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er

살아생전

살아생전 생부와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다. 지금껏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당신도 예외 없이 언젠가 죽음이 찾아올 텐데, 그날 풍경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그로부터 다시 수년이 흐른 어느 날, 어머니도 생부도 나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어느 날 이렇게 말을 했다.

향은 하나 피워 올려드릴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벼리고 벼려 겨우 만들어낸 끈에 찌그러진 식물의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끈은 하나의 풍경 혹은 죄의식 혹은 복수 혹은 용서와 나의 흔적으로 이루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구성이 뭐가 되었던 어쩌면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 끈이 무슨 재료로 어떤 색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세세하게 따질 만큼의 사치스러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매듭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가기 위한 매듭을 묶어가는 끝은 거의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 찌그러진 식물의 섬 전시는 중반을 지나 대략 일주일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 생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시를 마치고 이후 매듭을 묶기 위한 최종 국면에 계획들도, 문자 그대로 사라졌다. 몇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멈췄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인연을 끊은 생부의 혈육들에게 소식은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최소한의 할 만큼은 했다는 마음이 들 때까지 계속 연락을 취해 봤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혼자서 향을 피웠다.

오늘로 생부가 사망한 지 1년 되었다.

여전히 이날이 되도록 목과 심장에 박혀있는 굵게 녹슨 못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다. 이미 일어난 일로서 확정된 일이다. 이미 확정이기에 어떻게 노력한다고 해도 그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계속 아플 뿐이다. 계속 아프면 사람은 언젠가 결국 망가진다. 나는 아직 마음속에 끈질기게 남겨진 작업이 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라도, 생각해 봐야 별수 없는 일을 계속 생각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 매듭을 만들기 위한 끈을 만들었고, 매듭을 묶기도 전에 끈이 사라졌다. 별수 없다. 이 자체를 받아들이기로 하자. 달리 선택 할 수 있는 것도 나에겐 없다.
찢겨나가 사방에 튄 육편이 길바닥에 토사물 찌꺼기처럼 되어 버린 페르소나의 잔해물을 손바닥으로 대충 쓸고 주섬주섬 주워 담아 다시 바늘과 실로 잇고 기워갔다. 시간이 꽤나 걸리는 일이다. 묵묵히 계속하다 보니 겨우 손바닥 하나 가릴만한 정도의 프랑켄슈타인처럼 기워진 천 쪼가리 하나가 만들어졌다. 어찌 되었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그것을 눈앞 둬서 하늘을 가리는 것이 나에겐 필요했다. 하늘을 가린 덕분에 멈춰 있던 일상은 어떻게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돌아간다. 나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예상보다도 꽤나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요 몇 달 전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여기저기서 쇠가 비틀릴 때 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생부 사망일이 되기 3주 전, 누더기 같은 페르소나를 쓴 것에 대한 청구서가 내 앞에 착착 쌓여갔다. 나는 지불 능력이 없었다.

81억 명의 세계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개인의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세상은 그대로 흘러간다. 세상이 그렇듯 나 또한 어찌 되었든 1/8,100,000,000 정도의 Life goes on 이다. 성질 더러운 놈이랑 영영 헤어질 수도 없으며, 죽을 때까지 같이 있어야 한다면 어찌 되었든 조금씩 어르고 달래가며 함께 가야 할 일이다. 이것이 삶을 너무나 끔찍하게 만들어 고통스럽다면 담백하게 삶을 마감해도 그리 나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침 창문 커튼 사이로 던져진 엷은 빛 조각이 무심히 입구에 드리누워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 내쉬고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딱히 의미는 없다.

새끼 손톱 1/8

필름 스캔할 일이 생겨 작업 들어가기 전, 어쩐지 스캐너 컨디션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광원의 밝기, 점멸 타이밍, 서보 모터, 샤프트 그리고 광학 반사거울의 오염 등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컴포넌트들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만 스캐너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광학 반사 거울에 먼지가 쌓이기 마련인데, 함께한 시간에 비해 쌓인 먼지가 예상보다 많지 않아 보여 잠시 고민 했다. 스캐너에 장착된 광학 반사 거울은 매우 민감하다. 거기에 더해 스캐너는 기본적으로 확대기 구조를 차용했기에 광학 반사 거울을 통한 빛의 이동 경로와 센서의 빛 이동 경로에 있어서 +-0.02도 단위로 조금만 틀어져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광학 반사 거울과 센서가 설치된 구조물은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며칠 고민하다가 레이저 광학 장비에 장착된 렌즈를 닦을 때 쓰는 광학용 스왑을 주문했다.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 센서 클리닝 등급의 클리닝 액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이걸 그대로 쓰기로 했다. 스캐너를 다시 뜯고 클리닝 액을 스왑에 두 방울을 적시고 나서 광학 반사 유리에 접근해서 스왑이 표면에 닿을 듯 말 듯 숨을 멈추고 매우 조심스럽게 표면을 닦아냈다. 이후 다시 클리닝 액을 한 방울만 적신 스왑으로 전체를 닦아낸 이후에 마지막으로 마른 스왑으로 마무리했다. 클리닝이 된 스캐너의 반사 광학 유리는 살짝 미안해질 정도로 반짝 거렸다. 일상에선 접할 일이 거의 없는, 육안의 한계 안에서 기하학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그 자체로도 예술품처럼 보이는 기괴한 3차원 단순 평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 아름다움에 기분이 좋아졌다. 클리닝 이후 예상으론 데이터상 D-Max에선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나, 콘트라스트가 강하게 분기되는 부분과 소위 미약한 블룸 현상에 있어선 조그만 개선이 있을 것이다.

