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예전의 일이다.
아주 라곤 하지만 대강 10년 전 즈음의 일이기 때문에 다시 생각해보건데 아주 오래전은 아니다.
당시에 사진학과 라는 것은 자신만의 개인 암실이 당연했고 필수라고 생각했던, 어떤 의미에선 정말 당연한 분위기라고 기억하고 있다. 난 암실이 없었다. 하지만 프린트는 해야만 했다.
여차저차 해서 한평조차 되기 힘든 통풍도 안되는 작은 암실에서 여름에 땀으로 샤워를 하면서 프린트를 했던게 기억이 났다. 현상액의 온도를 맞춘다는 건 당연 꿈 같은 일이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서 땀 흐르는걸 막고 손과 팔에 흐르는 땀을 그걸로 닦아내곤 했다.
프린트가 끝나고 나면 정말 옷을 입은체 샤워기의 물을 맞은 것 처럼 말라 있는 곳이라곤 거의 없을 정도가 되고나서 그것이 견디기 힘들면 샤워를 하고 아에 알몸으로 프린트를 하기도 했었다.
대부분 그렇듯 여차저차 해서 사용하게 된 암실은 역시나 여차저차 해서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선배집을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기들은 대부분 자신의 프린트를 하기에도 시간이 넉넉치 못하였기 때문에 그 쪽은 아에 고려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동기들과의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였다. 툭 하면 선배들이 각목 나무랭이나 대걸레 나부랭이를 들고 \’빠다\’를 때리는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시기였고, 선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는것도 나름의 용기가 필요한 시기였다. 붉은 깃발 아래 \’사상\’이 엇갈리면 간단하게 패거리가 분리되는 시절 이었다. 간간히 교문 앞에 최루탄이 터지기도 하고 데모하는 모습도 낮설지 않았다.
학과가가 있었는데 난 그 노래가 굉장히 싫었다. 치졸하고 졸렬하며 음율마저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어눌함에, 무엇보다 참기 힘든건 옛 선배들이 만든 학과가에 목적 자체가 당시 느껴기기론 마지 너덜너덜 해진 유령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면 나도 왠지 유령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당연히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몇번인가 불려가서 주의를 받기도 하고, 과의 분위기를 흐트린다는 명분 아래 각목이라던가 대걸레 따위에 맞기도 했다. 반항을 한 적도 있었고 어떤 경우엔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 사상적인 부분에 진지한 의문을 느껴 질문을 해본 적도 있다. 어떤 선배는 그런것과는 상관없이 각목을 손에 때지 않은 선배도 있었고 어떤 선배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며 나와 대화를 하기도 했었다. 이미 그 쯤이 되자 과내에서 난 거의 고립이 되었다.
혼자 밥 먹는게 익숙해졌고 불편하다던가 외롭다던가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난 그런 상황이 편했고 고마웠다. 그런 중에도 어떤 선배와 무슨 시시껄렁한 이유로 또 끌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유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것을 차분하게 이야기 하고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했다. 그나마 소위 대화 자체가 가능한 선배였다. 이야기가 끝날때 즈음 손에 잡혀 있던 각목은 창고 안으로 던져 지고 \’소주 한잔 하러 가자\’며 같이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난 사진을 너무나도 찍고 싶었고, 정말 갈증이 났다. 애가 타고 미칠것 같은 갈증이 아니라, 묵묵히 보고 그것을 다시 묵묵히 보고 그것이 어느 임계점에 닿으면 칼로 짖이겨 발기발기 찢어내듯 사진을 찍어나갔다. 언제 부터인가 단순히 과제 따위가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필름으로만 담아두기엔 이것을 프린트 함으로서 토해내야 한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도무지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예의 그 선배를 찾아갔다. 비교적 반갑게 맞이 해 주었고 암실이라고 하는 곳을 안내 받았다. 하지만 기대 했던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암실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느낌이 들 정도로 모든게 흐트러져 있었다. 거실 마루바닥에 확대기가 있었고 트레이는 청소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요즘 프린트 안하냐고 물어보니, 자신은 커머셜 쪽으로 할 생각이라서 관둔지 제법 되었다고 했다. 커머셜을 하면 어쨰서 흑백사진을 관두게 되는지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애써 물어보진 않았다.
