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스캔할 일이 생겨 작업 들어가기 전, 어쩐지 스캐너 컨디션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광원의 밝기, 점멸 타이밍, 서보 모터, 샤프트 그리고 광학 반사거울의 오염 등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컴포넌트들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만 스캐너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광학 반사 거울에 먼지가 쌓이기 마련인데, 함께한 시간에 비해 쌓인 먼지가 예상보다 많지 않아 보여 잠시 고민 했다. 스캐너에 장착된 광학 반사 거울은 매우 민감하다. 거기에 더해 스캐너는 기본적으로 확대기 구조를 차용했기에 광학 반사 거울을 통한 빛의 이동 경로와 센서의 빛 이동 경로에 있어서 +-0.02도 단위로 조금만 틀어져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광학 반사 거울과 센서가 설치된 구조물은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며칠 고민하다가 레이저 광학 장비에 장착된 렌즈를 닦을 때 쓰는 광학용 스왑을 주문했다.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 센서 클리닝 등급의 클리닝 액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이걸 그대로 쓰기로 했다. 스캐너를 다시 뜯고 클리닝 액을 스왑에 두 방울을 적시고 나서 광학 반사 유리에 접근해서 스왑이 표면에 닿을 듯 말 듯 숨을 멈추고 매우 조심스럽게 표면을 닦아냈다. 이후 다시 클리닝 액을 한 방울만 적신 스왑으로 전체를 닦아낸 이후에 마지막으로 마른 스왑으로 마무리했다. 클리닝이 된 스캐너의 반사 광학 유리는 살짝 미안해질 정도로 반짝 거렸다. 일상에선 접할 일이 거의 없는, 육안의 한계 안에서 기하학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그 자체로도 예술품처럼 보이는 기괴한 3차원 단순 평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 아름다움에 기분이 좋아졌다. 클리닝 이후 예상으론 데이터상 D-Max에선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나, 콘트라스트가 강하게 분기되는 부분과 소위 미약한 블룸 현상에 있어선 조그만 개선이 있을 것이다.
스캐너를 다시 조립하고 기왕 테스트하는 김에 농도 분해능을 살펴보고자, 물리적으로 정상 범위 농도를 매우 초과하여 스캔할 일 자체가 있기 어려운 은염 농도의 차이가 매우 극단적인 흑백 필름을 일부러 고르고 그에 따른 데이터를 살펴봤다. 그런데 화면에서 이상한 지그재그 노이즈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여러 차례 테스트했는데 패턴을 보아하니 외부의 노이즈가 끼어들어온 패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좁은 범위 안에서만 보더라도 원인은 정말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떠오른 것은 전원과 인터페이스 케이블이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유사 사례를 찾고 찾다가 국내엔 정보가 전무하여 외국 쪽 포럼의 다양한 말들을 들었다. 단순한 기계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더라도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들, 자신이 말하면서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들, 자신의 말이 틀린 것인 조차 모르는 이들, 틀린 것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 이들, 애초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의 치명적 불순물들은 언제나 일정 비율 섞여 있기 마련이지만, 그건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 생각, 논리에 따라 걸러내고 취사 선택해야 할 일이다.
어찌 되었건 외국 쪽 포럼을 찾아보니 마침 케이블 노후화로 인해 노이즈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전원 케이블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디지털 전송 케이블에서 심지어 전원 공급과는 거리가 있는 녀석인데 전송 패킷 블럭이 깨지고, 교정 비트도 깨지고, 패킷 재전송 요청도 무시 되는 단계까지 가서야만 이미지가 깨지면 깨지고, 전송 실패가 뜨면 전송 실패가 뜨지 이런식의 연속적 패턴을 가진 노이즈가 끼어든다는 게 이론적으로 있기 어렵다. 그 와중 포럼 스레드에 참가한 몇몇이 센서 노이즈와 필름 그레인을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극단적 농도의 필름을 억지로 노출 보정할 때 발생하는 그레인이나 톤이 깨진 출력 결과를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설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발생한 촌극이 언제나 몇 번이고 일어나는 곳이다. 틀린 것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 이들의 말도 언제나 비슷한 패턴이다.
