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er

.

Jai guru de va Om

그래. 이런 사랑도 있었지.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깊은 침착함과 고요가 내면에 자리 잡는다. 긴장을 풀고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다. 아무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새로는 성질과 차원의 사랑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생물학적인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친밀함에 가장 근접한 사랑이다. 내가 친구사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이유는 \’고정된 관계\’라는 말속에서 사람들이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홀로 있지 않으려고 애스는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인생은 근본적으로 혼자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홀로 있다는 것을 잊게 해주는 게 아니라 홀로 있음을 인식하는 일이다.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진정한 사랑에 좌절이란 없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하지 않은 사랑에 충족감이란 없다. 그 안에는 뿌리 깊은 기대감이 있어서 무엇이든 부족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 기대감은 너무나 커서 아무도 충족시킬 수 없다. 따라서 진실하지 못한 사랑은 언제나 좌절을 불러온다. 진정한 사랑은 늘 충족감을 느낀다.

사랑은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기 보다는 함께 느끼는 것이다. 사랑은 종종 어렵고 힘든 일일 수 있다. 어렵고 힘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따금 무관심일 수도 있다. 무관심한 것이 도움이 된다면 무관심해야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또한 몹시 냉정한 것이기도 하다. 냉정할 필요가 있으면 냉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필요하든지 사랑은 그것을 배려한다. 지나친 간섭을 하지 않는다. 가짜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다. 독이 되는 관념을 실현시켜 주지 않는다.

– 오쇼

특별한 것 없었던 평범한 하루 였다.

무척 무더운 날씨다. 천천히 걸으면 느슨한 땀이 속눈썹을 타고 눈물샘으로 들어가고 끈적한 등을 타고 흐른다. 사진을 몇장인가 찍었다. 되도록 f5.6 이상 조이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미끌거리는 미지근함을 풍기는 풍경이 너무나도 평범하게 널부러져 있는 곳을 사십분 조금 넘게 걸어 출구로 나왔다. 출구의 마지막엔 정말 희안한 것이 나를 보며 웃음 지었다. 그것은 마치 악 같았고 생명 같았으며 감옥 같았고 장난감 우주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꽃이 아니었다.

십 몇분 가까이 몇십컷을 찍었지만 도무지 그 느낌이 나지 않는다. 찍으면 찍을수록 그 느낌에 분명히, 확실하게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새겨가듯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찍어도 그 완전한 느낌에 다가 가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은연 중에 느끼고 대략 이런 느낌이었던거지, 라며 마지막 셔터를 눌렀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일 첫번째 컷과 마지막 컷, 이 둘이 어쩐지 더 좋았다.

파랗고 누런, 선명한 하늘 빛이 만들어낸 거대한 여름 잎사귀의 표면은 이름 모를 벌레가 철두 철미하게, 심지어 어떤 규칙성을 짐작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방에 구멍을 내 놓은 형태로 투과된 태양빛이 만들어 낸 것은, 마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남자의 어떤 상이 떠올랐다.

그늘 밑에 들어서면 제법 시원하다. 바람이 불고 얇은 나의 반발티의 속을 헤집고 지나간다. 텁텁하고 상쾌한 기분이 동시에 인다. 음악은 Presence 로 시작하여 베토밴 9번 4악장의 중반부를 넘어설때 쯤 식당엘 들어갔다. 손님은 나 외엔 없었다. 조용하고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온다.

중앙의 자리에 앉고 내부 전체 공간을 몇초간 훑으며 메뉴를 고르고 주문을 한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어째 물을 주지 않는다. 셀프인가 싶어 찾아봤지만 그런 이야기는 없다. 조금 목이 말랐지만 왠지 귀찮아졌다. 실내를 살짝 돌아보고 다시 자리에 앉은지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트레이에 주문한 음식이 담긴 채 테이블에 놓였다. 나를 왼손잡이로 생각 한 걸까, 숟가락과 젓가락이 왼쪽에 놓여 있다. 다시 오른쪽으로 옮기려는데 나무 젓가락이 젖어 있다. 게다가 물에 오랫동안 넣었거나 건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걸까, 검은색의 얼룩의 형태를 봤을때 그 젓가락이 어느 정도의 수심에서 오랫동안 있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쌀은 탄력이 떨어지고 풍미가 엷다.
기억 나는 건 바질 향 정도.

