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컬러로 촬영했던 필름을 정리할 일이 생겼다.
라이트 테이블에 불을 올리고, 필름 스트립 전체를 빠르게 훑는다.
때론 정리의 목적과는 관계없는 것을 루빼로 찬찬히 보기도 한다.
며칠 동안 이것을 반복하던 중, 문득 컬러로 촬영했던 필름을 정리하게 했던 이유가 바스러지듯 힘을 잃어간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사진이라는 형식미는 잔인하다.
오래전 컬러로 촬영했던 필름을 정리할 일이 생겼다.
라이트 테이블에 불을 올리고, 필름 스트립 전체를 빠르게 훑는다.
때론 정리의 목적과는 관계없는 것을 루빼로 찬찬히 보기도 한다.
며칠 동안 이것을 반복하던 중, 문득 컬러로 촬영했던 필름을 정리하게 했던 이유가 바스러지듯 힘을 잃어간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사진이라는 형식미는 잔인하다.
‘수학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발전한 수학에 대해 수학자들은 그 수학이 아무런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죠.
논리 구조일 뿐이지. 좀 재밌죠. 수학은 의미 없는 것들에 대한 극도로 논리적인 사고인 거예요.’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척 로맨틱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 지루한 단순 반복 노동의 연속이다.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내지 않은 채 그저 잉크와 종이의 데이터를 뽑고, 형광 증백제의 영향으로 일어나는 시각적 색 왜곡을 한계 안에서 중성화하고, 농도와 컬러를 확인하고 또 다시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시간은 그야말로 순간이라, 한 달이 거의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기기를 조율 중이다. 꽤나 성과도 있었고 때론 만족할 만한 지점까지 닿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 남기도 했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은 계속해 나갈 뿐이다. 이럭저럭 절반 정도는 온 것 같다. 데이터를 잡기 위해 지금까지 사용한 용지는 약 81제곱미터 정도다. 기기가 바뀌면서 이전과 다른 사소한 몇 가지 동작의 차이로 인해 귀중한 용지를 날려 먹은 것이 의외로 된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니, 나의 나쁜 버릇 중 하나가 튀어나온다. 그레이스케일이 부동소수점으로 쪼개진 다음 반올림되는 것이 싫어서, 51 스텝으로 나눠 정수로 움직이는 계산을 처음부터 다시 하다 보니 결국 시간과 돈은 더 들어간다. 그래서 결과물 차이가 드라마틱하게 다르냐 하면 들인 수고에 비하면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 차이가 작업 전체의 어조를 결정하는 경우는, 경험상 흔하게 있다.
흑백도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다. 용지 특성에 따라 적절한 계조 선형성을 갖되 쉐도우 디테일의 뭉개짐을 최대한 방어하면서 선형성을 찾아가기 좋은 시작점을 찾는 것부터 살펴본다. 용지 자체의 색조가 있고 이에 따라 흑백의 색이 어느 정도 따라간다. 이것을 캐릭터로 인정하고 적절하게 맞춰갈 것인가 아니면 한계까지 밀어붙여 중성화시킬 것인가도 고민하던 부분이다. 최근엔 되도록 용지의 캐릭터를 존중하되 기본적으로 달성해야 할 구간을 닿도록 하고, 너무 삐쳐나간 것을 살짝 정돈하는 정도의 범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거의 20여 년 가까이 해왔던 암실 작업에서 필름과 인화지의 데이터를 뽑고 나서, 그 이후엔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작업하던 것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그 암실이 지금은 명실로 바뀐 것뿐 근본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그중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옛날 암실에서처럼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처음 뭔가를 배우고, 익힌 만큼 세계가 넓어지는 감각이 컸던 청춘의 차이일까, 익숙한 정도의 차이일까, 아니면 이런 노력의 결과 끝에 내가 닿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미지의 기대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 아니면 그저 검붉은 암등 아래서 현상 트레이에 담궈진 하얀 인화지 위에, 유령처럼 올라와 현실이 되어가는것을 목도하며 미동없이 올라오는 반복된 고동의 차이 일까.
다만 그래도 이렇게 흑백 프린트에서 농도가 정돈된 걸 보면 프린트 때문에 짜증 날 일이 없다는 것과, 그렇기에 주변의 것은 주변으로 두고 그저 작업에 오롯이 집중하면 될 뿐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농도 데이터의 비포/애프터를 보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쉬어야겠다고 생각 했다.
