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df_Mutter

매트.

믿고 있는 사람에게 좋은 말을 듣는 다는 것은 많은 힘이 된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안개가 다소 걷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원천적인 문제해결 – 애초부터 이런게 가능할까만 – 은 아닐진
모르겠지만, 스스로 납득하고 이해하는 과정은 지난듯 하다.

완성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기에
이제부터 비로서 시작이다.
항상 그랬듯.

몸살.

실은 몇일 전 부터 목구멍 안의 편도가 조금씩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 했다.
이 정도의 것은 평소에도 가끔씩 있는지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일 동안 여러가지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그리 녹녹한 일들은 아니었다.
냉정하게 생각내보면 그리 대단찮은 일이지만, 쌓이다 보니
꼭 그런것만 같지는 않다.

어젯 밤에 마저 남은 작업을 하다가 코에서 뜨뜻한 액체가 나왔다.
콧물인가 싶어 훑어보니 붉고 끈적한 코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가래를 쏟아냈다.연신 쉴새 없이 콜록 거리며 기침을 밷어내고 있다. 어제 돌아 오는 길에 약국에 들려 약을 한봉 구입했다.
약사 말로는 보통 그러한 상태는 몸의 컨디션을 알려주는 신호등과
같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래도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제법 그리 심하게 나쁘진 않았다. 조금 힘들긴 하지만 견뎌낼만 했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한 일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가끔은 이런것도 좋겠지만, 정말이지 뭔가 아무것도 없는체
하루가 사라지는 느낌은 너무나도 허허롭게 느껴진다.

건강한게 최고다.

방금전에 꿀차 한잔을 마셨다. 조금은 괜찮아 지겠지.

안경.

앞으로 어떤 문장이 쓰여질지 전혀 짐작가지 않는다.
아뭏든 뭔가가 끄적거리고 싶어서 일기장을 열었지만,
무엇을 써야하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나는 안경을 벗고 잘 보이지 않는 모니터를 눈을 찡그려 가며
보고 있다. 안경을 쓰면 당장에라도 이 불편한 상태가 해소 될 것임은
분명이 알고 있지만, 그냥 있기로 한다.

입에는 88 골드가 물려있다. 앰프는 꺼저있고 컴퓨터의 냉각팬 소리만
위잉 거리며 돌아가고 있다.

언어, 혹은 말 이라는것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이과 관련된 주제의 일기는 짧막하게나마 몇차레 주절거린적이 있다.
언어는 사고시스템과 직결된다고 한다. 그 사람 혹은 종족이 가지고 있는 어휘가 작다면, 느낄 수 있는 세계도 작다는 것이다.
언어는 세계를 재단하고 카테고리화 하고 기준을 만든다.
때문에 위의 말은 틀린게 아니게 된다.
예를 들어 이누이트족의 경우 눈(雪)과 관련된 단어만 33가지나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기껏해야 약 4~5가지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 이라고 해서,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아닐것이다.

이 부분에서 비교적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게 된다.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 추상적인 표현에 있어서 언어의 한계(난 이것을 한계라고 불러도 좋다고 생각한다.)가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이것 또한 1차적인 의미에서의 경우고, 이러한 한계 자체를
하나의 표현방식으로써 응용하게 된다면, 또 다른 무엇인가가 표현가능하게 된다고 난 생각한다.

어떤 사람 2명이 있고, 대화를 한다.
명사만을 사용한 대화가 아니라면,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인가 뜻 혹은 감정을 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게 부르는 단어만 전달이 되었을 뿐 그것에 연결되어진 관념은 개인마다 다르게 이어지게 된다.

‘무엇’이 눈 앞에 있고(혹은 느껴지고), 그것을 말 해야 한다면 기호만 같고 뜻은 서로 다른 오해가 생겨지는 경우 또한 많은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경우와는 별도로

같은 맥락에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은 둘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우.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은 둘이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우.

둘 중에서 꼭 하나만 선택하라면 난 후자 쪽이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걸 끄적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아니 어쩌면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잘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인가 답답한 느낌에 쓴것 임에는 분명하다.

갑자기 이런 문장이 생각난다.
커뮤니케이션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경우엔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글쎄, 따지고 보면 일리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데 말이다.