값을 치르고 다시 길에 오르는 중
땡볕속을 천천히 한걸음씩 걸어내어가며 담배 한대를 전부 태워낸 꽁초를
땅에 무단 투기 하고 발로 밟하서 끈 것을 확인한 후
다시 하수구에 착실히 꽁초를 밀어 넣었다.
쓸쓸했다.

이어폰을 다시 귀에 쑤셔넣고 음악을 resume 했다.

오, 벗들이여! 이러한 선율이 아니오!
우리들은 좀더 기쁨 노래를 부르자
환희에 넘치는 노래를!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과 같은 빛남,낙원의 딸들이여,
우리는 광휘에 취해 천사의 성역에 발을 들여 놓는다!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것들을
신비로운 당신의 힘으로 다시 결속시켜 놓으리라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어라,
당신의 온유한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눈이 무겁다.

희안하게도 육년간 제대로 된 태풍은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태풍이 올때마다 갔었던 그 곳은 이젠 다른 곳이라고 해도 무방하게 되어버렸다.

올해는 과연 태풍이 올까. 설령 온다고 한들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그리고 누구와 함께 갈 수 있게, 될 것인가.

끝이 보이질 않았고, 하루 하루 나를 죽여가며 마지막 숨통을 끊어가고 있었다.

목표도, 바라는 결과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헤메이다가 혼자 외롭게 쓸쓸히 썩고 말라서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무엇을 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엇을 한다라는 느낌 조차 들지 않는 곳에서 필시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을 할 뿐.
나에게는 너무나도 가치 없고 나약하게 만들어진 질이 잘든 약간의 도구가 나의 전부일뿐.
죽음의 직전에 나를 지탱케 하는 사람이 있음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계속 하고 그렇게 의미 없는 것을, 애매한 것과 모호한 것을 악착같이 갈망함에
나는 푸념하지 않으리.

白虎野의娘

먼 하늘 둥글게 날리는 꽃의 떠들썩함에 그 날과 그 날을 넘어온 분기가 눈을 뜬다
아지랑이에 몸을 빌려 길을 가리키는 처녀를 쫓아
높은 곳에 나타난 이름도 모르는 광야는 그립게도

그것이 꿈에서 보였던 거리라고 그림자가 속삭였다
올 날도 올 날도 몇천의 분기를 넘었을 때
어두운 곳의 현인이 버린 날들을 모아서
바닷가에 바닷가에 이름도 모르는 불꽃을 피웠다


용암이 요설에 불을 뿜어올려 버려진 들판에 선 사람을 축복해
고요한 고요한 처녀의 시야에
본 적 없는 도시에 등을 밝힌다

높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타오르는 불 같은 구름 모양
그 날과 그 날과 그 때에 잃어버린 길을 보이고
반복되는 꿈-에 부는 바람을 쫓을 때를 지나
강가에 강가에 본 적 없는 더없는 행복의 꽃을 본다

용암이 요설에 불을 뿜어올려 버려진 들판에 선 사람을 축복해
고요한 고요한 처녀의 시야에
본 적 없는 도시에 등을 밝힌다
용암이 요설에 불을 뿜어올려 버려진 들판에 선 사람을 축복해

고요한 고요한 처녀의 시야에
본 적 없는 도시에 등을 밝힌다

취함을 마셔라, 사람들이여,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여, 아름다운 잔이여.
취함은 어찌하여 무한과 아름다운 잔인가.

.

꽃이 피었어
꽃이
꽃이 피었어
심하게 바람에 떠는
누구도 본적 없는 꽃이
피어있었어

꽃이 피었어
꽃이
꽃이 피었어
심하게 바람에 떠는
누구도 본적 없는
꽃이 피어있었어
아마

꽃이 꽃이 피었어
꽃이
꽃이 피었어
본적 없는 꽃이 피어있었어

꽃 같은 거 없어
그건
있을 리도 없다고
생각했더니
했더니 그랬더니

했더니 꽃이 있었어
누구도 본적 없는 보일 리도 없는
필 리도 없는 꽃이 피었으니
거기에 역시
거기에 분명히
거기에 거기에 있어
꽃이 피었어
꽃이
꽃이 피었어
심하게 바람에 떠는
누구도 본적 없는 꽃이 피어있었어

시작 부분을 보곤 일단 멈췄다.