스캐너를 다시 조립하고 기왕 테스트하는 김에 농도 분해능을 살펴보고자, 물리적으로 정상 범위 농도를 매우 초과하여 스캔할 일 자체가 있기 어려운 은염 농도의 차이가 매우 극단적인 흑백 필름을 일부러 고르고 그에 따른 데이터를 살펴봤다. 그런데 화면에서 이상한 지그재그 노이즈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여러 차례 테스트했는데 패턴을 보아하니 외부의 노이즈가 끼어들어온 패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좁은 범위 안에서만 보더라도 원인은 정말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떠오른 것은 전원과 인터페이스 케이블이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유사 사례를 찾고 찾다가 국내엔 정보가 전무하여 외국 쪽 포럼의 다양한 말들을 들었다. 단순한 기계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더라도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들, 자신이 말하면서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들, 자신의 말이 틀린 것인 조차 모르는 이들, 틀린 것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 이들, 애초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의 치명적 불순물들은 언제나 일정 비율 섞여 있기 마련이지만, 그건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 생각, 논리에 따라 걸러내고 취사 선택해야 할 일이다.
어찌 되었건 외국 쪽 포럼을 찾아보니 마침 케이블 노후화로 인해 노이즈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전원 케이블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디지털 전송 케이블에서 심지어 전원 공급과는 거리가 있는 녀석인데 전송 패킷 블럭이 깨지고, 교정 비트도 깨지고, 패킷 재전송 요청도 무시 되는 단계까지 가서야만 이미지가 깨지면 깨지고, 전송 실패가 뜨면 전송 실패가 뜨지 이런식의 연속적 패턴을 가진 노이즈가 끼어든다는 게 이론적으로 있기 어렵다. 그 와중 포럼 스레드에 참가한 몇몇이 센서 노이즈와 필름 그레인을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극단적 농도의 필름을 억지로 노출 보정할 때 발생하는 그레인이나 톤이 깨진 출력 결과를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설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발생한 촌극이 언제나 몇 번이고 일어나는 곳이다. 틀린 것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 이들의 말도 언제나 비슷한 패턴이다.

이 말을 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결국 마음이 답답해져 버렸고, 혹시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 가정을 한다. 어쨌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하니 선재가 굵고 쉴드 처리된 꽤나 비싼 신품 케이블과 전원 케이블 그리고 페라이트 코어를 몇 갠가 주문했다. 도착한 전원, 인터페이스 케이블 각각에 페라이트 코어를 루프식으로 한 번씩 감아서 전부 교체했다. 테스트해 보니 역시나 노이즈가 보인다.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전기 공급 문제부터 보기 시작했다. 부산 중구엔 지역 특성상 새로 건축한 지 몇 안되는되는 건물을 제외하곤 아직까지도 접지가 없는 건물이 대부분이다. 없는 접지를 만들 순 없어서 이사 할 때 별도로 접지 공사도 같이하려 했지만, 꽤 큰 비용 문제와 추가로 발생할지도 모를 몇 가지 문제로 접지 공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전 앰프에 쓰던 전기 노이즈 필터를 달아봤지만,

역시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AVR 기능이 들어있는 액티브 타입 UPS 같은 게 떠올랐지만, 이 정도의 스펙을 지닌 물건의 목적을 생각했을 때 나의 필요에 비해 너무 지나친 오버 스펙에 가격 또한 그에 걸맞다 보니 애초 논외다.
여러모로 수소문 중 내가 배웠던 기초 전기 이론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물건이 세간에 팔리고 있었다. 이른바 접지가 없는 곳에서 접지를 만들어준다는 멀티탭이라는 물건이다. 마치 게르마늄 팔지를 차면 건강이 좋아진다는 정도 수준의 약팔이 느낌이라 말이 되나 싶긴 한데 조금 더 찾아보니 효과가 있다는 사람, 없다는 사람도 있어서 결국 안 되면 하는 수 없지, 싶은 마음으로 이 말도 안 되는 물건을 구입했다. 물건이 도착하자마자 일단 다른 건 둘째 치고 샤머니즘에 가까운 이 물건을 검증해야 했다.
메뉴얼을 읽고 사용법을 익힌 후 멀티 테스터를 가지고 핫 라인을 찾아서 접지 테스트를 해보니 어? 이게 왜 접지가 되지? 진짜 되네? 그런데 특정 상황에서 또 접지가 안 된다. 조건을 찾기 위해 시간을 들여 하나씩 살펴보니 전자기장이 강한 물건이 근처에 있거나 특정 기기의 콘센트가 물려 있으면 접지가 풀리는 이상한 물건이다. 아.. 이래서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된다고 했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아무튼 이 물건을 통해 접지가 된다는 것이 오래전 배웠었던 기초 전기 이론으론 원리가 짐작도 안 간다. 내가 모르는 부분은 언제나 상상한 것 이상으로 당연히 훨씬 더 많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르는 것이 거의 전부다. 하물며 기초 이론을 알고 있는 정도론 실제로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나는 설명하지 못한다. 아무튼 이런저런 상황을 소거법으로 하나씩 정리해서 접지가 작동(?)되는 상황을 찾고 이를 고정하여 스캐너를 다시 테스트해 봤다.