다음 순서는 면화지 기반의 형광증백제가 들어 있지 않은 화이버 베이스를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색과 농도를, 명확한 형태가 있는 것으로서 손에 쥐어 사용 할 수 있는 물감과 붓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2,033개의 컬러 칩세트를 만든다.
대략 16년 전에 컬러 칩 갯수를 800여 개부터 5200여개 까지 다양하게 시험해 본 적이 있다. 예상과 달리 갯수가 너무 많으면 일종의 노이즈 처럼 되어서 특정 구간에서 색이 튀고, 갯수가 작으면 인터폴레이션이 심해져 정확도가 떨어졌다. 그로부터 대략 8년 이후 장비 성능과 프로그램 알고리즘이 개선되면서, 앞에서 했던 것처럼 컬러칩 갯수를 800여개 부터 5200여개 까지 다시 다양하게 시도해 봤는데, 알고리즘이 개선된 덕에 예전보다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역시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결국 돌고 돌아, 시작 하기 좋은 출발점으로서 2033개가 합리적이었다. 여기에 필요에 따라 3~1000개 정도의 컬러 칩을 추가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측정을 위한 컬러칩 세트는 크게 다음 요소에 따라 결과 값이 다르게 나온다.
헤드 이동 속도 / 프린트 렌더링 해상도 / 쉐도우 로컬 콘트라스트 확장 / 스펙트럼에 UV 포함 관능평가용 / 스펙트럼에 UV와 편광을 제거한 관능 평가용에 따른 셋팅 조합은 대략 40가지 정도 되는데 작품 프린트 범위 안에 들어오는 기초 조합은 대략 16가지 정도다.
그 중 기본 특성을 고려하고 경험상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해서 2033개의 컬러칩 세트 6개를 만들었다. 이런 접근을 통하면, 하지 않은 나머지 10개의 조합도 데이터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하다. 설령 드물게 6개 세트의 결과가 전부 기준 이하가 되더라도 최종적으로 2~3개 셋트만 추가로 작업을 더 하면 보통은 기준 범위 안에 들어온다.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최적화용 패치 셋을 만들어 보충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만든 컬러칩 세트는 건조가 매우 중요하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건조 시키는 동안 색상과 농도가 계속 변화한다. 때문에 프린트 하자 마자 나온 것을 손에 들고 곧바로 색상, 농도 판단하는 행위가 적절치 않은 이유다.
암실에서 프린트 할때 트레이의 물 속에서 보는 것, 스퀴즈 하고 나서 바로 보는 것, 완전히 건조되고 나서 보이는 콘트라스트 특성은 확연히 다르다. 드라이 다운 현상 때문이다. 때문에 경험이 풍부한 이는 스퀴즈 하자 마자 바로 보는 톤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퀴즈 할 때는 약간 맞지 않더라도 최종적으로 드라이 다운 되었을때의 변형 정도를 미리 예상하여 작업한다. 경우에 따라선 셀레늄 토닝할때 D-Max 변화를 고려하여 작업 하기도 한다.
같은 이유로 프린트 전반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특히 색상과 농도의 기준을 잡기 위한 측정 작업엔 건조라는 요소는 정말 중요하다. 컬러칩 세트를 만들 때도 되도록 표준 온습도 범위인 습도 40~60%, 온도 15~25도 범위 안에 들도록 환경을 만들고 이를 추적 체크 하기 위해 데이터 로그 기능이 내장된 온습도계로 확인한다. 흑백 프린트의 경우 온습도의 차이에 따라 톤이 제법 달라지기도 한다. 종류 따라 다르지만 통상 3일 가량 건조 과정을 추적 계측 해보면, 색상 이동 평균값은 대체로 허용 범위 안으로 수렴한다. 그렇게 3일을 건조 시켰고 이제 측정이 가능해졌다.
분광광도계로 12,198개의 컬러 칩을 꾸역꾸역 계측 했더니 5시간이 사라졌다.
단순 반복 작업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편이지만, 컬러 칩을 읽고 있을 땐 약간 신경질적으로 멍해진다.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멍한데 신경질적이고, 신경질적인데 멍한 상태라는 것은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 속에서 마시는 것과 비슷 감각이지 싶다.