이 말을 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결국 마음이 답답해져 버렸고, 혹시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 가정을 한다. 어쨌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하니 선재가 굵고 쉴드 처리된 꽤나 비싼 신품 케이블과 전원 케이블 그리고 페라이트 코어를 몇 갠가 주문했다. 도착한 전원, 인터페이스 케이블 각각에 페라이트 코어를 루프식으로 한 번씩 감아서 전부 교체했다. 테스트해 보니 역시나 노이즈가 보인다.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전기 공급 문제부터 보기 시작했다. 부산 중구엔 지역 특성상 새로 건축한 지 몇 안되는되는 건물을 제외하곤 아직까지도 접지가 없는 건물이 대부분이다. 없는 접지를 만들 순 없어서 이사 할 때 별도로 접지 공사도 같이하려 했지만, 꽤 큰 비용 문제와 추가로 발생할지도 모를 몇 가지 문제로 접지 공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전 앰프에 쓰던 전기 노이즈 필터를 달아봤지만,
역시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AVR 기능이 들어있는 액티브 타입 UPS 같은 게 떠올랐지만, 이 정도의 스펙을 지닌 물건의 목적을 생각했을 때 나의 필요에 비해 너무 지나친 오버 스펙에 가격 또한 그에 걸맞다 보니 애초 논외다.
여러모로 수소문 중 내가 배웠던 기초 전기 이론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물건이 세간에 팔리고 있었다. 이른바 접지가 없는 곳에서 접지를 만들어준다는 멀티탭이라는 물건이다. 마치 게르마늄 팔지를 차면 건강이 좋아진다는 정도 수준의 약팔이 느낌이라 말이 되나 싶긴 한데 조금 더 찾아보니 효과가 있다는 사람, 없다는 사람도 있어서 결국 안 되면 하는 수 없지, 싶은 마음으로 이 말도 안 되는 물건을 구입했다. 물건이 도착하자마자 일단 다른 건 둘째 치고 샤머니즘에 가까운 이 물건을 검증해야 했다.
메뉴얼을 읽고 사용법을 익힌 후 멀티 테스터를 가지고 핫 라인을 찾아서 접지 테스트를 해보니 어? 이게 왜 접지가 되지? 진짜 되네? 그런데 특정 상황에서 또 접지가 안 된다. 조건을 찾기 위해 시간을 들여 하나씩 살펴보니 전자기장이 강한 물건이 근처에 있거나 특정 기기의 콘센트가 물려 있으면 접지가 풀리는 이상한 물건이다. 아.. 이래서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된다고 했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아무튼 이 물건을 통해 접지가 된다는 것이 오래전 배웠었던 기초 전기 이론으론 원리가 짐작도 안 간다. 내가 모르는 부분은 언제나 상상한 것 이상으로 당연히 훨씬 더 많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르는 것이 거의 전부다. 하물며 기초 이론을 알고 있는 정도론 실제로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나는 설명하지 못한다. 아무튼 이런저런 상황을 소거법으로 하나씩 정리해서 접지가 작동(?)되는 상황을 찾고 이를 고정하여 스캐너를 다시 테스트해 봤다.
역시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리플 노이즈 비슷한 모양이니 분명 노이즈가 센서에 타고 들어가거나, 신호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을 텐데 어찌 되었건 기본적으로 전원부 쪽을 의심해 보는 것이 순서상 타당할 것이라 생각 했다. 전원 공급단 부터 시작하기 위해 파워서플라이를 찾아보니 기적적으로 형식 번호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신품 부품이 아랍 에미리트의 한 셀러가 팔고 있었다. 판매자의 품목들을 보니 패턴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쓰는 무슨 물건인지 판매자도 모르지만, 지구 어딘가서 언젠가 필요한 사람이 한두 명은 있을 테니 적당히 뭐든 사들이고 팔릴 때 결국 팔리겠지 싶은 느낌이다. 제조사의 부품 의무 보유 기간을 넘은 지 꽤나 된 마이너한 기계의 특정 신품 부품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아랍 에미리트까지 가서 있는지 그 여정이 나로선 쉬이 상상이 안 된다. 그래서인지 부품 가격도 그렇지만 배송료도 비쌌는데 별수 없다. 신품 부품이 지금도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다시 며칠인가 지나 부품이 도착하여 교체하고 테스트를 했다.
역시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면 이제부터는 문제가 갑자기 복잡해진다. 모든 곳을 의심해 봐야 한다. 광원, 광원 콘트롤러, 로직보드, 차폐형 리본 케이블, 센서 모듈부, 서보모터, A/D 컨버터 그리고 이 모든 곳에 각자 들어가는 전원 공급단 등 다양한 부분이 대상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 남는 건 모든 유닛들을 하나씩 따로 구해서 테세우스의 배 처럼 부품들을 교체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최후의 과정엔 센서 유닛을 교체하는 상황까지 가버린다면 제조사의 센터 전용 도구, 전용 캘리브레이션 타겟, 전용 교정 프로그램 이 3가지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같은 중고 스캐너를 찾아보거나 다른 스캐너를 입수해야 한다.
타사에서 아직 발매하고 있는 필름 스캐너는 수치 스팩이 더 좋아 기대감을 가지고 실기를 잠시 받아 테스트해 본 적이 있다. 데이터를 뽑아 보니 실제 출력 품질은 제조사에서 표기한 수치 스펙만큼 되지 못했고, 필름 입자의 아큐탄스도 살짝 뭉개져서 나왔다. 스캐너 내부의 확대 렌즈 품질이 센서 해상도를 전부 받아 주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름의 평활도를 잡아줄 안티 뉴턴링 캐리어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논외다.