역시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리플 노이즈 비슷한 모양이니 분명 노이즈가 센서에 타고 들어가거나, 신호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을 텐데 어찌 되었건 기본적으로 전원부 쪽을 의심해 보는 것이 순서상 타당할 것이라 생각 했다. 전원 공급단 부터 시작하기 위해 파워서플라이를 찾아보니 기적적으로 형식 번호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신품 부품이 아랍 에미리트의 한 셀러가 팔고 있었다. 판매자의 품목들을 보니 패턴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쓰는 무슨 물건인지 판매자도 모르지만, 지구 어딘가서 언젠가 필요한 사람이 한두 명은 있을 테니 적당히 뭐든 사들이고 팔릴 때 결국 팔리겠지 싶은 느낌이다. 제조사의 부품 의무 보유 기간을 넘은 지 꽤나 된 마이너한 기계의 특정 신품 부품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아랍 에미리트까지 가서 있는지 그 여정이 나로선 쉬이 상상이 안 된다. 그래서인지 부품 가격도 그렇지만 배송료도 비쌌는데 별수 없다. 신품 부품이 지금도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다시 며칠인가 지나 부품이 도착하여 교체하고 테스트를 했다.

역시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면 이제부터는 문제가 갑자기 복잡해진다. 모든 곳을 의심해 봐야 한다. 광원, 광원 콘트롤러, 로직보드, 차폐형 리본 케이블, 센서 모듈부, 서보모터, A/D 컨버터 그리고 이 모든 곳에 각자 들어가는 전원 공급단 등 다양한 부분이 대상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 남는 건 모든 유닛들을 하나씩 따로 구해서 테세우스의 배 처럼 부품들을 교체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최후의 과정엔 센서 유닛을 교체하는 상황까지 가버린다면 제조사의 센터 전용 도구, 전용 캘리브레이션 타겟, 전용 교정 프로그램 이 3가지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같은 중고 스캐너를 찾아보거나 다른 스캐너를 입수해야 한다.

타사에서 아직 발매하고 있는 필름 스캐너는 수치 스팩이 더 좋아 기대감을 가지고 실기를 잠시 받아 테스트해 본 적이 있다. 데이터를 뽑아 보니 실제 출력 품질은 제조사에서 표기한 수치 스펙만큼 되지 못했고, 필름 입자의 아큐탄스도 살짝 뭉개져서 나왔다. 스캐너 내부의 확대 렌즈 품질이 센서 해상도를 전부 받아 주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름의 평활도를 잡아줄 안티 뉴턴링 캐리어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논외다.
선택지에서 유일하게 남는 건 이마콘 플랙스 타이트 정도인데 대형 필름은 최대 2040dpi, 중형은 최대 3200dpi로 스캔되니까, 내가 사용하는 스캐너의 중형 필름이 최대 4000dpi가 되니 오히려 해상도는 이마콘이 더 떨어진다. 남는 장점은 35mm 필름 스캔할 때 더 높은 dpi, 가상 드럼을 통한 필름 평활도와 기분 (암실의 필름 확대기를 스캐너 버전으로 축소한 구조와 거의 같기에 이를 기본으로 한 아이디어와 내부 설계의 발상이 간결하고 아름답다. 게다가 필름을 스캐너에 장착할 때 쓰는 필름 트레이 라이트 박스의 구조물 위에 필름을 올리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이 좋아짐 정도인데 여기에 더해 이마콘의 스캔 프로그램인 플랙스 컬러는 정말 수백 번을 써도 쓸 때마다 최악이라고 느꼈다. 플랙스 컬러의 의미라고 한다면 어쨌던 스캐너를 구동하게 하고 필름의 데이터를 긁어오는 정도로만 봐야 할 것이고, 네가티브 필름의 컬러 렌더링 품질도 정말 좋지 못했다. 하다못해 SilverFast 프로그램에서 이마콘을 지원만 했더라도 좋은 기분을 위해 어쩌면 이마콘을 썼을지도 모른다.

결국 개선이라 할만한 선택은 있지 않았다.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쓸 수도 없다. 궁여지책으로 스캔된 이미지를 고속 푸리에 변환을 한 이후에 노이즈 패턴의 주파수를 따서 마스킹하고 이걸 다시 고속 푸리에 역변환을 하는 정도가 최선일 테지만, 그야말로 궁여지책일 뿐이고 한장 한장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효율도 너무 떨어지는 데다 이렇게 품을 들인다 하더라도 이미지의 품질이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다. 정말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쓸 수도 없다. 신품 스캐너는 있지도 않으니, 중고로 구입해야 하는데 잘 사용되어 온 중고품과 인연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운의 영역이다. 설령 운이 좋게 따라왔다 하더라도 물건 자체가 시간이 꽤나 지난 물건이고 그에 따른 부품의 내구년한이라는게 있으니, 중고품을 입수하더라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시간은 흐르고 낡아가고 늙어가며 결국 죽는다.