컬러 칩을 읽을 때 분광광도계의 위치를 제대로 잡으면서, 동시에 읽는 속도가 너무 빨라도 너무 느려도 안 되고, 중간에 튀어도 안 되니까 생각보다 꽤나 신경 쓰인다. 게다가 분광광도계와 컬러칩 사이의 거리가 조금 달라지기라도 하면 측정값이 살짝 튄다. 물론 이런 휴먼 에러에 대비한 몇 가지 절차적 안전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안전장치는 평소엔 꽤나 잘 작동한다.
하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절차적 안전장치는, 그 안전장치를 만든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안전장치를 만들고, 예외 처리를 꼼꼼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상상 이상의 일들이 벌어진다. 때론 이런 일들이 창조와 창의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안전장치를 만드는 사람으로선 그저 재앙일 뿐이다. 프로그램 만들어본 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렇게 측정한 2033개의 컬리칩을 3차원 색 공간 좌표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모델이 깨지거나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잉크 조합 커브에 튀는 영역은 없는지, 톤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선형적으로 증가하는지, 중성 채널에 잡색이 끼어있진 않은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순서상 제일 먼저 하게 되는 3차원 색 공간에 데이터를 올려서 나온 결과가 이거다.

이 짓거리를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럭저럭 20년은 해왔는데 이렇게 선명하고 깊은 구멍이 난 것을 만든 적은 처음이다. 처음 측정 시 허리가 아파서 중간에 살짝 튀었는데 그게 원인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원인이야 워낙 다양할 수 있다. 컴퓨터 접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생한 누설전류가 케이블을 타고 분광광도계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하필 전압이나 전류 변동이 발생해서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접지를 잘 해두었기에 이게 원인일것 같진 않았다. 혹시나 싶어 누설전류 계측기를 꺼내서 케이블을 직접 측정 해보니 문제 없다. 그 밖에 원인을 생각해보면 컬러 칩을 읽을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기에 찌그러진 곳의 하이라이트 옐로우, 하이라이트 마젠타 구역에서 측정 좌표가 어그러진 곳의 좌표를 보고 측정 데이터의 순서를 찾기 위해 데이터를 눈으로 훑어보는데, 에러 난 곳을 찾기 어렵다.
잠시 눈을 감고, 밖에 나가서 숨을 들이 마시고 담배를 한대 태우고 음료수 한 캔을 마신 다음 의자에 눈 감은 채로 잠시 앉아 있다가 해당 컬러칩 셋트를 처음부터 다시 측정했다. 값이 멀쩡하게 잘 나왔다.

이런 상황이 생기기도 하다 보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멍함과 신경질적인 것이 공존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분광광도계의 시그널 케이블이 혹여나 컬러칩 셋에 쓸려서 반사율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기에 이를 방지하며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혀서 하다 보니 허리가 아프다. 멍한데 신경질적이고, 신경질적인데 멍한 이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이것을 총 6회 반복한다.
이렇게 다시 측정한 2033개의 컬러칩을 3차원 색 공간 좌표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모델이 깨지거나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프리머리/세컨드리 컬러 좌표 경로가 지나치게 휘는 곳은 없는지, 잉크 조합 커브에 튀는 영역은 없는지, 톤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선형적으로 증가하는지, 중성 컬러 채널에 잡색이 끼어있진 않은지를 면밀히 살펴본다.
데이터 확인이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각기 적용한 6개의 테스트 프린트 만들고 다시 3일을 건조한다. 현장에서 테스트 프린트를 뽑아서 보더라도, 앞서 말한 드라이 다운 현상 때문에 컬러와 농도를 제대로 판독 할 수 없다. 때문에 3일 건조가 끝나면 표준 뷰잉 부스에서 관능평가를 한다.
너무 극단적으로 표현되진 않았는지 혹은 너무 중성적으로 표현되진 않았는지 다시 말해 용지가 품고 있는 어조와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지,
형광 증백제가 들어 있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용지의 경우 조명에서 나오는 UV 광에 반응 정도에 따라 보이는 어색함이 허용 범위 안에 있는지,
만약 형광 증백제 영향으로 어색함이 허용 범위를 초과할 경우 이를 다소 중화할 방법과 도구로 어떤 식의 접근을 할 것인지,
형광 증백제 무첨가의 고급 용지 경우 페이퍼 화이트와 하이라이트 영역 색상 및 밝기 전환 그라데이션과 선형도가 매끄럽게 잘 연결 되는지,
쉐도우 분리력은 용지 특성을 고려하여 스펙 범위만큼 나오는지,
데이터와 실제 프린트 사이의 괴리는 없는지,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방법과 도구로 더 나은 것을 만들 것인지를 고려한다.