그 사진들은 내가 스물 한살때 찍힌 것들이였다.
Plus X 필름, Nikon F2에 105mm 렌즈물려서 찍은 것이다.
현상은 노멀, 2스톱 오버 노출.
난 이것이 참 좋았다.
Nikon F2는 4년전 로스 엔젤레스의 전당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 사진가는 지난 주까지 샌 프란시스코에서 살았었다.
그는 내가 만난 최악의 사람이었다. 혹은 어쩌면 최고였다. 어느 쪽인지 아직 확신 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의 실수로 부터 배울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내가 만든 최고의 실수였다.

그는 나에게 장대한 장관이였고 소중했던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의 기네비어였다.
그게 무슨 뜻이였던.

소름

키보드 근처에서 모기가 힘 없이, 정신 없게 낮은 높이로 왔다갔다 하길레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딱 하는 소리가 들리고 손가락엔 모기의 몸뚱아리가 통채로 짓이겨진체 선연한 붉은 핏자국과 비늘 같은 것이 가루처럼 붙어 있었다. 휴지로 암놈 모기를 닦아내고 책상을 보니 아주 선명한 붉은 피가 \’퍽\’ 이라는 단어를 그림으로 그리듯 말라붙어 있었다.

감도를 400으로 올리고 60분의 1초로 맞춘 한도 안에서 최대한 조리개를 조여서 핏자국을 두컷 찍었다.
첫번째 컷은 핏자국을 살짝 전면에 맞춘것이고 두번째 첫은 핏자국의 몸통에 맞춘 것이다. 휴지로 남은 핏자국을 닦아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저기 내 등 뒤에서 보고 있다.

고양이와 개의 시간

삶 전체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변하게 된 일이 두번이 있다.
어떤 이유나 근거는 없지만 몸 전체를 관통하듯 지나가는 직감 같은 것이다. 나는 그곳에 가야만 한다.

주변에 아무런 말 없이 실종된듯 사라지고 간 곳은 땅끝 마을이었다. 여인숙 같은 모텔에서 매일 저녁 싸구려 위스키 한병 통채로 몇번만에 둘러마시고 필름이 끊어진적이 있었다. 몇일 후 필름을 현상 해보니 그 와중에서도 뭄을 가누지 못해 바닥에 걸린채 카메라를 꺼내서 이빨을 파랗게 드러내고 소리를 지르는 짐승의 셀프 포트레이트가 찍혀있던 것을 보았다. 다음날 산에 올랐다가 해가 지기 전에 하산 하려던 중 다리의 모든 근육이 풀리고 단 한방울의 힘도 남아있지 않게 된체 그대로 카메라 가방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졌다. 시간이 흘러 사방은 차츰 어두워지고 어디선가 짐승과 새의 울음이 들린다. 어쩌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온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 보았지만 다시 고꾸라졌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질질 끌리듯 오랜시간 팔로 기어서 대로에 왔을땐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저 멀리서 보이는 불빛만 보였다.

두번째는 오다이바의 대관람차였다. 그 전까지 해외 한번 나가보지도 못했고 그럴 형편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이상하게도 나를 인도하듯 그곳에 가게 되었다. 막상 관람차 안에선 아무 일이 없었고 그곳을 벗어나 돌아가는 열차 플랫폼의 구멍 뚫린 스틸 의자에서 다시 한번 변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세번째가 왔다. 그곳에 갈땐 태풍이 불면 제일 좋고 비도 좋다. 그 곳에서 어떤 내가 튀어 나올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가야만 한다. 선택은 커녕 도망칠수도 없다. 나의 직감이 그리 말했다.