아마도… 비교적 높은 확률로 캐피시터가 문제겠지. 쌀알들 마냥 깨알 같이 박혀 있는 캐피시터를 하나 하나 전부 다 들여다 본다 하더라도 하나씩 추적하려면 적절한 도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어쨌던 스캔이 필요할 땐 외주로 돌리면서 틈이 날 때마다 관련 정보가 없는지 찾아보며, 제조사의 내부 엔지니어용 수리 메뉴얼도 어떻게 입수해서 찾아봤지만 내가 겪는 증상 관련으로는 나와 있지 않는 내용이라 시간만 흐르고 있다.
전원 관련은 문제가 없을 듯 하고, 센서에서 A/D 컨버터로 넘어갈 때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잖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어찌 검증할 방도도 지식도 기술도 도구도 나에겐 없었다.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A/D 컨버터의 데이터 시트와 관련 문서를 살펴보던 중 레퍼런스에서 노이즈 발생의 밴드 리미트에 대한걸 발견하고 이를 조율하기 위한 디커플링 네트워크까지 닿았다. 캐피시터 문제가 아닐까 싶은 막연한 생각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바뀌었다. A/D 컨버터의 핀 번호를 따라서 회로 추적을 하면 될까 싶었지만 여기서 멈춰졌다.

갑자기 모든 게 다 상그럽고 짜증나고 귀찮아진 것이다. 정신적으로 지친것도 있지만 몸 상태도 좋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나도 인지하지 못한 체 상대방에게 짜증내고 나선 나중에 앗차 싶어 사과하는 일이 요즘 들어 간간히 있었다.
언제나 항상 잘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을 기울여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짜증이라면 발산하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에 따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인지 하지 못한 가속, 감속, 브레이크 없이 발산되는 짜증은 문제다.

문득 댐이 터진 것처럼 감정이 소리 없이 쏟아졌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도대체 나는 왜 여기 있는가. 그저 모든 게 허망하며 의미 없다. 가치의 편린조차도 없다. 아니 애초 가치의 정의를 생각하면 이 말조차도 우습다. 애초 의미나 가치 같은 건 존재한 적도 없었으며 삶의 궤적을 만든 수많은 것들과 환경 압력, 동조 압력 등에 의해 백터화 된 관성으로 움튼 일시적 현재 상태의 중첩을 이어갈 뿐이라는 것은 아주 예전 부터 인지 했었고 겪기도 했지만,
역으로 일시적 현재 상태의 연속일 뿐이기에 그 안에서 자신이 만족하는 형태의 유희를 걸어가면 될 일 아닌가. 삶의 본질과 장난감은 닮아 있지 않은가. 라는 식으로 간간히 독려해 왔었지만, 배터리가 다 빠지고 내가 지니고 있는 그나마 몇 개 되지도 않는 페르소나 조차도 멈춰버리고, 껍질만 분리되서 왠 알 수 없는 자동인형이 말하고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괴로워하고 간혹 미소 짓는 이런 섬찟한 감각은 꽤나 간만이라 반가우면서도 괴로웠다. 언제부턴가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이후로 음악도 거의 듣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이후에서야 스피커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여차저차 해서 스피커를 고치고 다시 귀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음악을 듣지는 못했다.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숨통은 조금 트이는 느낌이다. 좋아하는 곡을 조금 더 소중히 듣는 기분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여전히 좋지 않지만, 스피커를 고치는 행위를 통해 약간의 회복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한 줌 조금 안 되는 에너지를 받아서 스캐너를 다시 바라봤다. 참으로 얄팍한 일이다.

다시 한참을 찾고 찾아 운까지 따라준 덕에 기종은 달랐지만, 마침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공유해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거도 같이 공유해줬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결정적인 상황에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어 도움을 나누는 이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의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며, 동시에 얼마나 적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기본적인 원인도 파악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초 개념도 조금 알게 되었다. 남은 건 기종이 달라 회로가 다르게 구성된 부분을 해결하면 된다. 그래서 해결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추가로 여러 포럼을 온종일 뒤적이며 다양한 말들을 목도 했다.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들, 자신이 말하면서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들, 자신의 말이 틀린 것인 조차 모르는 이들, 틀린 것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 이들, 애초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의 치명적 불순물들은 언제나 일정 비율 섞여 있기 마련이지만, 그건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 생각, 논리에 따라 걸러내고 취사선택해야 할 일이다. 애초, 이들은 각자 나름의 경험자 일순 있지만, 진짜 전문가가 아니다. 또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도 아니다. 짜증 낼 일이 아니다.

잠시 마음을 정리하고,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지를 궁리 했다. 작업의 편의성을 위해 리드를 뽑아서 쓰는 게 편하겠지만, 나는 왠지 정확히 크기가 맞는 표면실장형 캐피시터를 쓰고 싶었다. 다만 국내에선 찾기 어려워 같은 스펙에 크기가 조금 더 큰 캐피시터와 솔더윅을 주문했다. 주문 후 도착까지 4일 정도 지나 도착했다. 스캐너를 다시 뜯고 커다란 센서가 장착된 보드에 접근해서 해당 부품을 살펴봤다.

겉보기엔 이게 문제가 있다고 상상하는 게 불가능 할 정도로 세상 멀쩡해 보인다. 조심스럽게 부품을 떼어냈다. 캐피시터에 열을 오랫동안 가해서 좋을 일이 별로 없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열로 작업하고 싶었지만 표면실장형 타입을 인두로 작업하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그냥 리드선 타입으로 할껄…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이지 않는다 한들 내가 알고 있기에 결국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위로하며 새끼 손톱 1/8 정도 크기의 부품 1개를 새로 달았다.