선택지에서 유일하게 남는 건 이마콘 플랙스 타이트 정도인데 대형 필름은 최대 2040dpi, 중형은 최대 3200dpi로 스캔되니까, 내가 사용하는 스캐너의 중형 필름이 최대 4000dpi가 되니 오히려 해상도는 이마콘이 더 떨어진다. 남는 장점은 35mm 필름 스캔할 때 더 높은 dpi, 가상 드럼을 통한 필름 평활도와 기분 (암실의 필름 확대기를 스캐너 버전으로 축소한 구조와 거의 같기에 이를 기본으로 한 아이디어와 내부 설계의 발상이 간결하고 아름답다. 게다가 필름을 스캐너에 장착할 때 쓰는 필름 트레이 라이트 박스의 구조물 위에 필름을 올리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이 좋아짐 정도인데 여기에 더해 이마콘의 스캔 프로그램인 플랙스 컬러는 정말 수백 번을 써도 쓸 때마다 최악이라고 느꼈다. 플랙스 컬러의 의미라고 한다면 어쨌던 스캐너를 구동하게 하고 필름의 데이터를 긁어오는 정도로만 봐야 할 것이고, 네가티브 필름의 컬러 렌더링 품질도 정말 좋지 못했다. 하다못해 SilverFast 프로그램에서 이마콘을 지원만 했더라도 좋은 기분을 위해 어쩌면 이마콘을 썼을지도 모른다.
결국 개선이라 할만한 선택은 있지 않았다.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쓸 수도 없다. 궁여지책으로 스캔된 이미지를 고속 푸리에 변환을 한 이후에 노이즈 패턴의 주파수를 따서 마스킹하고 이걸 다시 고속 푸리에 역변환을 하는 정도가 최선일 테지만, 그야말로 궁여지책일 뿐이고 한장 한장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효율도 너무 떨어지는 데다 이렇게 품을 들인다 하더라도 이미지의 품질이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다. 정말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쓸 수도 없다. 신품 스캐너는 있지도 않으니, 중고로 구입해야 하는데 잘 사용되어 온 중고품과 인연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운의 영역이다. 설령 운이 좋게 따라왔다 하더라도 물건 자체가 시간이 꽤나 지난 물건이고 그에 따른 부품의 내구년한이라는게 있으니, 중고품을 입수하더라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시간은 흐르고 낡아가고 늙어가며 결국 죽는다.
아마도… 비교적 높은 확률로 캐피시터가 문제겠지. 쌀알들 마냥 깨알 같이 박혀 있는 캐피시터를 하나 하나 전부 다 들여다 본다 하더라도 하나씩 추적하려면 적절한 도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어쨌던 스캔이 필요할 땐 외주로 돌리면서 틈이 날 때마다 관련 정보가 없는지 찾아보며, 제조사의 내부 엔지니어용 수리 메뉴얼도 어떻게 입수해서 찾아봤지만 내가 겪는 증상 관련으로는 나와 있지 않는 내용이라 시간만 흐르고 있다.
전원 관련은 문제가 없을 듯 하고, 센서에서 A/D 컨버터로 넘어갈 때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잖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어찌 검증할 방도도 지식도 기술도 도구도 나에겐 없었다.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A/D 컨버터의 데이터 시트와 관련 문서를 살펴보던 중 레퍼런스에서 노이즈 발생의 밴드 리미트에 대한걸 발견하고 이를 조율하기 위한 디커플링 네트워크까지 닿았다. 캐피시터 문제가 아닐까 싶은 막연한 생각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바뀌었다. A/D 컨버터의 핀 번호를 따라서 회로 추적을 하면 될까 싶었지만 여기서 멈춰졌다.
갑자기 모든 게 다 상그럽고 짜증나고 귀찮아진 것이다. 정신적으로 지친것도 있지만 몸 상태도 좋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나도 인지하지 못한 체 상대방에게 짜증내고 나선 나중에 앗차 싶어 사과하는 일이 요즘 들어 간간히 있었다.
언제나 항상 잘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을 기울여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짜증이라면 발산하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에 따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인지 하지 못한 가속, 감속, 브레이크 없이 발산되는 짜증은 문제다.