태풍이 온다고 했다. 일본 기상청의 태풍 진로 예측은 학창시절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태풍의 진로 방향 원리의 도식도 처럼 우아한 커브를 그리며 도쿄만을 향했다. 동생의 도움으로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받고 몇일 동안 작업실을 비워둘 동안 해야 할 일을 하루만에 모조리 해치웠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일과가 끝나고 카메라 가방을 고르고 렌즈를 골랐다. 좀체로 잠이 오질 않는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겨우 한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십여일간 매일 같이 몇건씩이나 계속 되는 나쁜 우연으로 심신이 거의 걸레가 된 몸을 질질 끌고 아침 8시 55분에 오는 리무진 버스를 정류장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정류소에는 누군가 묶어 놓은 철제 바구니가 달린 녹슨 자전거가 있었고 그 바구니엔 곱게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휴대폰으로 기상청을 다시 확인해보니 태풍 진로도의 그림은 도쿄만 앞에서 어쩔줄 몰라하듯 왔다 갔다 하다가 멈춘듯 보였다.

그곳에 가기 까지 모든 조건을 쉼 없이 클리어 하고 신주쿠로 가는 기차의 유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아.. 비 다.\’ 라고 되지 못한 소리로 말했다. 신주쿠 역에 도착하니 태풍의 비는 아닌 일상과 비일상 사이의 비가 왔다. 소리, 풍량, 풍향, 무게, 강수량 모든게 마치 나를 위해 준비 된것 같았다. 어서 오라고. 우산을 사기 위해 플랫폼을 뒤졌으나 쉬이 보이지 않는다. 루미네 건물 안쪽까지 봤으나 우산 파는 가계는 보이질 않아 조바심이 생겨 바로 비를 맞고 가려고 하니 30미터 쯤 거리에 복권과 신문을 파는 손바닥만한 가계가 보여 부산한 인파속을 뚫고 도착하여 우산을 사고, 한달음에 신주쿠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오후 4시 8분.

입장권을 사기 위해 자판기를 보니 전부 꺼져있고 게이트도 막혀있다. 순간 너무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는데 육십은 넘어보이는 공원 관리인이 패장 시간이 4시라고 한다. 여권을 보여주며 여기를 오기 위해서 한국에서 왔다. 라고 하니 아무튼 안된다고 한다. 어떻게든 꼭 가야만 한다 라고 말해도 그런건 난 모르겠고 아무튼 안된다는 말을 반복한다. 나의 인생이 걸려 있는 문제다. 꼭 들어가야만 한다. 라고 했지만 게이트에서 물러서라고 한다. 그제서야 내가 게이트의 선을 넘었고 그제서야 부저가 울리는게 귀에 들렸다. 여기서 조금 더 하면 경찰을 부를 태세다. 단지 8분 이였다. 융통성이 전혀 없는 육십대의 공원 관리인이다. 순간 전력을 다해 몸통으로 밀어치고 뛰어가려는 순간 억수 같은 비가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겨우 붙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체 근처에서 십 몇분 동안 서있었던것 같다. 카메라 가방의 낡은 파란색이 비에 젖어 검게 되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온 몸과 마음이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어딘지도 모를 곳을 걷다가 처마가 있는 건물 밑에서 동생에게 나를 구해달라는 문자를 보냈지만 문자가 계속 가질 않는다. 여섯번, 일곱번. 계속 해도 전송되지 않는다. 몇번인가 했을까 전송 되긴 한것 같은데 답신은 어쩐지 맥락이 틀어진 이상한 말이 오고 있다. 일 보라고 답신을 보내고 넋이 나간 상태로 한 시간 정도 걸어 전날 예약 한 캡슐 호텔을 찾아 들어갔다. 예약을 했으므로 바로 여권을 보여주고 필요한 내용을 적는데 로비 직원이 뭔가 분주하다. 노트북을 옆으로 보여주며 전산 시스템에 예약이 걸려있지 않은것으로 나온다며 다른 서류 따위의 것을 계속 찾고 있다. 그렇게 몇분 동안 이리저리 기록을 찾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예약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식의 일이 십여일 동안 매일 다양한 형태로 나를 괴롭히고 간다. 자리가 남는게 있다고 해서 다행스러웠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타월 한장과 매직으로 508 이라 적혀있는 락커룸 키를 받고 5층으로 올라갔다. 스물거리는 숫내와 암내 그리고 습기찬 공기가 뇌에 박힌다. 나무로 된 캡슐은 관 같았다. 두꺼운 커텐으로 막혀있는 입구를 열자 그 속은 적막을 졸여놓은 듯한 어둠이 있었다. 조명이 보이지 않아 머리를 먼저 들이 밀어 꼬마 전구를 켜고 앉으니 머리는 겨우 닿지 않는 정도의 높이. 습기로 눅눅한 배개와 시트의 냄새 그리고 검게된 가방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얼마간 있었는지 모르겠다. 억지로 근육을 움직여 얇디 얇은 폭의 락커에 가방과 카메라를 우겨놓고 자리에 돌아와 관속에 다시 누웠다. 저녁 6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다. 어딘가에서 영어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렸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이 떠졌다. 꼬마 전구의 빛에 눈이 아프다. 밤 12시를 조금 넘겼다. 불을 끄고 다시 잠들었다. 잠든 중간 나도 모르는 사이 울었던것 같다. 다시 잠이 깨니 시간은 새벽 3시였다.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십여일 중 가장 깊은 잠에 빠진듯 했다.