간단하게 정리하고 스캐너에 전원을 올리고 초기화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이후 필름을 넣어 스캔했다.

이 조그맣고 거대한 세계의 안에, 겉보기엔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 고작 새끼 손톱 1/8 정도 크기의 50원 짜리 부품 1개 였다.

결국 증상은 개선 되었다.
아니 완벽하게 고쳐졌다.

원인을 찾고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과정을 치러오는 동안 적지 않은 시간, 생각, 과정, 정신적 에너지 그리고 돈이 들었다. 심지어 겉으로 보기엔 세상 멀쩡해 보이기에 이것이 원인일 거라 판단하기 쉽지도 않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도착한 장소엔 새끼 손톱 1/8 정도 크기의 50원 짜리의 것이, 이 전체를 쓸 수도 버릴 수도 없게 만들며, 전체를 고치게도 하고 전체를 망가지기도 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을 길게 목도 했다.

문득, 인간의 복잡한 마음이나 격류에 휩싸여버린 감정의 원초적 시발점도 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 터이다. 그러나 나의 망가진 부분을 길게, 깊게, 파고 들어간 끝에 마침대 찾아 낸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렇게나 작은 것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기원전

지혜 없는 힘은 결국엔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 기원전 로마 제국 시인,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8년 전 일기

계속 만들어 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구석 깊은 곳에서 끈질기게 남아있다.
그리고 이 감촉은 자해에 가까운 느낌이다.
끝내지 못한,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 작업으로 난 다시 돌아갈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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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진행하고 있는 작업의 맥락 속에서, 단 한가지 주제로 다양한 사람들을 계속 촬영 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간 이런 시간이 올거라 생각 했던 때가 예상 보다도 빨리 왔다. 촬영할 수 있는 때가 몇 번인가 있었지만 아버지를 촬영 하는 것을 나는 구태여 뒤로 물려두고 있었다.

덩어리진 무색무취의 연기를 스윽 하고 빨아당기는 감각이 올때까지 마치 아무런 일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때, 나는 촬영을 했다. 촬영 하는 동안 나의 뇌속에는 수십개의 생각들이 얽히고 얽혔지만 그와 동시에 촬영하는 나는, 명확하게 분리 되어 있었다. 보통은 자각 할틈도 없는 것이 보통이지만, 간혹 나의 뇌와 촬영하는 내가 명확하게 분리되는 감각을 자각할때가 있는데 때론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해지거나 어떨땐 스스로에게 어떻게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을 만큼 소름이 돋기도 한다. 이런 감각은 나에겐 불쾌하게 느껴진다.

2주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아버지와 오늘 봤던 아버지는 그 짧은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뜻 연한 자락 같은 죽음의 냄새가 명확하게 인지 된다. 세포의 텔로미어가 거의 소모되어 개체로서 남은 수명을 수치로 환산 할 수 있을 정도의 엷은 죽음에 이미 먹혀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노출을 맞추고,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고 촬영을 한다.

이 작업이 도대체 몇년 안에 끝날 수 있을지 난 감이 오지 않는다. 아니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도 감이 오지 않는다. 설령 어떻게 크기를 조정해서 만들었다고 한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도대체 어느 곳에 어떤 식으로 어떻게 전시 될 수 있을지 아니 그 이전에 누가 이 작업을 받아 줄지 조차 나에겐 감이 오지 않는다.

계속 만들어 가는 것 외엔 달리 내가 할 수 있는건 없다.

토니가 이름을 말하면 상대는 묘한 표정을 지었고 그중에는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귀가 잘 안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크게 집중하지 않고도 18.5kHz 부근까진 어렵지 않게 들렸고 청취 환경이 좋을 때는 19kHz 근방까지도 무리 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먹먹한 느낌과는 다르고 그렇다고 높은 주파수대의 소리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닌, 16~17kHz 근방 부터 정말이지 이상하고 기묘하게 잘 들리지 않는 대역이 생겼다. 아… 그렇군.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건가. 한편으로는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앰프나 스피커가 금빛 페로몬을 풍긴다 한들, 비자발적으로 오디오를 바위 보는 듯한 삶이 되어버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리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빈티지 앰프나 스피커에서 나오는 몽글거리는 소리로 만족한다던가 아니면 엄청난 댐핑 팩터에서 나오는 돌덩어리 같은 단단한 저역이 직접 가격하여 내장이 움틀 거리는 식의 음악을 듣는다던가 하는 정도일테지.

2.3초와 4.7초의 무한한 침묵 속에 펼쳐진 끝 모를 암흑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도사리고 있는 고요함의 자리에서 가만히 눈을 감은 체 암흑을 깊이 응시하는 그런 경험은 이제 나에겐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래… 이젠 이런 것에 어리광 부릴 시기는 지나버린 건지도 모른다. 삼십 년 넘게 신세진 푸가의 기법 제1콘트라푼투스도 평균율 클라비어도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무반주 첼로도 정말 몇 안 되는 유일한 안식처였기에, 그 안에서 침잠된 찰흙 덩어리를 보는 응석을 부렸지만 조금은 건조하게 들어도 큰일 날 일 같은 건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갈려 나간 끝에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진다. 경계 없는 우주 조차도 엔트로피의 증가로 종국엔 열평형 상태가 될 것이다. 단지 그뿐이다.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지만 그럼에도 얼마간 마음이 울렁거렸다. 1년 전 이사한 낮의 작업실은 외부의 자동차 궤적 소리가 항상 귀를 시끄럽게 하기에 어차피 제대로 음악을 듣지 못했다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적당히 마음을 땜질했다.