이렇게 6개를 평가하여 용도에 따라 2~3가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나면, 오롯히 자신의 작업에 더욱 순도 높은 매진을 할 수 있게 된다.
때론 아주 엷고 투명한듯 하이라이트의 미묘한 어조는 그냥 볼때는 아주 사소해보이지만, 이 하이라이트의 예민한 어조 차이가 작업 전체를 결정 할때가 있다. 깊고 무거운 쉐도우의 중량감, 맑고 폭신거리는 쉐도우의 찰랑거림이 작업 전체의 어조를 결정 할때가 있다. 종종 어조라는 것은 내용에 한없이 가깝다.
위와 같은 기초 작업을 통하고 나면, 최종 프린트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할 필요 없이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공방에 모니터를 통해 시뮬레이션 결과값을 확인 할 수 있다. 일부 특수 매체를 제외하면 대부분 눈에 본대로 나온다. 건조가 덜된 테스트 프린트를 들고 잘못 판단하여 최종 완성작품의 어조가 다르게 나올 일도, 추가 비용도 들지 않으며 더 정확한 예견이 된다.
이것을 각 용지 종류별로, 기준안에 들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지금까지 컬러 작업만 이야기했다. 흑백 작업 이야기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흑백은 이와는 또 다른 식으로 별도 진행 해야 한다.
컬러 보다는 흑백이 난이도가 더 높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색과 농도를, 명확한 형태가 있는 것으로서 손에 쥐어 사용 할 수 있는 물감과 붓 그리고 캔버스를 만들었다.
이렇게 기준을 만든 후, 기준을 잊기 위한 준비를 하나씩 녹여간다.

그제 한나절 걸려 설치하고, 기계가 온도 습도에 적응해서 수축 팽창이 잦아들도록 하루 정도 안정화시킨 후에, 9,600개의 노즐이 붙어 있는 헤드의 착탄 포커스와 급지 옵셋 등 기초 셋팅을 맞춘 후, 색상별 농도값 측정 위한 작업 준비 중이다.
기초 작동 및 묘화 최적화를 하면서 조금 더 기간을 두고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이전에 비해 작동이 안정적이다. 길게 봐서 통계를 만들어 봐야 알 수 있는 거겠지만 확률적으로 꼭 발생하는 프린트 불량 Loss도 아직까지 없다. 아마도 이전 보다는 나을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쉐도우의 로컬 콘트라스트 분리력 향상에 더해 광색역 프린트가 가능해졌다.
여름이 끝난 가을 초입의 어느날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조우한, 세상에 모든 오렌지색을 졸여낸 듯 처연한 붉음이 가득한 속에서, 나직히 숨 쉬는 창백한 살결의 그 사람이 투명하게 웃던 모습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른 겨울, 상처 처럼 돋아난 싱그러운 녹색의 생물이 아스팔트를 깨고 일어나는 모습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깊은 물 속 검푸른 울렁임 위에 한오라기 실 같은 빛이 누워 있는 새벽, 미지근한 체온속 오래도록 스민 단단한 고독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뽀얀 복숭아 빛 같은 그 사람의 볼살에서 나던 향기를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하늘에 박힌 별들도, 검녹색의 바탕에서 빛나는 초록과 분홍의 오로라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오후 2시에 무겁게 내린 회색 비들 속에서 각양각색의 무심히 가라앉은 듯한 색깔의 우산들과 그림자처럼 씌어 있는 사람들과 투명하게 비치는 물빛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두껍고 텁텁한 회색 나무들과 설득에 실패한 현재 같은 보도블럭 위에 하얀 나비가 앉아 있는 모습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의 조그만 항구 마을에 사람들과 함께 자유롭게 살고 있는 하얀 숫컷 고양이의 분방함과 천진난만과 요염함도 이젠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다 표현하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넓힌다는 것은, 그보다 안에 있는 것들은 더욱 정제된 표현에 도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소중한 작업 원고를 품고, 이 공방에 오는 그리고 올 작가들도, 그리고 나의 작업들도 새로 함께할 이 친구와 함께 만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몽글몽글해진다.
이와 관련해서 현실적으로 남은 문제는 생산성과 품질의 밸런스다. 나의 오래된 나쁜 버릇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

또 하나의 역사가 마무리 되었다. Nikon의 플래그쉽 디지털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 D6가 2025년 5월 13일 공식적으로 단종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새로운 DSLR 플래그 쉽 카메라는 나오지 않았다.