눈을 뜨니 아침 8시가 되었다. 꼬마 전구에 불을 넣고 그대로 관 같은 천장을 한 동안 그대로 보았다. 나무 냄새와 니스 냄새와 눅눅한 습기와 외국인의 냄새와 비의 냄새가 났다. 로비로 가서 핸드폰을 충전하고 진흙같은 동결 건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서네대 피웠다. 어제와 달리 조용한 비가 내린다. 기상청을 확인 했다. 표본 연구소에서 쓰는 박제용 고정 핀으로 박아놓은듯 태풍은 도쿄만 바로 앞에 계속 멈춰있다 사라졌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여기서 신주쿠 공원까지 바로 갈 수 있는 최단 루트를 찾고 가방과 우산을 챙겨 빠른 걸음으로 다시 신주쿠 공원 입구에 서는 순간

정확하게 비가 멈췄다.

우연이겠지만 이쯤 되면, 해도 해도 너무 한다라는 기분도 허탈한 웃음도 나지 않는다. 입장권 자판기에 이백엔을 밀어넣고 티켓을 쥐고 어제 그 위치의 게이트로 갔다. 그 늙은 관리인은 보이지 않고 대신 낡고 깨끗하고 넓은 부스 안에서 상냥하게 웃고 있는 여자 안내원이 날 보며 티겟은 이쪽으로 넣으시면 된다고 한다.

그 장소는 그 곳에 명확하게 있다. 그 곳으로 가는 동안 몇장의 사진을 찍었다. 신주쿠를 벗어난 곳에서도 보이는, 땅 깊숙히 뿌리박은체 일본 전역의 돈을 쉬지 않고 꿀럭 꿀럭 빨아들이는 듯한 도코모 타워가 거대한 나무 병풍 뒤에 멀리 걸려 있어 기묘한 낙차감을 만든다. 깊게 들어가니 흙과 풀 그리고 물먹은 나무 냄새가 나를 덮친다. 길목 중간 중간 몇개의 의자가 있었고 대부분 마치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건 썩은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게 비현실적으로 둘러싸인 나무와 잎들 그 사이에 썩은 의자가 조용히 바닥에 박혀 있었고 물의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확연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가까이 갈 수록 심장의 박동이 올라감을 느낀다. 길게 늘어선 끔찍한 두려움과 통증의 양단 사이를 외줄 타기로 걸어가는 느낌이다. 그렇게 한걸음씩 걷다가 갑자기 느낌이 온다. 낮게 흐르는 길목과 굽이 흐르는 뒤가 전혀 보이지 않는 나무의 벽과 목덜미를 잘라낼듯한 낮은 나무잎들을 지나고 나면 그 곳이 나올 것이다. 더 이상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오히려 주먹으로 때리듯 나의 등을 떠민다.