어느 새벽, 물을 가르는 궤적 소리조차 없이 온 세계가 물 속에 잠긴 듯한 고요함에 음악을 듣고 있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의자에 일어나 이동하던 중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17kHz 대역 근처에서 분명하게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오래도록 몇백 번이고 들었던 음악이다 보니 너무 조용한 탓에 뇌가 착각 해서 환청을 들었거나 뭔가 그런 종류의 것일 테지. 단순한 기분 탓일 터다. 물을 마시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역시 예전과 같은 느낌으로 소리가 섞여 잘 들리지 않는 익숙한 상태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났다. 언제부턴가 음악을 잘 듣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낮에 들리는 대로변의 자동차 소리는 내 신경을 마구 긁고 있었다. 세상 모든 자동차가 전기나 수소차로 바뀌면 좀 조용해질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바퀴 구르는 소리는 날 것이며 애초 인간이 모여 있는데 조용할 리 없다. 귀는 맛이 갔는데 소음은 어째서 더 크게 들리는가. 휴일 새벽 시간만이 유일하게 마음을 뉘일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점점 음악은 듣지 않게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몇 달이 지났다. 우연히 앰프에 전원 끄는 것을 깜빡했었는지 앰프에 들어온 전원 LED가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침 새벽이었다. 간만에 음악을 틀어보자 싶어 셔플로 적당히 아무거나 틀었다. 담배가 다 떨어져 편의점에 가려고 몸을 움직이던 중 역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스피커 트위터에 귀의 높이를 맞췄더니 소리가 들린다. 반대쪽 스피커에도 똑같이 했더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앰프가 맛이 갔나? LR 케이블을 반대로 물려봤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스피커 쪽이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스피커 네트워크는 어지간해선 망가지진 않지만 모를 일이다. 일단 여기서 멈추고 엷고 긴 한숨을 쉬었다. 담배를 사러 편의점엘 갔다. 작업실 아래 인도에 있는 새벽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너덧 대 정도 피웠다. 파란색으로 가득 찬 곳을 벗어나 물을 마시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스피커는 그대로다. 음악도 듣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좀체로 회복될 기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나를 홀려버리게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꾸준히 긴 시간을 끈질기게 공들여 마침에 홀려 저버린 사람처럼 스피커를 뜯었다. 유닛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좌우 유닛을 스왑 하던 과정 중에 압착 스플라이서의 고정 부위가 부러진 것을 발견했다. 어쩐지 너무 쉽게 빠진다 싶었다. 접촉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테니 소리가 나지 않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스피커 유닛을 테스트 했는데 처음엔 소리가 나는 듯 했으나 나의 착각이었다.

국제 시장에 나가 부품 파는 곳 다섯 곳을 거쳐 겨우 압착 스플라이서를 샀다. 기껏해야 예비용까지 해서 3~4개면 되지만 그렇게 소량으로 파는 곳은 없다. 죽을 때까지 써도 전혀 줄어들 것 같지 않은 갯수의 스플라이서를 샀다. 갑자기 무척 피곤해졌다. 다시 하루가 지난 뒤 케이블 피복을 벗기고 압착 스플라이서를 달아주고 스피커 유닛에 결합했다. 스왑을 한 유닛에서 제대로 소리가 난다. 다행스럽게도 네트웍이 망가졌다던가 케이블의 문제는 아니었다. 유닛을 다시 고정하고 스피커를 조립했다.
새로운 유닛을 주문했다. 형식번호가 같은 유닛이 중국에서 팔고 있어서 아주 잠깐 생각했지만, 제조사에 연락해서 정품 유닛을 주문했다. 며칠 후 도착한 유닛을 스피커에 다시 달아주고 테스트를 했더니 볼륨을 조금 올리니까 19.3kHz까진 들린다. 스피커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나의 귀도 다시 살아났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망가지거나 부서진 부분을 뜯어내고 교체하거나 고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내가 왜 스피커를 갑자기 고치고 싶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금전적, 시간적 이익 그리고 효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때론 망가진 것을 그저 무턱대고 고치려고 애쓰는지 알게 되었다. 망가진 물건을 고치는 영상들을 간혹 왜 그리 멍하게 보고 있었는지도 알게 된 것이다.
Pair 짝, Re 다시. RePair 다시 짝을 맞추는 일. 다시 짝을 맞춘다는 말이 가능하려면 같이 있었던 짝과 단락 되거나 망가졌다는 것이 전제된다. 다시 연결하는 것, 서로가 통하도록 하는 것.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

