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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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나약함을 누군가의 희생으로 극복하려거나 탓을 하여 덮으려는 인간이, 삶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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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정기적으로 생리가 오는 것과 비슷하게
나는 비교적 어떤 시기를 기준으로 정기적인 우울증을 겪는다.

그리 특별할 일도 아니고 만성도 되었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하고 밥은 맛이 없었으며, 딱히 재미있거나 신나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였다.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라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사실 이것 또한 만성이라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목욕탕에 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샴푸로 머리를 감고
뜨거운 물에 몸을 밀어넣고선
절로 흘러나오는 미적지근한 신음 소리를 토하고 난 뒤에,
거리를 나서면 얼마간 기분이 좋아진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려 맥주를 살까 했다.
그래 오늘 같은 날엔 무조건 맥주다.

4캔 1만원 세트. 즉 캔당 2,500원에 에비스를 입수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 어찌 되었건 저찌 되었건 세상은 조금씩 좋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500원에 에비스를 입수 할 수 있게 됨으로 나는 최소 6개월은 더 싸울 수 있다.

농담이 아니다.

원하는 것

깨진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보인 사진.  

존 시스템에 기반하여 필름 실효 감도와 하이라이트의 경계를 맞춰 캘리브레이션 된 데이터를 기본으로 내가 사용할 필름 현상 방법과 약품의 종류, 온도 그리고 암실에서 사용할 확대기의 특성을 미리 고려한 카메라의 노출을 정하고 촬영한 이후,

암실에서 베셀러 집광식 확대기에 일포드 웜톤 화이버 베이스를 사용하여 인화지에 빛으로 새겨넣은 후, 중탕된 덱톨에 희석비를 높게한 셀레늄 토닝을 거쳐 D-Max를 올리고 웜톤 화이버 베이스의 색감을 보다 깊고 풍부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너무 딱딱한 느낌을 가져서는 안된다. 부드러움 속에 단단한 덩어리 감이 양립 할 수 있는 균형감각을 유지 해야 한다.

이후 충분히 시간을 들여 오리엔탈 인화지 수세기에 픽서가 완전히 제거 될때까지 수세 시킨다.

오랜 경험상 문제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만에 하나 혹시 모르기 때문에 잔류 픽서를 확인 하기 위해 하이포 인디케이터 약품으로 같이 수세 했던 테스트 프린트에 픽서 잔류 여부를 검출한다. 이후 자연건조 방식으로 최대한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건조시킨다.

마지막으로 드라이 마운트 프레스로 표면과 광택감을 마무리 했었던 마스터 프린트 인데, 이후 보관은 중성 아카이브 박스에 중성 간지를 넣어 보관하였다.

지금도 장비만 있으면 바로 암실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 깊이 들어와있는데도, 막상 이 사진을 보고 있으니 잠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디지털로 오면서 많은 것들이 좋아졌다. 단언컨데 암실에서 작업 했을때 보다 지금이 여러가지 의미로 더 좋다. 프린트 또한 오랜 시간의 투자와 연구 끝에 마침내 납득 할 수 있는 프린트를 만들 수 있게 된 것도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심지어 나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프린트 하는 것으로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 최소한 본인 스스로가 납득이 안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와 무관하게 가끔 지독스러울 정도로 암실에서 프린트 하고 싶을때가 있다. 햇볕이 들지 않는 조용한 오후 2시 30분쯤 암실에 들어가서 다음날 태양이 반짝 거리는 오전 11시까지 프린트를 하는 동안, 오직 붉고 어두운 암등 아래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프린트를 거듭해나갈때 온 몸과 마음을 관통해나가는 감각 만큼은 지금까지도 대체 할 수 있는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종류의 것은 대체물이 없는지도 혹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그저 뭔가를 매우 정교하게 깎아내고 깎아내고 또 깎아내는 단순하고 정교한 작업의 반복일 뿐일지도 모를 암실에서의 프린트는,

때론 고통스러운 작품의 내용 때문에 때론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선 눈을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프린트를 만들 수 있다.그 과정에서 어쩌면 난 많은 위안을 받았던건지도 모르겠다.

과정을 따지자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암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와 어둡고 붉은 암등에서 빛나던 한 줄기 빛이 인화지 위에 새겨지는 마법의 시간 만큼은 여전히 암심에서 보냈던 숫한 날들 달들 년들을 환기하게 한다.

앞으로 내 손에 계속 카메라가 들려있을지 아니면 다른 뭔가를 들고 있을지 아니면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무사히 완료되어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형태로 정제되어 전시가 가능 할 수 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딱 그것 하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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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th is like poetry.
And most people fucking hate poetry.

– Overheard at a Washington, D.C. bar

진실은 시와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를 혐오한다.

– 워싱턴 DC 어느 술집에서 들려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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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죽음을 양분 삼아 꽃이 피듯
이 아름다운 세계 밑바닥엔
셀 수 없는 비극이 파묻혀 있다.

당사자라도 아닌 한
그대가 그걸 알 일은 없다.

그대는 그저 너무도 눈부신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채
대지를 짓밟고 나아가면 될 터이다.

그대의 비극은 양식이 되고
새로운 꽃을 피울 것이다.

Keep Walk

 

내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지식과 시간과 가용할 수 있는 한도 금액에서 정말 다 쥐어짜냈다.

더 이상 어떻게 달리 다른 방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선을 다 했다. 그렇게 날려버린 내 작업의 복구율은 최종적으로 50% 정도가 최대 한도였다.