그 곳은 그곳에 있었고 저기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었다. 이미 비가 그치고 두꺼운 잿빛 하늘이 아무런 소리 없이 멈춰 있다. 무표정하게 담배를 반갑 정도 태웠을때 쯤 주위에 사람이 그 장소를 떠나고 모두 없어졌다. 그 순간 내 의지와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 몇년의 시간 동안 눌러왔던 모든 것들이 천천히 아래 속눈썹에 억지로 머물다가 넘처흐르는 순간 각혈 하듯 울움이 터졌다. 가방에 있던 휴지로 눈을 닦고 코를 풀고 휴지통에 버리는 것과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른 사람이 천천히 들어왔다. 어쩌면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을 저 멀리서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는 여전히 오질 않았다.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핸드폰에 들어 있는 888곡의 음악을 셔플모드로 해놓고 다음 곡 버튼을 한번씩 눌렀다. 지금 내 마음에 들리는 음악이 지금의 나를 알려 줄것이라 생각 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음 버튼을 887번 눌렀고 마지막 곡은 무슨 음악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단지 \’뭐야 이건..\’ 이라고 말했던듯 했다. 그러는 동안 남아 있던 나머지 반갑의 담배가 다 타들어갔다. 몇 시간 동안 그곳에 있었는지 계산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늘은 밝고 어두운 회색으로 명확하게 멈춘듯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야마노테선을 타고 시부야로 갔다. 지구상에서 제일 사람이 많이 건너는 혼잡한 역전 교차 건널목이 있는 그곳에 가만히 서 있으면 내 뒤에서 사람이 앞으로 사라지고 동시에 내 앞으로 사람이 다가오다 뒤로 사라진다. 그리고 내 심장 앞에는 약 30센치 정도의 자그마한 공간이 생긴다. 그리고 내가 어느 방향으로 걸으면 한쪽은 사람이 멈춰 있고 내 앞에 오는 사람은 빨리 사라진다. 몇시간이고 서서 그곳을 찍고 싶었지만 그때 마다 일행이 있어서 내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있을수가 없었다. 시부야 역전에 도착하니 살짝 해가 보인다. 날씨가 후덥지근 해지고 살짝 땀이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 앞의 30센치 만큼의 거리, 30센치 만큼의 공간. 주의 깊게 카메라 노출을 설정하고 포커스는 존 포커싱으로 하되 모처럼 초고화소의 카메라니까 회절이 심하게 생기지 않는 한도 안에서 까지 충분히 조리개를 조여놓고 그 자리에 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사람이 별로 없다. 아니, 다른 곳이라면 이것도 이미 충분히 많은 수의 사람이지만 시부야라고 한다면 너무 조용할 정도다. 침착하게 끈기를 가지고 턴이 올때마다 찍었다. 하지만 느낌이 어쩨 희안할 정도로 똑같다. 카메라 가방의 무게가 무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지친다. 하치공 동상 주위에 불편한 스텐레스 바 의자에 몸을 맡겨 앉아 쉬었다.
그때 내 옆자리에 살짝 이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앉더니 흡연 구역이 아닌데도 하이라이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이라이트를 피워서 그런지 눈 두덩 아래 언저리가 살짝 회색으로 보인다. 옷의 흐름, 색깔 패턴, 헤어 스타일까지 합쳐서 보니 짧막한 소설을 쓸 수 있을것만 같은 느낌의 여자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 나에게 휴식이 된듯 했다. 나는 흡연 구역으로 걸음을 옮겨 담배를 한가치 태워내고 다시 교차로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계속 찍다보니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이 있기에, 좋아 그럼 내가 직접 가주지. 느낌이 많이 달라지긴 하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아. 게다가 비록 태풍이 나를 피하긴 했지만 사람이 많은 곳으로 이동 하는 것 정도는 설마 뭐 어떻겠어.

자리를 이동하여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니 희안하게도 그 많던 사람들이 스폰지에 흡수되듯 사라진다. 우연이겠지. 조금 기다려 보자. 해서 10분 정도 기다렸지만 갑자기 한가한 느낌의 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다시 원래 있었던 반대쪽을 보니 사람이 굉장히 많아졌다. 할수 없군. 다시 돌아가야지. 외려 잘 되었지. 약 2~3분 정도의 거리를 발걸음을 조금 빨리 움직여 돌아갔더니 또 사람이 적어졌다. 다시 몇십분을 기다리며 사진을 찍었지만 여전히 사람이 없다. 나의 공간은 30센치가 아니라 몇 미터가 된체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고 그것이 순간 마음을 격하게 하였다. 그렇게 두어시간 넘게 있다보니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다. 다시 스텐리스 바 의자에 앉아서 넋을 놓고 있는 삼십분 동안 많은 여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많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초조하게 시계를 보는 사람, 맘 편안히 기다리는 사람, 어떻게 봐도 불륜으로 보이는 커플, 어설픈 여고생, 머리가 텅 비어 보이는 젊은 남자, 정갈하게 섹시한 멋을 낸 다리가 이쁜 여자가 책을 읽는 모습, 아무런 목적 없이 앉아있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날때 화색이 도는 모습,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도 쓸쓸한 미소의 모습, 많은 중국인 가족 관광객과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뛰다 넘어지고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누군가의 똑딱이 디카 관광 사진의 조그만 배경으로 내가 찍혀지고 있었다.