문득 댐이 터진 것처럼 감정이 소리 없이 쏟아졌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도대체 나는 왜 여기 있는가. 그저 모든 게 허망하며 의미 없다. 가치의 편린조차도 없다. 아니 애초 가치의 정의를 생각하면 이 말조차도 우습다. 애초 의미나 가치 같은 건 존재한 적도 없었으며 삶의 궤적을 만든 수많은 것들과 환경 압력, 동조 압력 등에 의해 백터화 된 관성으로 움튼 일시적 현재 상태의 중첩을 이어갈 뿐이라는 것은 아주 예전 부터 인지 했었고 겪기도 했지만,
역으로 일시적 현재 상태의 연속일 뿐이기에 그 안에서 자신이 만족하는 형태의 유희를 걸어가면 될 일 아닌가. 삶의 본질과 장난감은 닮아 있지 않은가. 라는 식으로 간간히 독려해 왔었지만, 배터리가 다 빠지고 내가 지니고 있는 그나마 몇 개 되지도 않는 페르소나 조차도 멈춰버리고, 껍질만 분리되서 왠 알 수 없는 자동인형이 말하고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괴로워하고 간혹 미소 짓는 이런 섬찟한 감각은 꽤나 간만이라 반가우면서도 괴로웠다. 언제부턴가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이후로 음악도 거의 듣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이후에서야 스피커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여차저차 해서 스피커를 고치고 다시 귀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음악을 듣지는 못했다.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숨통은 조금 트이는 느낌이다. 좋아하는 곡을 조금 더 소중히 듣는 기분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여전히 좋지 않지만, 스피커를 고치는 행위를 통해 약간의 회복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한 줌 조금 안 되는 에너지를 받아서 스캐너를 다시 바라봤다. 참으로 얄팍한 일이다.
다시 한참을 찾고 찾아 운까지 따라준 덕에 기종은 달랐지만, 마침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공유해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거도 같이 공유해줬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결정적인 상황에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어 도움을 나누는 이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의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며, 동시에 얼마나 적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기본적인 원인도 파악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초 개념도 조금 알게 되었다. 남은 건 기종이 달라 회로가 다르게 구성된 부분을 해결하면 된다. 그래서 해결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추가로 여러 포럼을 온종일 뒤적이며 다양한 말들을 목도 했다.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들, 자신이 말하면서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들, 자신의 말이 틀린 것인 조차 모르는 이들, 틀린 것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 이들, 애초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의 치명적 불순물들은 언제나 일정 비율 섞여 있기 마련이지만, 그건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 생각, 논리에 따라 걸러내고 취사선택해야 할 일이다. 애초, 이들은 각자 나름의 경험자 일순 있지만, 진짜 전문가가 아니다. 또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도 아니다. 짜증 낼 일이 아니다.
잠시 마음을 정리하고,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지를 궁리 했다. 작업의 편의성을 위해 리드를 뽑아서 쓰는 게 편하겠지만, 나는 왠지 정확히 크기가 맞는 표면실장형 캐피시터를 쓰고 싶었다. 다만 국내에선 찾기 어려워 같은 스펙에 크기가 조금 더 큰 캐피시터와 솔더윅을 주문했다. 주문 후 도착까지 4일 정도 지나 도착했다. 스캐너를 다시 뜯고 커다란 센서가 장착된 보드에 접근해서 해당 부품을 살펴봤다.
겉보기엔 이게 문제가 있다고 상상하는 게 불가능 할 정도로 세상 멀쩡해 보인다. 조심스럽게 부품을 떼어냈다. 캐피시터에 열을 오랫동안 가해서 좋을 일이 별로 없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열로 작업하고 싶었지만 표면실장형 타입을 인두로 작업하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그냥 리드선 타입으로 할껄…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이지 않는다 한들 내가 알고 있기에 결국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위로하며 새끼 손톱 1/8 정도 크기의 부품 1개를 새로 달았다.
간단하게 정리하고 스캐너에 전원을 올리고 초기화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이후 필름을 넣어 스캔했다.
이 조그맣고 거대한 세계의 안에, 겉보기엔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 고작 새끼 손톱 1/8 정도 크기의 50원 짜리 부품 1개 였다.
결국 증상은 개선 되었다.
아니 완벽하게 고쳐졌다.
원인을 찾고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과정을 치러오는 동안 적지 않은 시간, 생각, 과정, 정신적 에너지 그리고 돈이 들었다. 심지어 겉으로 보기엔 세상 멀쩡해 보이기에 이것이 원인일 거라 판단하기 쉽지도 않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도착한 장소엔 새끼 손톱 1/8 정도 크기의 50원 짜리의 것이, 이 전체를 쓸 수도 버릴 수도 없게 만들며, 전체를 고치게도 하고 전체를 망가지기도 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을 길게 목도 했다.
문득, 인간의 복잡한 마음이나 격류에 휩싸여버린 감정의 원초적 시발점도 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 터이다. 그러나 나의 망가진 부분을 길게, 깊게, 파고 들어간 끝에 마침대 찾아 낸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렇게나 작은 것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