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er

순간, 오열하듯 음악을 듣고 싶었다

몇일전인지 모르겠다. 부산사는 사람 눈으로 보기엔 몇년만에 폭설이라고 해도 좋을만큼의 눈이 내렸다.

간밤동안 20롤 정도 되는 필름을 현상하고 고장난 전기장판덕에 온몸을 와들와들 떨면서도 피곤에 찌든체 그야 말로 미친듯 잠들었다. 몇통인가 받지 못한 전화와 몇통의 문자들이 핸드폰을 울리고 있었다. 머뭇머뭇 잠결에 받은 전화 몇통들. 눈이 왔단다. 바깥을 보라고 한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그야 눈이 왔으니까.

머리를 긁적이며 물 한잔을 마시고, 작업실 창문을 열자 눈앞이 보이지도 않을만큼의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무감히 눈내리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래.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의지력 없이 습관처럼 카메라를 손에 쥐고 35mm 렌즈를 마운트에 걸고 3장인가 찍다가, 무엇인가 어렴풋 보이는 것 같은 느낌에 황급히 300mm 렌즈를 걸고 1장인가 찍다 말았다.
무엇인가 보일리 따위 없다.

참 사막같이 내리는 눈들이다.

적당히 얼굴에 물을 뭍히고, 적당히 수건으로 물을 닦아내고, 겨울이라고 해도 변변한 옷이 없는 단벌 롱코트를 주워 입었다. 지랄맞게 값이 500원이나 쳐 올라버린 담배 한개비를 물고면서 정부에게 분노하는 마음을 가라앉힌체 작업실의 냉기를 들이마셨다. 기분탓인진 모르겠지만 눈이 저토록 미친듯 뿌려지는데도 작업실 공기는 어제에 비하면 냉기가 덜한 기분이다.

아무 생각 없이 노라존스 음악을 틀어제낀체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잔뜩 찔러놓고는 의자에 온몸을 기대고 심통난 영감처럼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정말 사막같이 내리는 눈들이다.

무엇인가 아무 의미없는 일들을 몇가지 처리하고 정리를 한 다음, 담배를 물고 카메라 가방과 카메라를 울러메고 거리로 나섰다. 몇장인지 몇롤인지를 찍었다. 아마 비슷한 오브제만 엄청나게 찍어댔던것 같다. 어째서 그런것들을 찍었던 것인지 스스로도 납득이 잘 안되는 것들이다. 감정으론 조금정도는 고양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뇌는 아직도 흐르적 거린다.

갑자기 눈이 그쳤다.

.

.

싱글코팅 렌즈, 테스트.

400TX, XTOL, CPP2

도어즈

좋은 냄새와 무거운듯 밀도감 있는 공기와 따뜻하고 부드럽게 위무시켜 줄 수 있는 차 한잔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장소든, 그 곳을 가게 되는 계기와 현상태의 자신이 어떤지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익숙한 곳인데 낮설게 느껴지는 것은 항상 그런것과 관련이 있다.
요즘 들어 하루에도 세네번씩 낮설게 느껴진다.

도어즈의 노래 가사중에 이런게 있다.

People are strange. When you are Stranger.

입 닥치고 다 쓴 현상액이나 새로 타고
필름 현상이나 하는 것이 좋겠다.

……..

자식새끼

아주,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 이었다. 어머니는 대강 일을 마치고 나면서 문을 잠궈라는 말을 검은 철문 뒤에서 나에게 했다.

단지 내가 매우 날카로운 상태로 어떤 일을 하고 있은 상태라는 그런 사소한 이유로, 세번째 문 잠궈라는 말씀에 어머니에게 큰 소리를 질렀다.

\’그냥 두고 가세요!\’

문 밖으로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2~3분 쯤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분이 매우 우울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다. 그런데 전화기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어쩌면 이미 무슨 말을 하실지 알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그 말씀들이 되려 더 마음 아프게 할 것임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어있는 나의 머리통 속에선 아직도 아무런 소리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들린다.

I didn\’t come

아주, 예전부터 불과 몇년 전까지 나의 눈매라는 것은 날카롭다 못해서 아플정도의 눈빛을 지녔던것 같다. 아마도.

당연한건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건들기만 해도 베일것 같던 나의 모습은 어느덧 나름대로 모양과 형태를 잡아가고, 조금 정도는 둥글둥글하게 변한 부분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무엇을 느끼고, 바라보고, 다시 느끼고 행동한다던지.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바라보고, 행동한다던지. 둘중 어떤 시퀀스가 되었던 그러한 프로세스의 결과라는 것은 예전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워진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매섭던 눈매는 조금은 녹녹해지고, 약간씩 쳐져갔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이러한 많은 (나에게 있어선 정말 많은 것 이다) 것들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 머리에 총알이 관통당한듯한 충격의 번쩍임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훑고 지나갔다.

30분도 넘게 아무말 하지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겨우 담배 두가치를 태워내며, 겨우 겨우 사진 서너장을 찍어내며 사지가 찢겨나갈 것 같은 심신을 겨우 겨우 버텨낼려고 노력 하는것이 고작이었다.

무섭도록, 정말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무서웠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조금은 흘렸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 그럴땐 난 항상 무표정이다.
실상, 바뀐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모든건 Norah Jones 탓이다.

Don\’t know why

부드럽고, 미적지근하고, 메마르고, 끈적끈적하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실은 그렇지가 않다.고 믿고 싶다.

동그마니 조그만 나비가 있다.
날개짓을 할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가루가 떨어진다.

