황당한 듯한 숨소릴 전화넘어 들려주었다.

\” 아니, 그런게 아니라 직업이라던가 했던 일이라던가. \”
\” 직업 같은건 없어보입니다. 그냥 이리저리 전전긍긍하다가 사기도 치고 그런게죠 \”

거기서 난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생각이 나지 않고 조용한 전화기만 계속 붙들고 있을수도 없어서, 결국 수화기를 놓았다.

잘 듣는 다는 것.

대체적으로 자신의 주장만을 하는, 즉 잘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어렸적 성장기에 애정을 거의 받지 못했거나 혹은 너무 받았거나. 아니면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강한 트라우마가 있거나.

이들 중에 절반 정도는 목소리가 크다.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이해하라고 강요하거나 혹은 이해 받길 원하지만, 정작 자신은 상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더 실로 이해하기 위해 몇가지 질문을 하면 오히려 화를 내곤한다. 이것은 아무리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한다고 한들 그들에겐 진심의 무게 따위 전혀 중요하지 않은듯 보인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조급하게 만드는 것일까.
왜 그런지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단정내리고 싶지 않다. 인간의 다양함은 실로 광범위 하지만 그 근본에 있는 것은 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고 난 느끼고 생각한다. 그런식으로 어설프게나마 따져간다면 결국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곤 한다.

단지 성장기때 받은 애정의 함량과 트라우마와 환경에 의해서 이러한 것들이 결정되어 버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슬픈 일이다. 그리고 삶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것에 강요를 받고 결국 굴종하게 되어버리는 것이 보통 우리네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정상일 것이다.

정상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그것이 옮다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것, 혹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게 하는것 그리고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과 권력에 의해 결정 되어진다. 또한 누구라도 그것에서 부터 자유로울순 없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사람들과 정상인 사람들이 부딪기며 살아가다 보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정상인은 배척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조선땅에선 더더욱 그러한 듯 싶다.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자신과 다름을 견디지 못하고 참질 못하고 듣질 못하고 자신과의 다름을 불쾌해 한다. 그리고 자신의 나와바리에 들어오고 동의하면 불쾌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수 많은 나와바리가 존재하고 그것들은 언제나 그렇듯 또 충돌하고 피를 부르기 나름이다. 굳이 종교 이야기를 꺼낼것 까지도 없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기실 세삼스러울 것도 없을 정도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쓰고 싶은 비유가 있다.

눈도 귀도 콧구멍도 둘이다
입은 하나다.

어쩌면 성장기때 그리고 하루 하루 삶을 살아가면서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입과 뇌가 퇴화되어버린건 아닐까 라는 생각 마져도 든다. 그런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들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덴 전혀 라고 해도 좋을만큼 지장따위 없으니 말이다.

오늘 나의 인내심을 시험받았다.

결과는 그리 좋지 못한듯 싶다.

아래서 본것과 옆에서 본것.

불꽃놀이가 준비되고 발사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명의 익사체가 발견되었다.

주최측에선 매우 당황해선 사람이 죽었는데 시신이 완전히 운구되기도 전에 불꽃놀이를 한다는 것은 고인에게 할 일이 아니라는 방송을 하며 운구가 끝날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삼십분 쯤이 지났을까, 운구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리는지 앞으로 한시간은 더 걸릴듯 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죽은 고인은 고인의 명복을 빌고, 행사는 행사대로 시작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바로 시작하기는 좀 그랬는지 약간 뜸을 들이고 있다가, 이윽고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그렇게 아주 가까이서, 그것도 거의 바로 밑에서 그렇게 큰 불꽃을 보는 것은 처음이였다. 처음엔 너무나도 신기하고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멀리서 봤던것과는 전혀 달랐다.

어느덧 싸늘하게 누워있던 시신에 관한것은 잊게 되었다. 어느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눈물이 날것 같았다.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까. 당체 왜 이렇게 하릴없이 허망한 것일까. 이렇게 허망한데도 왜 이리도 아름다운 것일까.

8분 27초 동안 불꽃놀이는 계속 되었고 공중에서 흩날린 불꽃의 시신들은 검은 가루가 되어 온 사방을 뒤덮었다.

장내가 정리되고 주위에서 흘러온 소리를 들으니 시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살했다고 하는군\’

불꽃이 하늘을 지배했지만, 8분 27초 보다 훨씬 더 긴 시간만큼 불꽃의 검은 시체들이 온 사방을 뒤덮었다. 난 여전히 일을 계속 했고 뒷 정리를 하고 사람들은 전부 사라졌고 구급차는 소리 내지 않고 어둠속에 붉은 빛을 토하다가 사라지고 어둠은 이전보다 더 진해졌다.

돌아오는 버스간에선 그럴리 없는 녹색의 형광등이 지직 거리는 소리와 불꽃놀이를 했을때 뿜어 불어진 늙은회색의 연기가 들리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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