남은 이틀동안 신주쿠에 있는 집에서 신세지기로 한 동생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저녁 7시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여기저기를 돌며 근근히 사진을 찍고 오래도록 입술을 한번도 때지 않았다. 그리고 물을 마시고 계속 걸었다. 동생과 만나서 맥주를 한잔 하면서 그간 있었던 일을 �F막하게 이야기 했다. 뭔가를 이해한 듯 아닌 듯 했지만 아무튼 내가 대단히 지쳐 있다는 것은 전해진듯 했다. 집에 돌아가 잠시 한숨 돌린 후 동생과 재수씨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가고자 했던 곳은 마지막 손님을 받고 Closed로 팻말을 바꾸었다. 그래… 결국 다른 곳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중간에 슈퍼에 들려 부산보다도 싼 재대로 된 기초 식재료 가격에 한국의 구조에 대해 미적지근한 분노를 표하고 언젠가 내가 이야기 했던 맥주를 동생이 기억하고 있었는지 그 맥주를 사고 집에 돌아온뒤 샤워를 하고, 집 옥상 옆 비상구 계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 했다. 잠들기 전 차갑게 식은 그 맥주를 나에게 주었으나 마시질 못하고 약간 미지근해질때 다시 냉장고에 넣은 후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침으로 동생이 파스타를 해주기로 했지만 어쩐지 느즈막히 일어나버려서 아침은 넘기고 비계가 붙어 있는 돈까스로 점심을 먹었다. 오래되고 차분하고 미소시루가 맛있는,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곳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부부의 주말 오후 장보기에 나도 참석하여 와세다 까지 걸었다. 햇빛이 뜨거운 오후다. 돌아가는 길에 동생 부부내외와 나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소담한 주택가의 길과 학교가 있는 골목을 가고 있을 무렵, 저기 멀리서 여고생 한명이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긴 했지만 멀리 있어서 제대로 보이는지 않았기에 신경 쓰지 않고 가는데, 조금씩 형체를 알아볼수 있게 되자 신경이 쓰인다. 살짝 얇은 뿔테에 약간 새침한 느낌의 여고생인데 동생과 내가 동시에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일정하고 차분한 걸음을 하고 있었다. 꼬꼬마 여고생 주제에 주위 공간이 왜곡될 정도의 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순간 스무스하게 대화가 끊어지고 그 여고생 지나고 난 뒤 약간의 여운이 지나간 이후에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한가지 더 내가 봤던 것은 재수씨의 행동이었는데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동생도 그것을 봤고 아마 무엇을 느꼈을지 확연하게 알고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그 어떠한 티도 내지 않고 여운이 끝나길 기다린 다음 스무스 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던 부분이다. 예전 부터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경륜의 깊이와 대처 그리고 먼 이후의 일까지 고려된 세련됨이었다. 너무 더워 잠시간 휴식 후 찾고 싶은 부품이 있어 동생과 함께 스크럼 짜듯 아키하바라를 저녁 7시 넘어서 까지 돌아다녔지만 결국 구할 수 없었다. 세계의 라디오 회관은 사라졌고 아키하바라도 이젠 끝이다. 그런데 그토록 걷다 보니, 부품을 구하는 것 보다도 동생 녀석이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해준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저녁이 되어 식사와 술을 했다. 약속한 장소에 재수씨가 미리 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갓 튀긴 유부가 특히 훌륭했다. 동생녀석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재수씨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저 사람은 나에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여자지만 강한 추진력 때문에 때론 부서지고 갈려나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저 사람과 함께라면 나는 갈려나가면서도 계속 나로서 있을 수 있다. 라는 류의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었다. 어떤 이야기 인지 적어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일이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밤이 되었고 비가 내렸다. 왠지 알것 같았다. 일기예보를 보지 않아도 내일 오전까지 비가 내릴 것이라 말했다. 자기전 비상구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그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약간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동생을 본 첫날 나에게 선물 해주었던 것이 있었다. 대략 십년 전 부터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했었던 그러나 정말 구하기 어려웠던 기네비어의 DVD를 잊지 않고 가방에 챙겼다. 옛날, 제목을 처음 들었을땐 아서왕의 마누라가 뭘 하는건가 라는 식이었지만 녀석 말로는 이 영화 보면서 내 생각이 굉장히 많이 났다고 했었다. 귀국행 비행기 시간을 고려해 아침 식사 시간과 메뉴 그리고 이동 일정을 확인 후 달에 움직이는 밀물 처럼 잠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예상대로 비가 내렸다. 그런데 어쩐지 식사는 없고 동생이 옷을 입고 있다. 시간 여유가 없지만 아침에 해야 할 것을 전부 무시하면 갈 수는 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다시 신주쿠 공원 입구로 갔다. 8시 55분에 도착. 젊은 공원 관리인이 뒤에서 어슬렁 거리며 기다리고 있다. 관리인이 손목 시계를 계속 보더니 마침네 문을 열어준다. 인공위성 연동 시계 기준으로 8시 59분. 조용한 가랑비가 부드럽게 계속 내린다. 어쩐지 천천히 걸으면서 그곳에 다시 갔다. 그리곤 투명한 우산을 접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기에 다시 앉기 전까진 어쩐지 미묘 했었지만, 비오는날 다시 앉으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은 그때 단 한번 뿐일 일이고, 이미 그 시각 이후로 뭔가 변해가기 시작하고 있다고. 그리고 왜 내가 여기까지 기를 쓰고 와야만 했는지도.