첫 테스트 음악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DNA 를 틀었다. 일반적으론 숨이 꾹꾹 막히는 적막함을 일으킨다 한다면 확실히 인지 할 수 있게 혹은 친절하게, 노골적으로 잔향 배경음과 노이즈를 제거할 법 하지만 음질, 음색 그리고 구성미에 있어 세상 까다로운 이 예술가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15.3 kHz~16.1kHz 대역에 굳이 노이즈를 넣었다. 이것은 마치 무척 얇아서 투명한 것처럼 잘 보이지 않지만 빛에 비춰보면 거친 선이 보이는 주사바늘을 피부에 찌르는 것도 아닌, 마치 바늘 끝이 레코드 판을 읽어 가는 처럼, 가늘고 선명하게 피부를 쓸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를 톤 변화 없이 일정하게 넣었다. 그리고 16.3 KHz에서 22kHz 영역엔 환경음을 사막의 습기 하나 없는 매우 고운 모래를 다시 한번 갈아서 투명한 면사포를 씌워두듯 얹어두었다. 메인 멜로디와 함께 이렇게 고역 노이즈를 아주 작은 크기의 소리로 굳이 일부러 넣어두어 마음과 목구멍이 소리 없이 구우우욱- 하고 옥죄이며 허파에 남은 산소가 점점 부족해지는 느낌이 드는 소리,가 다시 들리게 되었다.

이것은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나쁜 것인가.

UnderTale

380만 년의 외로움

지금으로 부터 11년 전 영화 Her가, 지금 이 순간 현실이 되었다.
영화에서처럼 카메라를 통해 사물을 분류, 인지 그리고 인식하는 것은 물론이다.

1999년 6월 소니에서 세계 최초 애완용 로봇인 AIBO가 나왔다. 단순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또 한편에선 정서적 감정을 투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수리할 수 있는 부품들의 마지막 재고가 드디어 바닥이 나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들은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 거의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정서적 연결이 오래 지속된 애완동물에게 하듯 AIBO 에게 장례식까지 치러 주는 사람도 많았다.

단순화된 개의 모양과 조금 닮아 있는 플라스틱과 모터 그리고 전자부품의 조합으로 된 AIBO에 대한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재는 관계의 그림자’ 라는 사유는 여기에서도 통한다.

아직까진 외형적 모습은 조그만 직사각형 유리에 갇혀 있지만 그 유리에 붙어 있는 안구는 세상을 인식한다. 내부에서는 Ai의 기본 원리인 행렬 연산과 분류기와 가중치 연산 그리고 이를 기억할 메모리 정도의 기본적인 것뿐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Ai가 뱉어내는 아웃풋에 맥락을 겹칠 수 있게 되면서 우리가 ‘소통’이라고 부르는 감정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애초 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비슷한 부류들에게마저도 이는 강렬한 감정적, 정서적 경험이 될 것이다. 우리는 더 행복해질 것이며 외롭지 않게 될 것이며, 고독해진 줄조차 모른 채 더 고독해질 것이다.

아니다. 애초 우리는 항상 외로웠고 앞으로도 영원히 외로울 것이다.

희망이라는 덫. 희망의 조금 다른 말은 가능성. 다른 말로 자신의 바람이라는 덫.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 가능성을 잃은 미래만 남는다면 현재가 있을 의미가 없다.

그와 동시에 현재가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다.
결국 희망 그 자체는 현재엔 있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희망의 유사어인 바람이라는 단어 속에는 변화라는 단어가 함께 포함 되어 있다.

현재의 자신이 환경압력이나 동조압력에 의해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다른 결과를 바라지만 같은 결과를 반복한다. 예를 들어 가족 관련의 일들은 대체로 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같은 결과를 십수 년 넘게 반복한다. 간혹 확률의 우연으로 다른 것이 튀어나오더라도 이는 결국 평균 회기로 수렴한다.
변화가 동사로서 작동한다면 다른 미래를 생각해 봄 짓 하지만 꽤나 많은 경우엔 동사로서의 기능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의 바람일 따름이다.

희망의 조금 다른 말은 가능성임과 동시에 바람이기에 이것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사건이 확정되지 않아 확률로 존재하는 지평을 미래라고 한다면 그 순간 미래는 리스크가 된다. 애초 변화 그 자체가 리스크다.
현재 상태에 의해 확정된 예정 조화를 따를 것인가, 리스크를 감당하고 동사로서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는 자신의 연령, 유전자, 살아온 과정 중에 겪은 일들, 현재 상태에 만족도, 행복감, 성취감, 경제적 상황 등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중에서도 고통의 한가운데의 있는 이가 견뎌내지 못할 경우, 즉 존재 자체에 유무가 관련될 경우 선택 혹은 변화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하루하루를 절실하게 살아간다.
또는 삶의 관성이 거대해지며 동시에 오래되어가는 과정 중 몇 가지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내면화 하면서, 현재 상태에 만족하는 이가 동사로서의 변화를 희망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미래는 현재를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관측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없어서는 애초 현재, 미래 같은 단어는 들어올 수조차 없다.

희망을 잃은 미래만 남는다면 현재가 있을 의미가 없다.
미래라고 해도 어차피 현재와 이어져 있다.
현재를 잃으면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능성을 잃은 미래만 남는다면
현재가 있을 의미가 없다.

덫의 완성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네 삶이라는 것은 덫을 피하기도 하고, 때론 덫인걸 알면서도 정면으로 들어가 물리기도 한다. 피하던 물리던 그에 대한 청구서는 시간차를 두는 한이 있더라도 꼬박 꼬박 온다. 그런 행위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거의 대부분이 찢겨 나가고 뭉개지고 갈려나가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간혹 사라지지 못한 채 콩알만 한 것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르고 있다.

8미터

꽃과 담배를 들고 길에 나섰다. 오늘은 어머니의 기일이다.

