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의 시작은 보름달 때문이었었을까….

암실 작업을 시작 한 것은 지금으로 부터 17년 전이다.
당시 사진학과 분위기는 소위 있는 집 자제분의 소모임 같은 분위기였고, 누구 하나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매일 나오는 과제를 하기 위해선 개인 암실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 하였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당연히 그런걸 만들 수 없었던 가정 형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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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다 문득 올려다 본 새카만 하늘엔
침착하고 선명한 푸르고 노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달을 보면서 계속 걸었다. 오래도록 달을 보고, 길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육교를 보고, 가계를 보고, 뼈다귀 처럼 박혀 있는 나무를 보고 셔터가 닫혀 있는 가계를 보면서 영원할 것 처럼 오랫동안 멍하게 걸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뭔가 잘못 되었다. 멈춰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그 후부턴 멈출 수 없었다.
자정쯤 되어 돌아오자마자 사표를 쓰고 책과 CD들을 가방에 쑤셔넣고 짧은 잠을 잔 이후에 평소보다 일찍 가서 책상위에 사표만 둔체 구겨진 가방을 매고 도망치듯 부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이 행동을 한 것에 대한 나름의 큰 댓가를 치뤄야만 했었다. 이후의 계획 같은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근 1년 가까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집안에 몇가지 돌이키지 못할 일들과 오랫세월 곪았던 것들이 약속이나 한듯 연속으로 터졌고 동시에 돈도 바닥 났다. 아무런 희망도 꿈도 몽상마져도 있을 수 없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방황도 되지 못할 붕 뜬 나의 몸뚱아리와 마음은 바람 부는대로 흘러가고 있었고 동시에 사후 경직의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은체 수직으로 땅에 박힌 못 처럼 아무런 온도감을 느낄 수 없었다. 나를 지탱케 한 것은 미끌거리고 끈적거리는 축축하고 음울한 책과 음악 밖에 없었다.

뭐가 되었던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컴퓨터 그래픽 관련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엔 관련 학과 같은건 없었고 엉뚱하게도 사진학과에 가면 뭔가 비슷한 것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럼 사진학과를 가면 되겠네. 그럼 예체능 계열로 신청. 심플하게 결정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덕분에 수능을 한달 남겨두고 공부를 시작하여 시험을 치뤘다. 그리고 이후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사진학과에 가려면 실기시험을 쳐야 한다는 것도 이때서야 알게 되었다. 바로 사진학원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해보니 실기시험까진 한달 반 정도 남았다고 하며,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아무튼 시험을 치르려면 방도가 없었다. 수강료가 얼마냐고 물으니 100만원 이라고 한다. 이번엔 내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상식을 넘을 정도로 비싸냐고 조용히 물었더니, \’원래\’ 이 시즌엔 그렇게 한다고 한다. 당연 나에겐 그런 큰 돈 같은게 있을리 만무 하다.

지금 내가 그런 큰 돈이 없다. 지금 당장 최대한 낼 수 있는 것은 40만원이 한계다. 먼저 이걸로 등록하고 나머지 60만원은 차차 갚아가겠다. 라고 했더니 황당하다는 표정과 동시에 이녀석 좀 보게 라는 것이 섞여있는 표정으로 날 잠시 보더니 그럼 그렇게 하자고 했다.
간단한 등록 수속을 마치고 나서 선생이 한명 나오더니 카메라는 뭘 가지고 있냐고 물었고 나는 카메라가 없다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잠시 기다려 보라고 하곤 뒤에 들어가서 뭔가를 가지고 나왔다. 캐논 EOS 5였다. 이런 카메라가 세상에 존재하는 줄 몰랐다. 내가 알고 있는 카메라와는 완전히 다른 카메라다. 학원 카메라인데 빌려주겠다고 한다. 단 학원에 와서 빌려가고 수업이 마치면 놔두고 가는 식으로 하라고 한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겠다곤 하고 필름 3롤을 나에게 주며,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필름은 학원에 있는 건데 일단 필름 값는 따로 정산해서 나중에 달라고 말하며 일단 이걸로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고 기본적인 카메라 작동법을 십여분 동안 알려주었다. 자동으로 초점이 잡히는 것이 멋있었고 신기했다.