여전히 난 안경을 벗고 있고, 그 덕에 모니터의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난 아까와 마찬가지로 눈쌀을 있는데로 다 찌푸리며 모니터를 보고 있다. 그야 안경을 쓰면 잘 보일것 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 곧 자야 할 시간이다.

프린트 III

프린트가 끝났다.

수세기에 물을 채워넣고 인화지를 넣었다.

잠시 후에 인화지의 물기를 짜내고 건조대에 널어 놓으면 끝이다.

하지만, 뭔가 텁텁한 기분.

프린트 II

거의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프린트.

학교를 마치고 사진재료상에 들려, 인화지를 샀다.

ILLFORD의 Wormtone 인화지는 좋아하는 인화지 중 하나다.

아무래도 웜톤인화지기 때문에 최대 하이라이트 농도가 조금 떨어지는경향이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포드의 인화지 이기 때문에 하이라이트의 재현력은 그래도 좋은 편이다.

포트레이트 혹은 Jazzy한 사진에 잘 어울리는 톤을 가지고 있지만,
처리를 다 한후에 셀레늄 토닝을 하고나면 뭐라 말하기 힘든 ‘미묘한’
톤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냥 따뜻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중성의 밋밋한 느낌도 아닌.

총 16장의 프린트를 해야 하는데,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려온다.
RC라면야 ‘훗…’ 웃어 줄 수 있지만 말이다. 그나마 11×14라서 다행이지.

그래도 좋다.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축복이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괴롭히지 말아라고 했지만.

내가 괴롭힌게 아니다.

인화지 인화지 인화지!

대강 셀렉트를 하고, 정리를 한 다음
프린트 할려고 하니.

어라, 인화지가 없다.
11×14 RC 인화지는 정말 많다.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단, 그것 밖에 없다. 16×20은 이전에 다 써버렸고, 20×24 인화지는
한장 남았다.

오랫만에 일포드 웜톤 인화지를 써볼까 했었는데, 왠걸.
아주 조금 남아있다.

웜톤 인화지는 너무 비싸서.. 걱정이다. 것 참…

사진의 문법.

‘xx법’ 이런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작을 함에 있어서, 사진의 문법이라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위대한 사진가들의 사진적 문법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서구식의 테이스트가 물씬 느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비교적 요즘의 일이다.
그렇게 한번 느껴지고 나니, 뭔가 상당히 짜증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예전의 내 사진들이 서구식의 사진적 문법을 차용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아주 영향이 없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많든 적든 영향을 받았을 것임에 분명하다.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다시 동양적인 문법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라던지, 그렇다면 그 ‘동양적’ 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봄직도 하지만,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직관적인 느낌으로 ‘이러한 것은 아닐것이다’ 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 이유 말고도 또 한가지 짜증나는 것은 이미 기성화 된 – 일정한 form으로써 – 상태로써의 문법을 수용하려고 해도, 어떤 분들이 들으면 역정을 낼지도 모르겠지만,  좀더 세련되고, 그럴듯한 말들 속에 사진은 비명도 없이 말라죽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발상(?)은 사진과 말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니냐? 라고 질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소위 ‘말’이라는 것 또한 사진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 중의 하나 이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컨셉츄얼 아트에 있어서 ‘말’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물론 난 이러한 것을 부정 하지 않는다. 어떠한 종류의 작품은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고, 오히려 지지하는 쪽이다. 하지만 내가 너무 구시대적인 발상에 젖어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진, 그 자체의 순수성을 소중히 생각하는 예술가’라면, 요즘의 트렌드에 대해서 반감을 완전히 가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만의 문법 – 문법에 있어서 ‘나만의’ 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지만 – 이라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을 베이스로 성립되었었는지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제법 심각하게 고민을 해 봤지만, 처음부터 다시 정의를 내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산재해 있다. 이러한 작업들을 하다보니 문득 생겨난 의문이 있었다.

누구를 위해서 사진을 찍고 있었나?

나에게 있어서 그 해답은 자명하다.

그래서 ‘나 답게’ 하기로 했다.

……

忘れじの行く末までは難ければ
앞으로의 일을 알 길이 없으니

今日を限りの命ともがな
차라리 오늘 만의 목숨이었으면 하노라.

– 일본의 옛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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