2장 중에 1장은 위에 보이는 것과 같다. 20년 가까이 밀도를 가진 시간을 복구 하기 위해 정말 끈길기게 악착같이 여기까지 하고 보니, 포기와는 좀 다른 감각의 것이 밀려온다. 좋은 감정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감정만도 아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나에겐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두가지 감정이 물이 불 타들어가듯 흐르고 있다.
1년 반 전 부터 시작한 이 작업에 동참 해주셨으나 데이터를 복구하지 못하여 사라진 백 팔십 일곱 분들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죄송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다. 단순히 사진이나 작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의 순간 이자 신기루 같은 영원과도 같은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가 받아내어 맡고 있었으나, 이것을 잃어 버렸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

두번째는, 그 와중에 예술을, 나의 작업을, 지금까지 나의 삶을, 단절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도피 행위를 통한 생존의 열망에 가득차 있었던 와중에도.. 그런 나의 열망찬 의지와는 하등 관계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마주하고 렌즈 너머 상대방의 눈을 맞추고 작업을 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작업이 무사히 끝나고 잘 정련 되길 바란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전시가 될 수 있길 바란다.

목적

부질 없다는 감정을 제어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마음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새로잡아보지만, 걸레조각이 된 짜투리들을 맞춰서 다시 분류하고 정련해가는 과정에 휩쓸린 시간속에서, 나의 반쪽도 휩쓸려나가버린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게 휩쓸려나간 자리엔 두껍게 굳어있는 검은 피와 혈관이 빼쭉 튀어나와 있는 느낌이다. 이 짓거리를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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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시간을 쏟아부어
날라간 작업들을 복구 해봤으나 결과는 먹먹하다.

슬레지 헤머 들고 작업실 다 때려 부수고 싶다.

스트레스

난 기본적으로 단맛이 나는 음식을 싫어한다. 심지어 너무 당도가 높은 음식을 먹으면 두통이 오기도 한다. 단맛이라고 해도 사방이 추워질 즈음 껍질이 얇고 잘 익은 감귤 정도가 나에겐 딱 좋다. 기본적으로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이 좋은 것이다.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있어서 그런지 이십여 년 가까이 입에 대지 않았던 파르페가 먹고 싶어졌다. 흰 수염에 장발인 사십 대 남자의 두툼한 손으로 조그만 스푼을 잡고 혼자 파르페를 먹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음…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사실 파르페 자체가 어떤 공식이나 엄밀한 법칙이 있는 게 아닌 제법 멋대로의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파르페를 눈으로 볼 때, 첫 한입을 시작할 때 어느 것부터 먹을까 같은 가볍기만 해서 좋은 고민, 그저 달기만 할 터인데도 기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운율의 밸런스, 무엇보다 다 먹은 후에 빈 컵을 잠시간 바라볼 때 느껴져야 할 응당의 기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부산에서 먹을 수 있는 ‘당연한 파르페’를 파는 곳을 알고 있는 분이 있다면 꼭 알려주셨으면 한다.

의존심

고독을 이기려면/마광수

고독을 이겨나가려면 우선 ‘사랑’에 대한 헛된 꿈을 버려야 한다.
완전한 사랑도 없고 남녀간의 완벽한 궁합도 없고
진짜 오르가즘도 없다.
‘오르가즘’이란 말은 의사들이 만들어낸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사랑의 기쁨에 들떠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자.
미혼의 남녀라면 기혼자들이 떠벌여대는
남편(또는 아내)자랑이나 자식자랑에 속지 말고,
기혼남녀라면 남들의 가정생활과 자기의 가정생활을 비교하지 말자.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요 허풍쟁이이다.
다 불쌍한 ‘자기 변명꾼’들이다.
믿을 사람은 오직 자기밖에 없다.

물론 혼자서 살아나가려면 뼈아픈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혼자들이 고독을 덜 느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결혼하든 결혼 안하든, 모든 사랑은 결국
나르시시즘적 자위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두라는 말이다.

취미생활이나 일로 고독을 풀어도 좋고
그냥 가만히 앉아 시간을 때워나가도 좋다.
이래도 외롭고 저래도 외롭다.
그때 그때 슬피 울어 고독을 달래도 좋고
술에 취하여 허망스레 웃어도 좋다.
요컨대 ‘완전한 사랑’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희망’을 갖기보다는 ‘절망’을 택하라는 말이다.

절대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연애하고 싶으면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라.
자식을 낳고 싶으면 낳고 낳기 싫으면 낳지 말라.
사회명사들이 잘난척 하며 써 갈기는 ‘행복론’ 따위는
읽기도 전에 찢어버려라.
다들 자기변명이요 대리배설일뿐,
믿을만한 ‘고독의 근치(根治)처방’은 없다.
그것은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신(神)의 사랑도 믿지 말라.

정 외롭거든 술이나 담배를
자학적으로 마시고 피우며 시간을 달래나가라.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자살해도 좋고,
바람을 피울 용기가 있으면 바람을 피워도 좋다.
아무튼 뻔뻔스럽게 운명 아니 신(神)의 ‘심술’과 맞서나가야 한다.
‘고독’이란 결국 ‘의타심(依他心)’에서 온다.
의타심을 완전히 버릴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독으로부터
당당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절대로 ‘밑지는 사랑’을 하지 말라.
사랑을 하려거든 이기적인 자세로 빼앗는 사랑만을 하라.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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