매일 오전에 가서 카메라를 빌리고 과제를 받고 버스를 타고 사진을 찍고 필름을 현상하고 저녁에 같이 수강하는 학생들과 사진을 같이 보는 식이였다. 몇가지 요령을 익히고 과제를 찍고 사진을 보기를 몇일 동안 하던 중, 수업시간에 선생은 다른 학생들의 사진에 대해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내 사진에 대해선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노출을 다르게 해봐라 정도의 이야기와 요령을 알려주는 정도였다. 어짜피 실기까지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왠 이상한 놈이 갑자기 들어와선 이제 카메라를 겨우 만질 수 있게 된 정도니 딱히 관심이라 던가 해줄 말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론 과제 같은것 보다는 그냥 적당히 내키는대로 기분대로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었다. 그렇게 또 몇일을 보내고 때론 이른 오전에 학원 책장에 있던 사진집을 보면서 놀라기도 했다. 이런 사진이 있었다는게 너무나 놀라웠다. 생생하고 충격적이고 오싹하고 부드러운 사진들이 나를 거쳐갔다. 몇시간이고 봐도 질리지가 않았고 몇일 후엔 책장에 있던 모든 사진집을 보았다.
그런 나날 중에 아버지께서 낡은 카메라 가방을 나에게 건내주었다. 캐논 AE-1 Program 모델이다. 50mm f1.4렌즈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조악한 싸구려 망원 줌렌즈가 셋트로 되어 있는 것이였다. 장롱에 있던 것을 발견하여 준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이 카메라가 나타난 시기를 생각했을때 마른 수건 쥐어 짜듯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만든 몇푼 안되는 정말 소중한 돈으로 어딘가의 카메라 상점에 가서 바가지를 잔뜩 쓰고 산 카메라 일 것이 분명하다.

다음날 내 카메라를 가져가고 작동법을 다시 처음부터 익힌 후 사진을 찍으러 나섰다. 멋진 AF도 안되고 자동으로 필름이 감겨지지도 않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내 카메라 라는 것을 처음으로 가지게되어 그런지 너무나 좋았었다. 게다가 뭔가 아무튼 느낌이 많이 달랐는데 그 느낌이 불편하긴 했지만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일 좋았던 것은 필름을 엄지 손가락으로 감아내는 와인더 크랭크가 제일 좋았다. 필름이 감겨 갈때의 느낌이라는 것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그렇게 사진을 내 마음대로 찍고 현상하고 수업시간엔 여전히 선생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선생에게 무책임하다고 까지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섭섭한 기분도 없었다. 어짜피 내 놓은 학생이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무튼 내가 찍고 싶은대로 찍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보고 때론 저녁까지 사진집을 다시 보고 돌아오기를 한달 조금 넘게 반복하곤 시험 전날이 되었다. 선생은 카메라 예비 배터리를 꼭 챙기라고 했고 설령 바로 어제 배터리를 바꾸었다고 해도 새것을 준비하라는 말을 했었다. 물론 나는 지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배터리가 특수한 모양이였고 비싸보였기 때문이였다. 게다가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다.

다음날 실기시험을 치를 곳은 시험장을 구분해주는 대단히 넓은 범위로 구분 로프가 설치 되어 있었다. 나누어 주는 필름을 받고 60분 안에 시험의 촬영 주제를 촬영 하는 식으로 진행 되었다. 천천히 걷다가 첫 컷을 누르는데 셔터가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시험 감독관에게 가서 카메라가 작동이 되지 않으니 봐달라고 했다. 몇분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배터리가 맛이 갔다고 한다. 그럼 시험장을 나가서 바로 배터리를 사오겠다고 하니 시험장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한다.

뭐… 여기까진가 싶기도 하고 해서 기왕 이렇게 된거 돌아다니면서 나라면 사진을 어떻게 찍을까 라는 기분으로 시험장 안을 산보 했다. 이렇게 찍으면 재미겠네. 이건 이렇게 하면 어떤 느낌이 나오지? 라며 얼굴을 땅에 대보기도 했다. 나름 그렇게 시험 시간이 30분을 넘어가고 있었을때 시험 감독관이 저기 멀리서 나를 부른다. 걸어가고 있는데 뛰어오라고 했지만 귀찮아서 조금 빠른 걸음으로 갔다.

촬영 끝난 사람이 나왔으니 그 사람 카메라를 빌려서 하라고 말한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카메라가 Nikon F4다. 다른 렌즈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건 빌려주지 않았다. 너무나 생소한 카메라인데 대강 눈치껏 이게 이런 기능일까, 뭐 그렇겠지. 라고 적당히 짐작하곤 멈춰버린 내 카메라에 필름을 빼고 50mm 렌즈만 달려 있는 Nikon F4의 필름실에 다시 장전 하였다. 그 동안 내가 봐왔던 것들이 있는 위치로 뛰어가서 촬영을 하고, 마지막 컷을 누른 순간 시험 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름을 제출하고 카메라를 빌려준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시험장을 내려올때 까지만 해도 별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들 크고 밝게 떠드는 목소리가 갑자기 나를 순식간에 우울하게 만들었다. 저기 멀리서 선생이 나에게 시험 잘쳤나고 물었고 나는 아니요 라는 목소리를 내곤 그대로 버스를 타고 아무말 하지 않은채 집에 돌아왔다. 그 이후론 학원에도 나가지 않았고, 지랄 같은 집에만 박혀 있었다.