트레이를 씻어내고 약품을 올리고 필름 캐리어에 원고를 끼우고 확대기의 노광을 넣을때의 그 빛덩어리가 쏟아지는, 서글프고 거칠며 갈곳 없는 에너지 덩어리를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몇번인가 선배내 암실로 가는 길목 앞 슈퍼에서 항상 고민을 했다. 알량한 지갑을 열어보고 지폐를 세어보고 쥬스를 사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몇번의 방문 동안 처음과는 다르게 점점 쌀쌀맞아진다.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약품도 모조리 선배의 약품을 쓰고 있었고 인화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이틀치 밥값을 치르고 쥬스를 샀다. 쥬스를 사왔다고 해도 태도가 달라진다던가 반긴다던가 하는 것 따위는 애초에 전혀 바라지도 않았다. 최소한의 염치 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결국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난 이틀치 밥값을 쓴건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바보 같은 일이고 한편으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은 그 뒤로 더 이상 선배네 암실을 사용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프린트한 사진을 손에 쥐고, 돌아가는 길에 몸을 올렸다. 육교를 건너던 중간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선명한 네이비 블루의 카메라 가방이 어깨뒤로 미끌어져 바닥에 떨어졌고 그대로 서서 쥐고 있던 사진이 손에 힘이 들어간 탓인지 조금씩 구겨져 갔다. 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육교 위 바닥에 주저 앉아 서럽게 울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고 군대를 다녀 오고 지금의 작업실을 만들었다. 그때 내가 제일 먼저 생각 한 것은, 나의 암실을 갖게 되었다는 기쁨 보다도, 다른 사람이 이 암실을 사용할땐 최소한 프린트 할때 사용 하는 약품 만큼은 그냥 주리라 결심 했던 것이다. 그 결심이 서고 나서야 나의 암실이 만들어 진것에 진심으로 기뻐 할 수 있었다.
내 작업실 이름은 DummyFactory 이다.
전산학 쪽에 조금이라고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Dummy가 무슨뜻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Dummy의 뜻은 의외로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속임수, 거짓, 쓰레기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런 공장이라는 뜻이다.
최소한 쓰레기 같은 사진은 만들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다. 이후 강산이 절반정도 변했고, 작업실은 주위에서 농담반 진담 반으로 말하듯 1년안에 망하진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한편으론 내가 사진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던 기회를 모조리 놓쳤다는 이야기도 된다. 십여년전에 비해 지금은 모든 것이 훨씬 좋아졌다. 마음만 먹으면 프린트는 언제든 할 수 있고, 냉정하게 봤을때(대강 봐도) 최고라고 할 순 없지만 제법 훌륭한 작업실이 되었다. 응접실엔 에어콘이 없지만 암실엔 에어콘이 달려 있다.(선물 받은 것이다) 덕분에 약품 온도 때문에 씁쓸해 하지 않아도 되고 수건을 머리에 싸매지 않아도 된다. 응접실엔 출력 좋은 석유난로가 없지만 암실에는 있다.(역시 선물 받은 것이다) 덕분에 추운 겨울에도 약품의 온도 유지가 된다. 두꺼운 옷을 입고 둔하게 작업하지 않아도 된다. 우여곡절 끝에 현상기도 구입 할 수 있었고, 내가 만든 사진을 판매 할 수 있기 위해 사용되어야 할 중성 프린트 워셔도 구입하게 되었다. 상당한 고가의 4×5 대형 확대기도 얻을 수 있었고 20×24 초대형 이젤도 구입 할 수 있었다.
현금 보유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항상 빠듯하고 한끼 밥값에 고민을 해야되고 필름값이 모자라면 노가다 뛰는게 어색하지 않게 되었고, 그런 식으로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예전을 생각하면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행복하냐고?
물론 행복하다.
그래서 행복하냐고?
..잘 모르겠다.
한가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진을 왜 찍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 할순 없어도
사진 찍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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