지금껏 제대로 이 날을 챙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할 수 있게 되었느냐고 한다면 꼭 그렇진 않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것에 대한 매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닿기 위해 긴 시간과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완성에 가까웠으나, 결과적으로 그 매듭은 사라졌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 했다. 세상 흔한 말인 만큼 그 마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소위 깨달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들이 세상엔 꽤 많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세상이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세상이야 어찌 되었든 적어도 나의 경우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 명하는 형식미에 따라, 적어도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방식은 불가능했다. 힘들고 아프기에 때론 몸을 마음을, 시간을 떼어낸 체 도망치거나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다시 제자리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영원한 형벌처럼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아니면 노을이 진 어느날 골목과 골목 사이로 밥 짓는 냄새가 올라올 때 엄마가 밥 먹으라며 부르는 목소리에 가지고 놀던 공이며 장난감이며 친구들을 내려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상처가 상기시키는 반복적인 알람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며 아물지 못한 채, 마치 환상통처럼 원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사라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엔 마치 있는 것처럼 실감 나게 욱신거리는 기묘한 감각은 나의 의지 따위와는 무관하게,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때론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고통이 들어올 땐 잠시 눈을 돌린다고 하더라도 나의 의지나 희망이나 바람과는 무관히 계속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렇기에 결국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있을까.

작년 가을에 이와 관련한 전시를 하고 책을 만들었다. 그 이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고 그에 따른 나의 정신적 상황과 처신으로 인한 약간의 문제가 생기기도 했는데 그것이 해결되기 보다는 적당히 뭉개진 형태로 틀어막은 것처럼 되었다. 누굴 탓하랴. 그렇게 해를 넘어 기어코 어머니의 기일은 점점 다가왔다.

마음을잡지 못한 체 구정 일주일 전 어머니의 남동생, 나에겐 외삼촌에게 찾아봬도 되겠냐고 연락했다. 외삼촌에 대한 죄의식을 외면하기에 어려웠지만 외삼촌은 거대한 검붉은색의 조용한 바위 같은 사람이다. 적어도 싫다고 할 사람은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다. 구정 하루 전에 보기로 하고, 하루에 버스가 3번 운행하는 곳에 도착했다. 차로 두어 시간 거리지만 여기에 다시 오는 데는 십 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세월이 흘러 외삼촌도 검붉은 커다람의 사이와 사이엔 조금씩 깨져나가고 갈라진 틈새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 사이로 조용히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조금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 자식이 죽은 줄도 모르는 치매 상태인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인지능력 상실 상태의 외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외할머니의 꼬깃꼬깃 접힌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문득 맥락 없는 작고 따뜻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외삼촌은 나에게 밥을 먹이고 싶어 했다. 그것이 어떤 마음에서인지 모르지 않았다. 밥을 먹고 아무짝에 쓸모없는 이야기들과 외삼촌의 그간 신변에 관한 일들, 외할머니의 일들, 시골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그리고 누나의 관한 이야기들, 외삼촌이 나에게 했던 말 중 경찰과 법원에 드나들던 당시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말했던 이유에 관한 말들, 누나가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을 줄은 몰랐었다는 말들, 그리고 이런 아픔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어서 누나도 기뻐하셨을 거라는 말들.

나는 외갓집에서 잠시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 주변을 돌아보니 딱히 바뀐 건 없었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었다. 하지만 외삼촌이 나를 조금 용서해 주셨다는 것은, 나를 조금은 받아들여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갓집에 가는 결심을 하는 것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나의 용기에 비하면 외삼촌의 용서의 크기는 감히 헤아리기 힘들었다. 곧 기일이 온다는 말을 했다. 어디에 뿌렸냐고 하시기에 차근차근 알려드렸다. 뿌린 장소를 주의를 기울여 귀에 담아두셨다. 그리고 나는 기일에 꽃과 담배를 챙겨 갈까 합니다. 라고 했다.

버스 막차 시간이 되어 인사를 나누고 작업실에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인가 지나고 꽃과 담배를 주섬주섬 챙겨 배회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한 밤의 길 위에 나섰다.
나와 바다와의 2차원 직교 좌표계의 차이는 8미터 였다.

구원

어느 배우의 자살과 정황 그리고 일련의 과정들과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이것이 우리 현재의 무엇을 말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읽던 중에 다음의 문장에서 나는 한참을 멈췄다.

”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를 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 사람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는데 그때의 구원은 쌍방향적인 것이다. 용서받는 자도 구원받고 용서하는 자도 구원받는다. 근데 이때 중요한 것이 참회의 행동이다. 참회라는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 죄과를 보다 엄중하게 물을 수 있다.

그가 구원받지 못하게 된 처지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

나는 잠시간, 저 말이 가지는 원래의 의도와 맥락에서 분리하여 글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매듭을 묶고 싶었던 나는 그 매듭을 묶을 끈을 만들기 위해 무척 애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매듭을 묶을 때 쓸 끈이라는 것 자체가 나의 과욕이었을까.

그저 몇 가지 필연과 우연이 겹친 것이겠으나, 이것의 감정적 형태의 모습은 나에겐 어둑한 밤길을 걷다 고속으로 돌진하는 고장 난 자동차에 덮쳐진 것 같다면 과장일까. 그래 뭐 아무렴 어떻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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