합격 했었어도 걱정이었다. 입학금과 등록금같은 큰 돈 같은건 전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역시 계획이 없었다. 아니,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는 날들을 하루씩 부스러트려가고 있을때 전화 한통을 받았다. 수석으로 합격했고 입학금과 등록금 무료이며 그 밖에 몇가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등록 할거냐고 물어보길레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고 부모님에게 수석이라는 말은 하지 않은체 합격 했다는 말만 조용히 했다. 무척 기뻐하셨지만 그 시간은 불과 2분 정도의 것으로 입학금과 등록금 이야기를 하였고, 십몇분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둘러 둘러 하면서 나온 마지막 나온 진짜 말은 돈이 없어서 너를 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였다.

…그렇습니까. 라고 말하곤 몇 분간 정적이 가득 찼다. 나는, 내가 현재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선명하게 재차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수석으로 합격했고 입학금, 등록금이 전부 무료다 라는 말을 했다. 게다가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은 매 학기 기준 성적 이상이 나오면 장학금도 나온다는 말을 했다. 당시에 부모님은 내가 왜 그런 순서로 말을 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리고 나중의 일이지만 학교를 다니며 사진을 찍고 다른 과목은 시큰둥하였다. 연애를 했었고 출석률도 저조하여 기준 성적 이상의 일같은건 일어나지 않았다.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고 서로를 죽이고 죽는, 그런 정신이상적인 비린내가 나는 첫번째 첫사랑과의 연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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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실 작업을 처음 시작 한 것이 17년 전이다.
당시 사진학과 분위기는 소위 있는 집 자제분의 소모임 같은 분위기였고, 누구 하나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매일 나오는 과제를 하기 위해선 개인 암실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 하였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당연히 그런걸 만들 수 없었던 가정 형편이였다.

학과 선배들은 각목 나무랭이나 대걸레 나부랭이를 들고 \’빠다\’를 때리는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방법 착오적인 얼치기들이 가득한 시기였고, 선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는것도 나름의 용기가 필요한 시기였다. 붉은 깃발 아래 사상이 엇갈리면 어처구니 없이 쉽게 패거리가 나뉘는 시절 이었다. 간간히 교문 앞에 최루탄이 터지기도 하고 데모하는 모습도 낮설지 않았다.
과제를 하기 위해서 나 같은 붙임성 없는 성격을 가지고 선배들에게 매일 같이 빌붙어 프린트를 하고 과제를 하였다. 그렇게 전체를 다 돌고 마지막 남은 선배의 암실에서 몇일 동안 프린트를 하였다. 그렇게 암실을 찾아 다니며 빌붙는것을 계속 하다 보면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라는 눈치가 생긴다. 오늘이 그 날이다. 주머니엔 버스비와 이틀치 점심값이 전부였다. 최소한의 염치 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이틀치 점심값을 전부 털어 쥬스를 사서 선배 암실에 들어갔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쥬스를 건내주었다. 그 선배의 표정은 떨떠름하게 위에서 아래로 날 내려다 보았다. 사실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화지를 제외하곤 약품따위는 전부 선배 것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동안 고마웠던 것이 더 컸다. 남아있던 마지막 선배의 암실에서 프린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육교 위를 건너다가 나의 힘으론 어떻게 주체 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 전조도 없이 나를 덮쳤고 그대로 육교 위 한복판에 주저앉아 서럽게 짐승처럼 울었다. 암실에서 프린트한 사진을 전부 찢어 버리고 사방으로 던졌다. 찢겨진 조각이 나의 그런 기분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듯 무심하게 흩날리며 나의 머리 위에, 무릎 위에, 바닥 위에, 지나가는 자동차 위에 떨어졌다.

나는 휴학을 했고 약간의 돈을 벌었고 매일 밤 나가서 사진을 찍고 현상을 했고 군대를 다녀온뒤 그때 만들어 두었던 돈으로 작업실을 만들고 암실을 만들었다. 세상의 전부를 가진듯 했고 나에겐 이 이상 행복 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나에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으며 정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학교에서의 수업은 내가 필요로 하고 좋아하는 전공 과목과 철학 과목 외엔 여전히 시큰둥 했다. 성적은 여전히 좋지 않았으며 계속 사진을 찍었고 내 암실에서 작업을 계속 하였다. 암실은 무엇인가 태어나는 곳이다. 나는 암실에서 처음으로 옹알이를 했고 네발로 기었고 두발로 걸었고 눈을 가지게 되었고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으며 정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렇게 17년을 암실과 함께 하였다.

삼일 전 확대기를 사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 나의 마지막 남은 확대기가 어떤 여자에게 팔렸고, 이제 언제까지나 나만의 \’어두운 방\’ 이었던 암실은 영원히 끝났다. 암실이 있던 자리엔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확대기를 사고 싶다고 연락을 받은 그 날,
나는 또 다른 안녕을 고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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