퍼더덕 거리는 날개죽지의 힘겨운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무런 소리도, 냄새도, 공간도, 빛도 없다.

날고는 있는 것인지, 어디론가 움직이고는 있는 것인지, 높이 떠 있는 것 인지, 바닥이라는게 있다면 거기서 날개만 퍼더덕 거리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단지, 동그마니 조그만 나비가 있을 뿐이다.

어디선가, 들리지 않는 냄새와 소리와 빛과 공간이 들린다.

무지의 한탄함.

몇일 전 현상중 원인불명의 이유로 360컷을 날려먹은 후 제정신이 아니었다. 원인불명이라고 했지만 인과응보, 이유 없는 결과 없다. 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서 백방으로 뒤져봤지만, 국내에는 전혀 자료가 없다. (단 한건도) 그나마 외국쪽 포럼과 평소에 잘 가는 곳을 뒤져봤지만, 역시 관련 쓰레드는 하나도 없었다.

그 중에서 그나마 한가지 귀중한 사실을 안 것은

\’XTOL 현상시, 절대 프리웨팅을 추천하지 않는다\’
라고 굵은 볼드 이텔릭체로 다른 문장에 비해 폰트 크기도 크게 기재 해놓은 것을 봤다.

역시 그런건가 싶어서 다시 해봤지만, 역시 현상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면 화나가는 것을 넘어 오기가 생긴다. 현상에 의해서 날려버린 필름은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이미 망친것은 망친것. 어떤 수를 써서라도 원인을 밝혀내고 XTOL 현상을 제대로 성공해보기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먼저 XTOL의 현상액 성분 분석, 특별한 것은 없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비타민 C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난 현상전에 필름의 촬영날짜를 필름 리더 부분에 유성팬으로 기입해놓는 습관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예전에 비타민 C는 기름 성분을 분해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 스쳐 지나갔다. 일단 퍼포먼스를 중시한 현상법을 빼고 가장 안정적인 현상법을 찾아서 시도를 했다. 물론 유성팬 기입은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그렇지만 알고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전의 과정은 항상 괴롭기 마련이다.
이제야 말로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영역의 시도로써 표현영역 확장의 도움을 줄 현상액을 겨우 쓸 수 있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XTOL현상시는 프리웨팅 금지, 필름에 유성팬 기입 금지.

하아…. 무식이 죄다.

괜찮아요

사실 요즈음 들어 항상 기분이 저기압이었다.
몇일 전 부터였는지, 몇주 전 부터 였는지 알 도리가 없다.
물론 평소엔 딱히 저기압이라고 할것도 우울해 할것도 없것만, 어쩐 일인지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다 보면 눅눅하게 젖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게다가 그저께 굉장히 중요한 필름을 현상중에 원인 불명의 이유로 360컷을 날린 이후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주 조금 과장을 해서 말하자면 암실을 다 때려 부셔버릴뻔 했다.

오늘 늦은 저녁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고 단촐한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이 가고 M군과 조금은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 새로운 커피를 주문하고, 묵묵히 천장을 바라보고 커튼에 드리워진 해바라기 핀을 찍고 테이블의 다리를 찍었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들었다. 어떤 음악이었는지 잘 기억나진 않았지만 무엇인가 익숙하게 조용히 허밍을 했다. 그 허밍이 꼭 울음소리만 같아서 그만두었다. 천천히 아득해지는 기운이 느껴지고 눈을 감고 있음에도 앞에 무엇인가 보여지는 기분이 든다. 많은 것들이 왔다가 사라지고, 들어왔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더 침잠해가고 M군이 말하는 이야기는 소리도 되지 못한체 아무런 자극마저 되질 못했다. 점점 더 빨려들어간다. 소파에 온 몸을 녹여낸체 벽에 머리를 기대고 커피를 조금씩 빨면서 새하얀 찻잔은 입술에 계속 묻어있다.

몇분이나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상태로 줄곧 오랫동안 있었던듯한 느낌이다. 몸속에 눌러 붙어있던 찌꺼기들이 조금씩 녹아가고 있는 느낌이 분명히 들었다. 갑자기 눈이 번쩍 떠지면서 나머지 커피를 훌훌 둘러마셨다.

무엇인가 정화된 기분이다. 커피에 취한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다. 아-주 오랫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다.

그리고 주인장에게 약간은 경박스럽게도 (왠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최대한의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주인장은 오히려 미안스럽다는 눈치다. 오늘 로스팅이 맘에 들지가 않아서 커피 맛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다음엔 정말로 맛있는 커피를 꼭 내어주겠노라고. 지금 계속 공부하고 있는 중인데 언제고 커피에 취하는 느낌의 제대로 된 원두를 볶아서 드리겠노라고, 그렇게 나에게 답례를 했다.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진심을 담아, 잘 마셨다고 말하고 미묘하게 좁다 싶은 계단을 올라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여전히 기분은 가라앉은 상태지만, 무엇인가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받은 기분이다.

몇일 전엔가 누군가 주인장에게 이렇게 물어본것을 들었던것 같다.
\” 이렇게 해서 가계 운영을 어떻게 합니까? 남는것도 거의 없겠어요. \”

약간 기묘하게 어눌한듯 밝고 담담한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 괜찮아요. 조금만 남기면 됩니다. \”

Sunny

\”난 사진에 무엇인가 숨겨두는 걸 정말 좋아해.\”

\”역시 당신 악마야\”

그리고 다음에 목소리 들으면서 이야기 하기로 했다.
밤 3시 52분. 하루를 마감하고 서로 자야 할 시간이다.

미묘하게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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