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났다.
쾌청한 하늘, 따스하게 어루만져주는 햇살, 시원한 바람 그리고 파란 하늘.
자전거의 폐달을 밟으며 가른 바람속에 가을이 정말 잔뜩 있었다.
아쉽지만… 가을은 사진찍기 좋은 계절이니까 말야. 라고 생각하며 끝나버린 여름을 보냈다.
벨비아 필름을 카메라에 넣고, 눈이 부실정도로 파란 하늘 아래, 눈이 아플정도로 빨간것을 넣으면 이쁘게 찍혀 나오는 가을.
트라이 엑스 흑백 필름을 카메라에 넣고, 눈이 부실정도로 파란 하늘 아래,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보이는 레드 필터를 끼우고, 눈이 아플정도로 하얀 구름을 넣어 찍으면, 검은 밤 같은 하늘에 가슴이 부서질정도로 하얗게 떠있는 구름.
하지만 이런것 보다도. 주머니가 많은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서 좋다. 역시 사진찍을땐 주머니가 많은 옷이 좋거든.
잠을 자려고 채비를 하던중, 오랜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끊을때쯤 녀석이 말했다.
외롭다. 넌 외롭지 않냐. 라는 느낌의 이야기를 했던것 같다.
그래서 난 말했다.
아아. 그래 나도 외로워. 누구나 외롭지. 당연한거아냐. 너도 이미 알고 있는거쟎니.
그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은 후, 한참을 생각했다.
그래… 당연한거지…….. 라고.
편의점엘 들려서 버드 한병, 88 골드 1갑을 샀다. 점원에게 맥주 두껑을 열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길가다가 어떤 분에게 불을 빌려 담배에 붙였다.
40계단 밑둥에 앉아 담배를 피고 버드를 마셨다. 갑자기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자 맥주를 들고 천천히 작업실로 올라왔다.
인격수양이 많이 부족한 인간이라고 다시금 느꼈다.
강렬한 분노를, 기껏해봐야 맥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것이 고작이다.
목요일. 이제 훈련 마지막 날이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
정말 자기중심적인 여행을 떠나고 싶다.
훈련받고 돌아오는 길에 상당한 빗방울이 군복을 사정없이 적셔버렸다. 버스에서 내려 급하게 지하상가로 내려가서 무감히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남포동에서 중앙동사이를 이어주는 어딘가 퇴색한듯한 누런 느낌의 지하상가.
아무런 생각없이 가계를 지나치며 옷이며 장난감이며 싸구려 신발, 실생활엔 그다지 도움되지 못할법한 여러가지 물건들을 파는 가계들을 지났다. 눅눅하게 젖은 공기사이로 손님 하나 없는 가계들 속에서 무료한 표정들의 가계주인들. 어쩐지 거기 있는 물건들도 주인들의 표정과 닮아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마 내가 여기서 물건을 살 일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지하상가.
그렇게 젖은 군복을 입은체 걸어가다가 어느 조그만 옷가계를 지나쳤다. 나이는 20대 중반 조금 넘어보이는 여자 한명이 어떤 옷을 하나 들고 라이터에 불을 당겼다. 옷을 태울껀가?! 라는 생각이 번뜩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옷에 삐져나와있는 실들을 태우는 것이다. 아마 내가 너무 멍하게 지나가서 미쳐 그런 생각을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또 하나 생각이 드는건, 보통의 가계에선 주인이든 점원이든 그렇게 손님들이 지나가는 곳에서 당당히 옷에 라이터질 같은건 하지 않는 법이다. 가계의 이미지라는 측면에서도 그다지 좋치 않고 오히려 손님들에게 나쁜 인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작업을 한다 하더라도 보통 가계 열기 전, 닫은 후에 보통 하기 마련인데, 너무나도 당당히 하고 있는것이다. 그것도 무료함속에 뭍어나는, 사못 진지한 모습이다.
뭐랄까… 왠지 은근한 미소랄까 웃음이랄까, 나도 모르게 입바깥으로 그런 소리가 나와버렸다. 분명 기분 좋은 미소 혹은 웃음이다.
그곳에서 파는 옷들이 어떤종류인지까진 자세히 눈여겨보진 못했지만, 다음에 가계 구경이라고 해보고 싶어졌다. 혹 맘에 드는 물건이 있다면 하나 구입해도 좋을 일이다.
찝찝한 습기들이 온몸에 붙어있는체 눅눅하게 젖은 침대보 위에 몸뚱아리를 던지고 조그만 등을 하나 켜고 책을 읽는다.
아아… 대단히 행복하다.
그래. 정말 행복하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어떤 한 사람에게 있어서, 감정의 스테이터스는 일종의 주된 흐름이 있지만 대단히 미묘한것이다. 어떠어떠한 경우에 대단히 사소한것일지언정 사람을 대단히 짜증나게 하거나 혹은 노하게 만들수도 있는것이다.
거기서 단순히 아주 조금, 약간의 다른 기운이 들어간다면 혹 다른 말로 약간만 방향을 (정말로 아주 조금이라도) 바꿔나간다면, 대개의 경우 네가티브한 상태는 잘 오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있을경우 둘다 같은 상태일땐 참으로 곤란하다. 그리고 서로에게 원망을 하고 화를 내는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스테이터스 자체가 대단히 짜증스러워 진다. 그러다 보면 그 상대방 또한 짜증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설령 중간에 어느 한쪽이 약간 숙이고 들어간다고 할때, 그때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상황 점점 더 나빠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서로에 대한 의심따위를 하기 시작하게 된다. 물론 대개의 경우 시간이 지나고, 이성과 감정이 제대로 공존하는 사람에겐 대개의 경우 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경우가 있는 경우도 있다. 무슨 일이든 아주 작고 사소한 것 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세상의 이치때문이다.
보통 이정도의 상태가 되는경우 사람들이 평범하게 말하길 ‘지쳤다’ 라고 한다.
복잡하게 사사껀껀 따지고 싶지 않다. 그런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단지 부드럽게 숨쉬는 호흡이 그립다.
그렇게 있다보면 어째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나를 휘감아버리는, 아니 그것보다 어쩌면 무감한 맛의, 밀도높은 공기가 나를 누르는듯한 느낌. 머리속은 어쩐지 잠시 어디다 두고 온듯한 미묘한 유체이탈감. 웅크린체 무섭고 슬프게 울부짓고 있는 동물같은 끊임없이 무엇가를 갈구하는 그러한 비린내 나는 체취.
미적지근한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멀쩡히 무감하게 눈 떠있는 한 인간이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