Nikon 최초의 SLR 카메라는 1959년에 발매된 Nikon F였다. 그로부터 40년 후, 최초의 상업 DSLR 카메라인 Nikon D1이 1999년 6월 15일 발매 되었다. 다시 그로부터 26년 후 Nikon의 SLR 형식 카메라는 66년 역사를 거쳐 종결 되었다.

Nikon의 마지막 플래그쉽 필름 카메라인 F6, Nikon의 마지막 플래그쉽 디지털 카메라인 D6. 그리고 Nikon SLR 역사 66년. 셋 다 6으로 끝났다는 게 우연일 수도 있지만 Nikon F5와 8년을 함께 하고, F6도 8년간 함께한 이후, Nikon DSLR과 13년간 함께한 Nikon 팬으로서 이런 사소한 우연에도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지점이 있다.
소니의 a, 니콘의 Z.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 혹은 완결이자 완성이라는 포부를 담고 있을 것 같은, F와 D를 이어 Nikon 최초 미러리스 풀 프레임 카메라의 이름인 Z는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8년 여름에 공개 되었다. 이후 기간을 거쳐 202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Nikon 플래그쉽 풀프레임 미러리스 카메라인 Z9이 발매 되었다. 첫 인상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서적 영향을 주었던 Nikon F5와 얼마간 닮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본능에 가깝게 바로 가슴이 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요구 기준에 부족한 4600만 화소가 안타깝게도 문제였다.

Nikon SLR의 역사가 끝난 오늘, 언젠가 다시 Nikon으로 돌아갈 날이 오길 여전히 내심 기대하고 있다.
근처 편의점엘 다닌 지 이럭저럭 3년이 되었다. 그 사이 주인이 한두 번인가 바뀌는 듯했지만, 그것이 주인이 바뀐 것인지 어떤지 사실을 알 길은 없다. 단지 그렇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아주머니와 할머니의 그 어딘가 길목 즈음인것 같은 편의점 점주는 언제부턴가 내가 카운터 근처에 가면,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항상 내가 피우는 담배를 먼저 집는 짧은 동작과 함께, 짧게 인삿말 같은 안부를 나누게 되었다.
도대체 언제 쉬는지 모르겠지만 낮에 가도, 한밤에도 있었다. 때론 검은 새벽녘 밀어닥친 물건들이 정리되지 못한 체 모진 피로에 밀려 카운터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볼 때가 많았다.
담배 한 갑 사려 굳이 사람을 깨우는 게 맞나, 담배 한 갑 마진이 얼마 안 된다고 들은 기억이 있는데 그냥 다른 편의점엘 갈까, 그래도 매출이 나오니 여기서 사는 게 더 좋을까, 아니 그 이전에 한 겨울 강원도에 쌓인 눈 더께 처럼 쌓인 피로를 조금씩 녹이고 있는 단잠의 가치와 담배의 매출을 애초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소심하고 시시한 생각이 들 땐, 나도 피곤한 상태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그랬던 것 아니었지만, 때때론 혹여 깰까 싶어 조용히 그 자리를 나와 에둘러 다른 편의점엘 가곤 했다. 어느 게 더 좋은 건지 나로선 판단이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하는게 간혹 내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라는 이기적 이유일 것이다.
계절이 한 바퀴 도는 동안 새로 머리핀을 한 모습이 잘 어울리신다던가 같은 말도 건넬 정도가 되었다. 새벽 담배 사러 갈 때 잠들어 있는 점주를 조심스럽게 부르니 선잠에서 번뜩 깨어나 담배를 바로 꺼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듣기론 마진도 얼마 안 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깨워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저 오시는 것으로도 감사하다고 화답을 해주기에, 고맙다고 화답하며 괜히 옆에 있던 빵도 하나 더 샀다.
다시 시간이 흐른다. 특별할 일은 없다. 편의점과 나와의 특별할 일이 생긴다면 어떤 형식이 될까 상상해도 쉽게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단조롭고 평화적이며 조용하다. 이 사사로운 짧은 틈새의 고요함 그리고 변화하지 않음에 나는 감사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습니다. 라고 인삿말을 건넸다. 뭔 일로 기분이 좋습니까? 라기에 그냥 좀 기분이 좋습니다 라고 대답한 지 1초도 안 되어, 난 기분이 나쁩니다. 라고 화답이 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라고 물으니,
이게 틀린 일인 것 같은데 와 그리됐는지 그래서 영 기분이 벨롭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이게 무슨 말인지 해석이 안되어, 상대방의 눈을 봤는데도 2초 정도 걸린 것 같다. 아아… 이런.. 평소와 다르게 고맙습니다라는 말 없이 조용히 담뱃값을 계산하고 편의점을 나왔고, 내 어깨 뒤에서 늘 들리던 감사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2025년 4월 4일 14:43분의 일이었다.