이제 더 이상 나는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사라졌고 그것은 존재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직 이 세상에 미련이 많은 건지 혹은 단지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 때문인진 알수가 없다. 동생이 말했다. 7~8년 넘게 도쿄에서 살고 있고 신주쿠 공원엔 제법 자주 왔었지만 왜 형이 비오는 날 여기에 와야만 했어야 했는지 알것 같다. 라고.

담배를 몇가치 태워내고 싸고 빠르다는 간판이 걸려있는 소바와 텐동을 파는 음식점에서 동생과 함께 아침을 먹어 치웠다. 플랫폼에서 강한 포옹과 신의의 악수를 했다. 돌아서서 플랫폼의 개찰구를 지나고 몇걸음 옮기다 왠지 느낌이 이상하여 뒤돌아 보는데 나에게 경례를 하고 있었다. 뭐라 어떻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기차에 올라탔다.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바로 다대포를 갔다.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망가진 다대포를 확인하고 여러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이 또 한군데 사라진 것을 조용히 목도 했다. 진심 따위 서푼의 가치 조차 없다.

오늘 밖에서 볼일을 보고 2년 넘게 가볼까 말까 한 곳을 갔다. 예전 작업실이 있던 곳이다. 계단을 오르고 다시 올라서 들어간 곳은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었다. 아르바이트 생이 한명 있었고 주인장은 출타 중이다. 십분 정도 주위를 보고, 그래.. 이거면 됐어. 라고 마음을 먹고 나가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주인장이 들어왔다. 밍밍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똑부러지고 이야기 할때 상대방의 눈을 보며 이야기 하는 타입이다. 젊은 나이 임에도 이런 저런 일들을 겪은 얼굴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 밖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비의 형태다. 소리, 풍량, 풍향, 무게, 바람, 강수량 모든게 마치 나를 위해 준비 된 것 같은 비가, 그곳에서 내려야 했었을 것이 이제야 내린다. 소리 없이 번개가 치고 2-3초 후 천둥이 울린다.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 온다. 이제 여기를 떠나야 한다.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진심인진 가늠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반 이상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위안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어폰을 귓구멍에 처박고 셔플로 음악을 틀었다.
그러자 늘어지는듯 부드러운듯 숨찬 위무의 목소리로 Nina Simone가 Here Comes The Sun을 부른다. 그곡이 끝나고 John Lennon의 Love가 나오고 그 곡이 끝날때 쯤 작업실 입구의 두꺼운 철문을 열었다.

© Wonzu Au / No use without prior permission other than non-commercial use. / 비상업적 용도 이외의 사전 허가없이 사용을 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