몇 년을 함께 했을까, 되돌아 생각해 봐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이나마 더 정제된 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몇 가지 겹쳐진 어느 날 끝에 문득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어느 시간에, 어느 곳을, 어느 누군가를, 어느 이유가 되었다 한들 그 어떠한 순간에도 예외 없이 붙박이처럼 들러붙어 있다. 드라마틱한 사진적 과장과 작화시 레이어 분리를 통해 메세지를 선명하게 전하기 좋은 광각도 아니요, 원근감 압축에서 오는 꽉 채워진 긴장감이나 대상을 추상화 하기 좋은 망원 렌즈도 아니다. 그렇다고 줌이 되어서 여러 상황에 유연히 빠르게 대응 되는 줌 렌즈도 아니다.
우리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사용하는 눈동자와 뇌가 인지하는 세상의 전부이자 단 하나의 원근감. 세상 흔해빠진 수 없이 다양한 50mm 초점거리를 가진 렌즈 중 하나. 생경미 같은 것은 없다. 인간이라는 종이 눈으로 인지하는 원근감과 같기에 익숙하고 그렇기에 사진적 구성에 있어 화려함 없는 흥미롭지 못한 그런 초점거리.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의 일신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어떠한 때라도 몸에 일부처럼 있는, 이 50mm 초점 거리가 참 좋았다. 이유라면 몇 가지가 있지만 지금은 그것을 굳이 하나 하나 말하고 싶진 않다. 그저 이 렌즈를 통해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한다. 정신이 나가버린 때에도 이 렌즈는 무감하게 나를 통한다. 내가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인지, 이 렌즈가 나를 찍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엷고 기묘한 감각이 항상 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렌즈를 통해 나의 망막에 맺혔던 수많은 것 중 어떤 것은, 내 몸에 맺혀져 버린 것들이 있다. 언제부턴가 문득 이 렌즈를 보면 몸이 소리 없이 우우웅 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은 괜찮았다기 어느 날은 하루 전체를 망쳐버릴 정도로 소리를 낸다. 딱히 어떤 조건이나 패턴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어디를 가던 나의 어깨와 손과 마음과 함께했다.
개인적으로도 이웃들에게도 험난했던 2024년이 끝났다. 부디 이 렌즈가 좋은 것 따뜻한 것 아름답고 행복한 것을 많이 봤으면 한다. 나는 2025년 1월 1일 이 렌즈를 다른 이에게 양도 했다.
사랑이 할 수 있는 것이 아직 있을까

자신을 방구석에서 조용하게 덕질을 하고 있는 오타쿠라고 소개한 이가 나와선, 이런 오타쿠마저도 나오게 한 윤석열과 국힘당에 때문에 조용한 덕질을 방해받은 분노로 시작해서
대학생, 고등학생 언니들이 나와서 자신도 나왔다는 중학생이 있다. 이윽고 초등학생까지 나왔다.
백발 성성한 할머니, 할아버지도 보였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수 많은 이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젊은 친구들이 내 예상과 다르게 정말 많이 나왔다는것이 가슴 벅차다. 중년이 이 나라의 현재라고 한다면 이들은 이 나라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산에서도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이 광경에 총과 칼 머리를 개머리 판에 맞아 길바닥에 구르는 광경이 겹치고 대공방첩실 지하 의자에 묶여 고문당하는 그림이 겹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다들 생업에 바쁘신 분들도, 먼저 마음만이라도 더 보태 주셨으면 한다.
제목 :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합니다.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 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 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2024.12.3.(화)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박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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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재적 과반수 찬성하면 계엄령은 그 즉시 해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국회 앞은 들어가지 못하게 막혔고
그 사이 방금 전 무장 군인이 국회 정문에 등장했다.
총과 칼이 우리 눈 앞에 있다.
45년만에 되살아 난 망령
오전 1시 1분 계엄 해제 요구 결의 가결, 재석 190명 전원 찬성.
2시간 48분 만에 계엄령 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